제목 | Re: C. S. 루이스의 설명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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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진호원 | 작성일2019-03-20 | 조회수4,185 | 추천수0 | 신고 |
찬미 예수님! 제게 큰 도움이 되었던(지금도 되고 있는) 글을 소개해드림으로써 답변에 갈음합니다. C. S. Lewis의 "Mere Christianity"의 일부입니다. 개신교 형제께서 탁월하게 번역하신 책(제목 때문에 적잖이 오해받는 "순전한 기독교(홍성사)")에서 발췌하고 극히 일부의 용어를 다듬었습니다. 조금 길지만 찬찬히 읽어보시면 많은 유익을 얻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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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엔진을 처음 만들었듯이 인간을 처음 만드셨습니다. 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달릴 수 있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넣으면 달릴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분 자신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시고 우리 영혼이 먹을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다른 연료나 음식은 없습니다. 종교의 신세를 지지 않으면서 우리 식으로 행복하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요청해 봤자 소용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하느님과 상관없는 행복이나 평화를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복이나 평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역사를 푸는 열쇠입니다. 인간은 엄청난 에너지를 썼습니다. 여러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훌륭한 제도들을 고안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무언가가 잘못되었습니다. 언제나 몇 가지 치명적인 결함 때문에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들이 우두머리가 되었고, 모든 것을 비참한 파멸로 몰고 갔습니다. 사실상 이 기계는 망가졌습니다. 출발은 잘 한 것 같았고 처음 얼마간은 제대로 가는 것 같았지만 곧 고장나 버렸습니다. 인간은 잘못된 연료를 넣고 달리려 하고 있 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금껏 우리에게 해 온 짓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양심, 즉 옳고 그른 것에 대한 분별력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나 자신의 양심에 따르려고 노력하는 이 들이 나왔습니다(그 중 몇몇은 아주 열심히 노력했지요).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둘째로, 하느님은 제가 '좋은 꿈'이라고 부르는 것을 인류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좋은 꿈'이란 어떤 이방 종교에든지 다 퍼져 있는 기묘한 이야기,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어떤 식으로든 인간에게 새 생명을 주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느님은 한 특정한 민족을 택하여 자신이 어떤 하느님인가를―하느님은 한 분밖에 없으며 그는 옳은 행동을 원하신다는 것을―수세기에 걸쳐 그들의 머리에 심어 주 셨습니다. 그 민족이 바로 유대 민족이며, 그렇게 심어주신 과정을 기록한 것이 바로 구약성경입니다. 그런데 정말 충격적인 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이 유대인 가운데 한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하느님으로 자처하며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줄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전부터 항상 존재해 왔다고 했습니다. 또 마 지막 날 다시 와서 세상을 심판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도인 같은 범신론자라면 얼마든지 자기가 하느님의 일부라고 말하거나 하느님과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한테는 이 말이 하등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 사람은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그가 말하는 하느님은 그런 범신론적인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의 하느님은 세상 밖에 계시며 세상을 만드신 존재, 세상 모든 것과 완전히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이 점을 생각한다면, 이 사람의 말이야말로 인간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주장 중에 이제는 우리 귀에 너무 익은 나머지 무심코 흘려듣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 것은 바로 죄를 용서해 준다는 말,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 이 하느님이 아니라면, 이것이야말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 다. 우리가 알다시피 용서라는 것은 해를 입은 사람이 해를 끼친 사람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이 제 발을 밟았을 때 제가 여러분을 용서하는 것이고, 여러분이 제 돈을 훔쳤을 때 제가 여러분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발을 밟히지도 않았고 자기 돈을 도난당하지 도 않았으면서 다른 사람의 발을 밟고 돈을 훔친 당신의 죄를 용서해 주겠노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무리 부드럽게 표현한다 해도 얼간 이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그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언했으며, 그들의 죄에 피해를 입은 이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인 양 행동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정말 하느님일 경우에만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모든 죄는 하느님의 법을 깨뜨리며 그의 사랑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아닌 존재가 이런 말을 했다면, 역사에 등장했던 그 어떤 인물보다 우스꽝스럽고 자만에 찬 짓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이것은 이상하고도 의미심장한 사실인데)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복음서를 읽을 때 그에게서 우스꽝스럽거나 자만심에 차 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편견 없이 복음서를 읽는 사람들은 두말 할 나위가 없지요. 그리스도는 스스로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고(마태 11,29), 우리는 그의 말을 믿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가 인간에 불과할 경우, 온유나 겸손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고 해야 할 말들을 자주 했다는 사실은 알아채지 못하지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그 누구도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 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수준의) 정신병자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느님의 아들 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 을 틀어막을 수도 있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우리는 두려운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사람 은 그 자신의 주장대로 하느님이었거나(따라서 지금도 하느님이거나), 아니면 미치광이 내지 는 그보다 더 못한 자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미치광이나 악마는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정말 이상하고 경악스러우며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긴 해도, 그가 하느님 이었고 지금도 하느님이라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하느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적에게 점령당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무엇을 하려고 세상에 온 것입니까? 