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어찌 우리가 하느님의 깊은 뜻을 / 아브람과 야곱에 대하여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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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0-01-22 | 조회수272 | 추천수0 | 신고 |
과연 인간이 자신만의 욕심을 내세우기 위해서 거짓말을 서슴없이 내세우고 그것이 우리의 속성이라고만 단정할 수가 있을까? 비록 선과 악이 우리에게 내재되었지만, 그래도 악보다는 선이 많이 작용할 거라는 생각이다. 악이 많다면야, 노아 이후 또 다른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을 게다. 비록 물로서는 아닐 것이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집트의 파라오(창세 12,19)에게, 그라르에서 아비멜렉(창세 20,2)에게 거짓말을 했단다. 그는 아내 사라를 ‘아내’라고 하지 않고 ‘누이’라고 했다. 이게 거짓말이란다. 과연 거짓말을 했을까? 둘 사이는 이복형제(창세 20,12)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배다른 동생이다. 아브라함은 파라오나 아비멜렉에게 사라가 ‘마누라 즉 아내’가 아니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단지 ‘내 누이’라고 했다. 바른말을 했다. 그러나 성경 저자나 우리는 거짓말을 했다고 단정한다. 어쩌면 큰 틀에서는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하느님은 거짓말을 한 아브라함을 양쪽 지역에서 다 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보상을 받았다. 하느님의 깊은 뜻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달리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이집트나 그라르에서 아브라함이 만약 ‘사라와는 부부’라고 말했다면, 형제 간의 결혼 등의 간통죄로 더 엄중한 벌을 수도. 유다 관습으로는 형제간에 결혼이 허용되었지만, 이민족에서는 오히려 큰 벌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야곱도 마찬가지다. 신성한 축복을 야곱에 불의하게 가로챘다는 것은 우리의 오해일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레베카에게 야곱이 형 에사우를 대신해서 장자권을 차지하겠다고 이미 일러 주었다(창세 25,32 참조). 다만 우리는 야곱과 이사악의 아내 레베카가 모의해 늙은 이사악을 속였다고만 단정한다. 그래서 성경 저자나 우리는 야곱이 불의하게 신성한 축복을 가로챘다고 속된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 이 역시 우리가 모르는 하느님의 심오한 뜻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내용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심오한 뜻이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다만 큰 틀에서는 거짓을 저질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깊게 묵상해보면 꼭 거짓말을 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거짓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양면성을 함께 고려하면서, 이게 다 하느님의 심오한, 우리가 몰라도 되는 ‘그분만의 숨은 뜻이 있었구나!’라고 여기면 좋을 것 같다. 더구나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욕망만을 내세우고자 거짓말을 서슴없이 내세우는 악한 존재라는 것을 먼저 내세우는 것은 조금은 무리가 있다 하겠다. 성경의 내용 전체를 보면 그래도 악보다는 선이 많이 작용했다고 보여진다. 이렇게 선이 많기에 우리는 신앙인으로 지금도 성경을 부담 없이 대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 선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하신다. 비록 우리가 죄를 지을지라도,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그래도 죄짓는 것보다는 선한 행실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참으로 하느님의 깊은 계획은 우리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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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야곱,선과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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