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유물과 성해 공경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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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재범 | 작성일2021-03-28 | 조회수4,691 | 추천수0 | 신고 |
+찬미예수님
성인 공경과 성물을 거룩하게 다루는 것은 당연한 것이나 마치 부적과 같이 다루는 것은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성물은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 합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 한다면 마치 미신과도 같아 질 수 있으니 주의 해야 합니다.
아래에 성유물과 성해공경에 대한 몇 가지 자료를 올립니다. 여기에 1급 2급 3급에 대한 설명이 포함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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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물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나 사도들 혹은 여러 성인과 관련이 있는 물품을 가리키는 말.
거룩한 것으로 여겨져서 경외의 대상이 된다. 특히 순례자나 일반 신자들이 성유물을 한 번 보고 축복을 얻으려고 몰려들기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는 성유물 하나 없는 성당은 빈곤하기 그지 없었다고 한다. 유명한 성인의 유해를 안치하면 몰려오는 순례자들 때문에 해당 지역의 경제가 재편성될 정도였다.
가톨릭에서는 성유물을 3등급으로 나눈다. 1등급은 위의 사진과 같이 성인의 유해, 2등급은 성인의 유품, 3등급은 살아생전 성인의 몸에 닿았거나 성인의 시신에 닿은 물건이다. 유럽의 성지에서는 성유물이라며 천조각이나 십자가 목걸이를 파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보통 3등급 성유물, 즉 성인의 유해를 닦기 위해 사용한 천이나 이때 어떻게든 유해에 접촉된 성물들이다. 하지만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가끔씩 2등급이나 1등급(!) 성유물이 규모가 큰 경매시장에 나오기도 한다.
가톨릭의 예전 교회법은 모든 성당 제대에 성인의 유품이나 유해를 안치해야 한다고 규정했기 때문에,[2] 바티칸에서 성인, 또는 무명 순교자의 유해를 조금씩 잘라 세계 각지의 성당으로 보내주기도 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지금은 해당 교회법 조항이 폐지됐기 때문. 진품이라고 신뢰할 만한 성인의 유해와 유품은 한정되었는데 성당은 계속 늘어나니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명한 성인이라면 이미 유해를 간직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넘기려고 하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조항이 폐지되었다.
하지만 제대에 반드시 성유물을 안치할 필요가 없어졌을 뿐, 성유물 안치가 금지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대에도 진품임을 신뢰할 만한 1등급 유물을 구하면 성당의 제대 안에 안치하는 예식을 하고는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헬레나가 열성적으로 성유물을 수집했던 것이 전통으로 이어진 덕분에[3] 어지간한 성유물들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소중하게 보관되었으나,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약탈되어 서유럽 각국으로 흩어졌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바우돌리노〉에서는 성유물이 어떻게 약탈되어서 어떻게 분배됐는지까지 알 수 있다. 참고로 주인공 바우돌리노와 친구들은 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가짜 성유물을 만든 뒤 팔아서 한 몫 챙겼다.
천주교가 타락했던 시절에는 성인의 유해라는 것을 매매하기도 했는데, 대부분 닭뼈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세바스티아노스나 크리스토포로스처럼 화살에 맞고도 죽지 않은 성인들도 있었는데, 중세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성인들의 성유물을 가지면 화살에는 죽지 않는다는 미신이 있었다고 한다.죽지 않아도 고통은 느끼지 않을까?
물론 예수나 성모 마리아, 사도들과 관계된 성유물은 등급 같은 것을 매기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가장 권위 있다고 통하는 것은 당연히 예수 관련 물품,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성유물 중에는 예수가 매달렸다는 십자가의 조각이 있다. 성십자가 또는 보목(寶木)이라고 부르는데, 십자가 조각 진품은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도 보존 중이다. 대한민국에는 십자가 조각이 3개 남짓 있는데, 그 중 유일하게 교황청의 인증서가 첨부된 진품은 천주교 청주교구 김웅렬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가 소유한 것으로 약 3 cm 정도이다. 천주교와 별개로 한국의 그리스 정교회에서도 가평 수도원에 성십자가 조각을 보관하고 있는데 성십자가 조각이 있는 위치는 오직 소티리오스 대주교만이 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십자가 조각들을 가지고 있다는 교회들이 어찌나 많은지, 각지에 보관 중인 성십자가 조각을 전부 다 합치면 평행세계의 예수님'들' 것까지 나온다는 비아냥도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는 주인공 윌리엄 수도자가 "우리 주님은 각목 2개로 만든 십자가가 아니라 널찍한 숲 위에서 돌아가신 모양이다."라고 탄식하는 대목이 있다.미국의 작가인 마크 트웨인도 "예수가 못박힌 십자가의 조각을 모두 모으면 배 1척은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며 깐 적이 있다. 다만 실제로 성십자가의 일부라고 알려진 나뭇조각의 양을 합쳐보면 대략 통나무 반 개 정도 분량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짜 성유물이 넘쳐나는 상황을 과장해서 비아냥거린 이야기로 생각함이 좋겠다. 사실 장 칼뱅 본인부터 친 기록이 있는, 상당히 오랫동안 개신교인들이나 세속주의자들이 본인들 시각에선 가톨릭의 미신스러운 부분을 깔 때 종종 사용하던 유서 깊은 드립이다.
이 밖에도 유명한 성유물로는 성녀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을 닦은 천조각,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롱기누스의 창, 예수를 못 박는데 사용했다는 성정(聖釘), 예수의 수의로 알려진 토리노의 수의 등이 있다. 최후의 만찬에서 썼다는 성배도 당연히 성유물이다. 예수가 머리에 썼다는 가시관의 가시 조각, 예수가 태어났을 때 담았다는 말구유의 조각 등등 별 게 다 있다. 물론 이 유물들의 진위는 알 길이 없다.