물 론 그는 가르치려고 왔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나 다른 그리스도교 저술들을 보면, 무언가 다른 일―그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 스도인들은 모든 이야기의 주안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그가 이 땅에 온 주된 목적이 고난받고 죽임당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 먼저 이 죽음의 핵심에 관한 한 가지 특정 이론을 꼭 믿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신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대반역'에 가담한 인간을 벌하고자 했으나 그리스도가 자원하여 인간 대신 벌을 받음으로써 우리를 사면하셨습니다. 지금은 이런 이론도 전처럼 그렇게 비도덕적이고 어리석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가 말하려는 핵심은 아닙니다. 제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이 이론뿐 아니라 다른 어떤 이론도 그것이 곧 그리스도교는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며 새로이 출발하게 해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에 관한 이론들은 따로 살펴보아야 할 사항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효력을 갖느냐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는 이론들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 이 효력을 갖는다는 사실 그 자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곤하고 배고플 때 음식을 먹으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현대의 영양학 이론들―비타민이니 단백질 이니 하는―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비타민에 관한 이론을 듣기 훨씬 전부터 사람들은 밥을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 이론이 폐기되는 날이 온다 해도 전과 똑같이 밥을 먹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루는 이론들 그 자체는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효력을 갖느냐에 관한 설명일 뿐입니다. 이런 이론들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마다 생각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교회―영국 성공회―는 그 중 어떤 것도 정 답으로 내세우지 않고 있지요.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보다 조금 더 나아간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효력을 갖는다는 사실 그 자체야말로 신학자들이 제 시한 그 어떤 설명들보다 무한히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모두가 동의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한 실재에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설명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모두가 인정하리라고 생각 합니다. 머리말에서 밝혔듯이 저는 한 평신도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이상 깊이 들어가는 것 은 위험합니다. 다만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제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리는 것일 뿐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 이론들 자체를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진스Sir James Hopwood Jeans나 에딩턴Sir Arthur Stanley Eddington의 글을 읽어본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원자나 그 비슷한 것들을 설명할 때, 독자들이 머릿속에 그림으로 그려 볼 수 있도록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 그림이 과학자들이 실제로 믿는 바와 똑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은 짚고 넘어가지요. 과학자들이 믿는 것은 수학적인 공식입니다. 그림은 그 공식의 이 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그림은 수학적인 공식이 '참'인 것처럼 ' 참'은 아닙니다. 그것은 진짜 원자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비슷한 것을 보여 줍니다. 이처 럼 그저 이해를 도우려고 만든 것이므로 도움이 안 될 때에는 얼마든지 폐기할 수 있습니다. 원자 그 자체는 오직 수학적으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 그림으로 표현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와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야말로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바깥에서부터 우리 세상으로 뚫고 들어온 역사의 지점이라고 믿습니 다. 우리 세상을 이루고 있는 원자도 그림으로 그릴 수 없다면, 이 일은 더더욱 그림으로 그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만약 이 사건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 자체가 이 사건은 우리가 이해했노라고 공언하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도 없고 누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닌 자연 너머의 사건으로서, 마치 번개처럼 자연 속으로 치고 들어온 일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요. 그 대답은 쉽습니다. 음식이 어떻게 영양분을 공급하는지 정확히 모르는 사람도 밥을 먹을 수는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어떻게 효력을 갖게 되는지 모르는 사람도 그 일을 받아들일 수는 있습니다. 사실 그 일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 일이 어떻게 효력을 갖는가에 대해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며,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고,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공식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이 모든 효력을 갖게 되느냐에 대한 이론들은 제가 볼 때 아주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그 이론들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 얼마든지 무시해 버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설명 도움이 된다 해도 실물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 되는 도식이나 도해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론은 제가 이미 말했던 것으로서, 그리스도가 자원해서 우리 대신 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면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겉으로만 보면 아주 어리석게 느껴지는 이론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면해 줄 작정이었다면, 그냥 사면해 주면 될 것 아닙니까? 