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신다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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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서채석 | 작성일2020-08-30 | 조회수1,712 | 추천수0 | 신고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조금 외람되지만, 동양의 고전들과 비교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온고이지신(溫古而知新). 옛것을 살펴 새롭게 안다했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2천년 전의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노자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라 했습니다. 도를 도라 말하면, 그건 이미 도가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예수님은 사랑을, 공자는 인(仁)을, 석가는 자비를 모토로 하였습니다. 결국 세분 말씀은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동서양을 떠나 온 누리가 "사랑"이 절대 덕목으로 자리매김 한 것 같습니다. 가족, 부족 단위로 살 때는 사랑하기가 쉬웠습니다. 내 형제 친인척들간의 사랑이기에 어렵지 않게 사랑할 수 있었지만, 도시의 출현은 타인과의 사랑을 야기시켰습니다. 주님의 이른바 "이웃 사랑"이라고나 하겠습니다. 그 사랑에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하거나, 놀라워 했을 것 입니다. 전혀 새로운 경험이었으니까요.
주님께서는 인간을 "진실로"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완성되어 함께 모여 사는 곳. 그 곳이 창세기에서 잃어버린 낙원의 복원이고, 하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주님께서 "사랑"을 정의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것이 사랑이겠느냐, 혹은 사랑이 아니겠느냐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랑을 모르셔서 그러하지 않으셨습니다. 인식의 한계가 아니라, 언어의 한게성 때문이었습니다. 실제 제자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이시라고 정의하지도 못했습니다. 스승님께서 위대하신 줄은 알겠는데, 한마디로 이런 분이라고 정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면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얼떨결에 튀어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이심전심으로 전해진 것이겠지요. 주님께서는 그것을 가르쳐 주신 분은 성부라 하셨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 순간 매우 흐뭇해 하십니다. 본인의 말뜻을 옳게 인식하고 있는 제자가 있다는 것에 많이 기뻐하신 것 같습니다. 마치 공자가 안회를 그토록 사랑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거기 까지 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주님에게 "사탄"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은 스승을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그런면에서 주님께서는 어쩌면 늘 혼자이셨고, 고독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일이 이런한데, 주님께서 제자들은 듣도 보도 못한 천국을, 사랑을 직설적으로 가르치려 하셨다면 언어 장벽에 막혀 제자들은 제자들대로, 스승은 스승대로 서로가 너무 답답하기만 하고 의사 소통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 입니다. 제자들이 인식 가능한 범위에서, 알아들을 언어의 범주에서 에둘러 표현해 주어야,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당장은 모르더라도,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겨 곱씹고 또 곱씹어서 그 말의 진의에 접근하려 했을 것 입니다. 이를두고 말씀을 돌판이 아닌 살 심장에 새겨준다 하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성경 묵상과 유사하다 하겠습니다. 언어가 엄청 발달했다는 지금에도 여전히 성경은 몇 마디의 말로 요약은 커녕, 그 깊은 속을 전체적으로 훤히 들여다 볼 수조차 없지 않습니까!
하여, 주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애제자들에게 말씀 하실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 입니다. 그래도 부족하다 느끼시면 따로 설명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깨달은 고매한 스승의 애틋한 제자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수난 마지막날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스승님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몸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했을 떄 그들은 정말 많이 놀랐을 것 같습니다.하여 주님께서는 제자는 스승을 능가하지 못한다 하셨을 것 같습니다. 주변에 그분께서 본인의 모든 것을 알고 속시원히 소통할 수 있는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여, 그분께서는 가끔 하늘의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아뢰고, 말씀드렸던 것 같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철저한 고독과 버려짐 같은 처절함이 묻어 나오는 대목입니다. 하여, 마리아가 발치 아래서 그 분 말씀을 경청하는 것을 두고 칭찬하셨던 것 같습니다. 상대가 다 알아 듣지 못해도, 본인이 말할 수 있고, 또 그것을 열심히 들어주는 이가 있을 때 우리도 즐겁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많이 하시는 걸 즐기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묵이식지(默而識之). 침묵 가운데 깨달음이 있습니다.
인간의 형이하학적 지식으론 주님 말씀을 다 터득할 수 없었기에 스승님은 직설적으로가 아닌 비유로 말씀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 인식의 틀이 드디어 "오순절"에 성령 강림을 통해 깨어져서, 그 지평을 넓히게 됩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그렇게 깨우치기를 갈망하셨던 것들이 그제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라고나 하겠습니다. 하여 주님께서는 본인 뒤에 오실 분께서 알려 주신다 하셨고, 주님 자신이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이롭다 하신 것이 아닐까요? 성경은 지식으로는 이해 불가한 것 같습니다. 말씀을 체득하여 자신을 갈고 닦아 그것이 인식의 영역을 넓혀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연결 될 때, 동양식으로 군자(君子)의 길에 들어섰다 할 것 같습니다. 주님께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첫째가는 계명이라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이라 할 수 있고, 하느님 말씀 전체를 꿰뚫는 핵심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를 동양에선 일이관지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용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천명지위성(天命之爲性), 솔성지위도(率性之爲道), 수도지위교(修道之爲敎); 하느님 말씀이 우리의 성품이요, 그 성품을 따름이 도이며, 그 길(도)을 닦는 것이 교육이다. 즉, 하느님 말씀이 우리 본래의 성품이기에 그 성품에 따라 사는 것이 곧 우리의 길이요, 그 길을 닦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 즉 교육이라는 것 입니다. 성경 말씀이 진리인 것은 결코 변하거나, 퇴색하거나, 혹은 무의미해 지지 않고 우리의 본성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어서일 것 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돌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쳐다 보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제 글이 형제님의 궁금하신 사항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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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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