그 다음으로는 성모 마리아에 관계된 성유물이 유명하고, 12사도들에 관계된 성유물도 권위가 높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성 마르코의 유골을 가져와서 모셨는데, 이슬람교를 믿던 당시 이집트 왕조에 들키지 않으려고 이슬람 교도들이 싫어하는 돼지고기 안에 숨겨서 가져왔다. 복음사가들 중 한 명인 성 마르코를 수호성인으로 모셨기 때문에 베네치아 교회는 상당히 높은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베네치아의 상징은 성 마르코의 사자로 지정되어 국기에도 새겨졌다. 한편 십자군 이전에는 9세기 에스파냐 갈리시아 지방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된 대 야고보 사도의 유해가 성 야고보를 레콩키스타의 정신적 지주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으로 만들었고,그의 유해가 모셔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지방으로 향하는 순례길은 중세부터 현대까지 명맥을 이어온다.
그 외에 여러 성인의 유해나 소유품도 성유물로 통한다. 너무 귀하게 여겨지는 나머지 죽자마자[4] 시체를 토막내서 솥에 넣고 팔팔 끓여서 뼈만 발라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유명한 성인의 유해가 있다고 알려지면 순례객들이 몰려오느라 마을의 경제가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몇몇 성인의 유해는 방부 처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부패하지 않고 보존된 경우가 있다.[5]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죽음을 직감하자 고향 아시시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죽어가는 몸으로 아시시까지 가는 동안 아시시에서 호위병을 보내왔다. 외지에서 죽으면 해당 마을에서 "이젠 우리 마을 성인이심." 하고 차지할까 봐. 아시시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하자 성당을 세우고, 성당 부지에 비밀스럽게 땅을 깊숙히 파서 시신을 안치하고 입구를 봉쇄하여 아예 도굴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너무 잘 숨긴 나머지 몇백 년간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이 정확히 성당 어느 지점에 있는지 잊혔다가 20세기에나 다시 알려졌을 정도. 또한 유명한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망 이후 말 그대로 시체가 갈가리 찢기는 일을 겪었다...라고 하지만 정작 실제로는 툴루즈에 그의 무덤이 있다.#
죽은 성인뿐만 아니라 살아서 이미 성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사람도 고생이 많았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달라고 사정하는 사람이 매일같이 개미처럼 달라붙으면 곤욕일 수밖에…. 대표적인 예로 사제들의 수호성인인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가 있는데, 성인이 병자성사를 주러 갔다오는 길에 머리카락을 뽑아가거나 가위나 이빨(!) 등으로 옷을 찢어 갔다고. 또한 성인은 아니었지만 당대에는 성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던, 십자군 전쟁 시절의 은자 피에르의 경우에는 그가 타고 다니던 나귀의 털마저도 성유물이라는 말이 돌았다.
중세에는 워낙 성유물로 사기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면죄부처럼 평민들의 돈을 뜯어내는 목적으로 악용하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많았으므로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를 위시한 종교개혁가들이 이를 거세게 비판했고, 오늘날에도 개신교에서는 성유물을 우상숭배, 미신으로 간주하므로 전혀 인정치 않는다. [ 출처-위키백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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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해◆
한자 聖骸 라틴어 reliquiae 영어 sacred relics
성인(聖人)의 유해(遺骸). 성해는 교회의 허가가 있은 후 공경(恭敬)의 대상이 된다. 유해를 소중히 모시는 일은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서 비롯된 것으로 다른 많은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불교가 그 한 예이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 성해를 공경하는 이유는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는 성인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지체였었고(게나디우스), 성신(聖神)의 궁전이었으며(성 아우구스티노), 고통을 받아 순교한 거룩한 몸으로(성 예로니모), 영원한 생명과 영광에로 불림을 받을 육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은 성인들의 유해 혹은 유물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많은 은혜를 내리시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는 사도 바울로의 몸에 닿았던 수건이 치유의 기적을 불러일으켰던 일(사도 19:12)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구약에서도 엘리야의 옷과 엘리사의 뼈를 통해서 기적이 일어났었다(2열왕 2:14, 13:21).
성해 공경의 가장 오래된 실례는 156년 경 스미르나(Smyrna)의 주민이 성 폴리카르포(Polycarpo)의 죽음에 관하여 쓴 편지(Martyrium Polycarpi)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편지에서 그는 성인의 유해가 대단히 귀중하게 다루어져 안치되었다고 기록하였다. 이러한 성해 공경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급격히 전파되었다. 동방교회에서는 1084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해 공경이 정식으로 인가되었으며, 성인의 유해를 옮겨가거나 분할하여 안치하기도 하였다. 이에 비해 서방교회에서는 성해 공경이 초기 교회의 카타콤바와 깊은 연관을 맺는데 4세기부터는 순교자의 무덤 위에서 미사가 거행되었다. 그러나 성해를 옮겨가거나 분할하여 안치하는 것은 금지되다가 7-8세기에 이르러 허용되었다. 787년, 니체아 공의회에서는 모든 교회가 반드시 성해를 모신 뒤 축성되어야 함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성해 공경은 박해시대 이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교도들의 영향으로 지나치게 과장되어 미신적인 것으로 흘러 교회 안에서 한때 이 공경을 반대하는 움직임(비질란시우스)도 있었다. 그러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와 같은 중세 스콜라 학자들이 그 신학적 토대를 확립하여 이 공경은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확증을 받았다. 교회법에 의하면, 추기경 혹은 주교의 인가를 받지 않은 성해 공경과 성해를 사고 파는 일은 금지된다. 성해는 성당 안의 성해 안치함이나 제대의 성석 안에 안치된다.
[출처 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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