그 대신 무죄한 사람에게 벌을 준다는 것이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이때의 벌을 즉결재판소의 '처벌'로 생각하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빚'으로 생각하면, 돈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의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경우에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는 '죄값을 치른다paying the penalty'는 말을 처벌의 의미로 보는 대신 '계산을 치른다'나 '비용을 부담한다'는 좀더 일반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경제적인 곤경에 빠진 사람이 있을 때 인정 많은 친구가 그를 구해 주는 수고를 감당하는 흔한 경험을 떠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빠져 있는 '곤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지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 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항복하는 과정―전속력을 다해 뒤로 도는 동작―을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는 장난삼아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굴욕을 감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수천 년간 익혀 온 자기 만족과 자기 의지를 버린 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회개는 선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정작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악학 사람인데, 완전한 회개는 선한 사람만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이 악해질수록 회개의 필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회개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더 적어집니다. 완전하게 회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완전한 인간―회개할 필요가 없는 인간―뿐입니다. 이 회개, 즉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며 일종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도로 찾으시기 전에 먼저 요구하시는 사항이 아닐 뿐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면제해 줄 수 있는 일 또한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회개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표현법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 "회개하지 않고 당신께 돌아가게 해 주소서"라고 구하는 것은 "당신께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돌아가게 해 주소서" 라고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일은 당연히 일어날 수가 없지요. 자,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회개를 거쳐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회개의 필요성을 주는 그 악함이 동시에 우리를 회개할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이 도와주시면 회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대체 어떤 뜻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까? 하느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은 이를테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추론 능력을 우리에게 조금 빌려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아이에게 처음 글쓰기를 가르칠 때, 아이의 손을 붙들고 함께 글씨를 씁니다. 그러니까 그 글씨가 쓰여지는 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쓰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사랑하고 추론하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하시고 추론하시기 때문이며, 그가 우리 손 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 금 우리는 하느님이 그 본성상 절대 하시지 않는 일―항복하고 고통을 겪으며 복종하여 죽는 일―에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에는 이런 일에 들어맞는 요소가 하나도 없습니다. 즉, 하느님의 인도가 가장 필요한 이 길은 하느님의 본성상 한 번도 가 보신 적이 없는 길입니다. 하느님은 그분이 가지고 있는 것만을 나누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본성상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다고 가정한다면―고통을 겪을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 한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본성과 융합되었다고 가정한다면―그 사람만큼은 우 리를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므로 자기 뜻을 포기할 수도 있고 고난을 겪을 수도 있으며 죽을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는 하느님이므로 이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과정을 거칠 수 있으려면 하느님이 우리 안에서 이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하실 수 있으려면 인간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이 가지고 있는 지성의 바다에서 물방울이 떨어져야 비로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죽음을 나누어 가질 때에만 우리는 회개라는 죽음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죽지 않는 한 우리는 그의 죽음을 나누어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인간이 되지 않는 한 죽으실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가 우리의 빚을 갚으셨으며 그로서는 전혀 겪을 필요가 없는 고통을 우리를 위해 겪으셨다는 말에 담긴 뜻입니다. '만약 예수가 인간일 뿐 아니라 하느님이라면 그의 고통과 죽음은 "그에게 지극히 쉬운 일이 었을 것이므로" 아무 가치가 없지 않느냐'고 불평하는 이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반발을 배은망덕하고 무례하다며 나무라는 사람도 있겠지요(이런 나무람은 아주 정당한 것 입니다). 그러나 제가 선뜻 그렇게 못하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 이 말에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주장은 옳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 의 생각보다 더 옳은 주장일 수도 있습니다. 완전한 순종, 완전한 고난, 완전한 죽음은 예수가 하느님이었기 때문에 더 쉬운 일이었을 뿐 아니라, 오직 그가 하느님이었기 때문에만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유 삼아 그의 순종과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은 너무나 이상한 일 같지 않습니까? 선생님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글씨를 써 주는 것은 그가 어른으로서 글씨 쓰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선생님은 아이보다 더 쉽게 글씨를 쓸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이를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글씨 쓰는 것은 어른에게 쉬운 일'이라는 이유로 선생님의 도움을 거절하고 글씨 쓸 줄 모르는(따라서 '불공평한' 이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다른 아이에게 배우겠다고 우긴다면, 글씨 배우는 일은 아주 지지부진해지고 말 것입니다. 제가 급류에 빠졌는데, 강둑에 한 발을 딛고 있는 어떤 사람이 저의 목숨을 구해 주기 위해 팔을 뻗었다고 합시다. 그때 제가 "아니, 이건 불공평해! 당신은 지금 유리한 위치에 있잖아! 강둑에 한 발을 디디고 있으니까" 하고 소리쳐야(물에 빠져 숨을 헐떡거리면서) 마땅하겠습니까? 그가 가진 이점―여러분이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이야말로 그가 저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자기보다 더 강한 존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대속Atonement'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해하는 저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하나의 그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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