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신부림 강론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나요?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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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경호 | 작성일2021-08-31 | 조회수2,209 | 추천수0 | 신고 |
8월 31일 화요일 서철 바오로신부님의 오늘의 묵상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랑의 삶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길은 죽을 때까지 걸어야 하고, 죽어야 비로소 완성됩니다. 예수님의 ‘세례’와 ‘죽음’이 대비되듯이, 이 사랑의 길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그 사랑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완성하고자 끝까지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랑의 길이 죽어야 완성된다는 묵상이 그것도 비로소 완성된다면 사랑의 결과는 죽음으로 이해해야 하는건지 문의드립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랑은 믿음, 희망이라는 상대자와 마주합니다. 신앙인의 꿈은 이때에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의탁하여 대상자를 바라보기에 때때로 발생하는 그것에 대한 맷집을 키워왔고 빛이 환할수록 어둠의 그림자도 짙기에 그것이 더 큰 비탄으로 다가올지라도 처음 가졌던 느낌 그대로 가고자 더욱 하느님 품으로 초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다 된 밥에 코 빠트리듯 한 방에 그것이 날아가기도 할 것입니다. 하여 하느님은 늘 깨어나라 너희의 몸과 마음 하나가 되라.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보다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을 용서치 못하는 것 또한 크게 보면 종교를 모방하는 정치인들의 공감전달법과 나-전달법에 인색한 우리 자신과 다를 바 없다고 꾸중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파도같이 휩쓸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소외 받으시며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떠나십니다. 절대자와 상대자라는 것 우리는 신앙의 모범으로 여자보더 강한 어머니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와 성령을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며 신 사도행전을 돌아보며 시행착오로 잘 못 살아온 본의아니게 이별을 해야 했던 세 사람중 한 사람을 봅니다. 그러나 보는 것이 아닌 함께하는 것이기에 맑은 침묵을 또한 소유하고자 애씁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절대자와 상대자와의 만남을 위하여 그 희망을 가꾸는 것입니다. 농부처럼 가꾸지만 농부도 생명을 창조하지 못하고 다만 자연에 순응하며 길쌈이라는 것을 맵니다. 현대화로 인하여 황금 송아지 숭배 사상이라든가 생명경시 사조 또한 6시간 단위마다 밀려오고 사라지는 싸움 구경 불구경 좋아하는 군중들에게 밀려오고 밀려갑니다. 그러한 군중속에 내가 있고 내 뜻 아닌 하느님의 뜻으로 크리스마스 그날처첨 무의식으로 고개 돌려 저 문 앞으로 지나가는 그 모녀를 봅니다. 그것을 끝까지 이루기 위하여 군중속의 너와 나는 사랑이라는 평생 공부를 합니다. 이 때의 핵심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길을 지나다 보면 그 외사랑이 또 다른 온사랑으로 그리고 남자의 마음 안의 해라는 그 여인과의 또 다른 짝사랑으로 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천주존재, 강생구속으로 세상을 이긴 하느님의 은총을 다시 믿고 상선벌악으로 신음하는 오늘 그를 다만 바라보며 그가 원하는 사랑을 위하여 다만 기도하지만 일반 죽음을 뛰어넘으며 거룩한 죽음을 위하여 공부생활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상자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 아닐런지요? 많은 신자들 또한 죽어야 산다는 말씀을 간과합니다. 때때로 사제도 수도자도 평신자도 방인도 이방인도 거울앞에 서서 나와 싸우는 나처럼 쌈박질에 몰두해야 하는 유투브 자녀들의 현상을 봅니다. 이는 "사람을 죽이지 말라"의 말씀과도 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대면 미사에 임하며 내탓이오로 가슴의 창을 세 번 두드립니다. 그리고 성체를 모시며 완전하신 그 분과의 최후의 만찬을 돌아보며 나를 죽이고 그를 살리는 아니 절대 사랑을 모시고 대상자를 만나는 여정을 기획합니다. 기획은 거창할 필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천상과 다른 세상은 그것을 3D업종이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를 묵상하건데 그것 또한 좋은 질문이라 여겨집니다. 일명 똥치우는 직업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묵상이 혹여 단순 웰빙신앙으로 느껴질 때는 우리가 홀로코스트 줄을 선 사제가 밥알을 뭉쳐 그들 몰래 성체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던 그러한 것들을 기억하지만 정작 나를 닮은 대상자 그와 하나되기를 쉽고 편안함에 젖어 망각하기 쉽기에 그 어려움을 그 초인적 삶을 지나가는 보이지 않는 가까운 이웃들의 모습을 응원하며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죽음 앞의 부모를 부모 닮은 고령사회 노인들의 움직임과 지팡이를 관찰해 두어야겠습니다. 가난은 놀라운 주님의 은총이고 부자는 천국 이르기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즉 방인은 이러한 영적인 부자로 천국에 오르기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자의 끝장을 이루려는 승부정신 여자의 섬세함과 조화를 이루려는 처음 만난 그 순간의 나를 돌아보며 마침내 너와 나의 생각과 느낌 달라 분리된 공감과 동감의 노래 느낌과 생각 마저도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되찾아 처음보다 더 처음의 동의로서 거듭나는 각오로서 결심으로서 대상자와 상봉하는 것 여기서의 상봉은 우리의 염원 영육의 통일이 담겼기에 스쳐 지나는 조우와 길에서의 해후라는 물방울이 모여 바위를 뜷듯 상봉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염원을 담고 있기에 하느님 한 분만을 소유하시며 세상에 외치는 서철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을 해후하게 하시는 초대이기도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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