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99,300번글 - 제 생각입니다. | 카테고리 | 성경 | ||
---|---|---|---|---|
이전글 | 299, 300번 글에 대하여 | |||
다음글 | 314번 글 -네말이다/ 제생각은 요 | |||
작성자조정제 | 작성일2000-07-03 | 조회수3,113 | 추천수5 | 신고 |
아래 서술되는 것들은 제 의견입니다. 숫자 계산에서 10이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이를테면 5+5=10, 2+8=10, 3+7=10 등등 하여 어느 하나의 제시된 의견만이 절대적으로 맞다 그르다 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으며 성서 안에서 어떠한 영감을 받으려 할 때도, 자신에게 떠오른 영감만이 최고다 라고 주장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가 다양하기 때문에 각자 나름에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여러 가지 의견 중에서 자신이 알아듣기 가장 좋은 의견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의견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와 부합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가 성서 특히 창세기 4장의 카인 이야기를 읽으며 묵상할 때 님과 같은 생각을 하였지만 지금은 극복을 하였습니다. 옛날 중학교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주임신부님 방을 불쑥 들어가 여쭙던 때가 기억납니다. 물론 그때 저는 신부님의 말씀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지금은 나름대로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내용을 구분하여 볼 때 1장에서 11장까지를 한 묶음으로 볼 수가 있겠고 12장부터 그 이하를 다른 묶음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이의 구분은 내용상 혹은 성서 저자가 위로부터 받은 영감을 그 당시의 언어라든지 관습 저자의 문학성 등등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카인의 아내가 누구냐 에 대해서 성서 저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성서 저자가 카인의 이야기를 할 때 카인의 아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없고 다른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로부터 난 카인이 누구와 결혼하였겠냐 하는 질문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 당시에는 아담 하와 이외에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그러한 질문에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언제 카인과 아벨을 낳았을까, 카인의 형은 없었을까 혹은 동생은 누나는 누이동생은 --- 그것이 한 명이었을까, 혹시 쌍둥이는 세쌍둥이는 --- 그렇다면 카인에게는 아벨을 포함한 수십명 혹은 수백명의 형제자매들이 이미 그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을까---- 재미있지만 짜증이 납니다. 그 이유는 성서저자는 이러한 것에 별 관심이 없었고, 다른 것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지요.
비슷한 예로 창세기 1장과 3장은 똑 같이 창조 이야기이지만 이야기하는 방법이나 목적이나 말하는 태도(서술하는 태도)등등이 확연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창조이야기가 창세기에 2번 나오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의 차이는 묻지 않습니다. 그 차이도 묻지 않고 엉뚱하게도 "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신데-창조주로서-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아시면서도 따먹지 말라고 하여 사람을 죽게 만들었을까, 그러므로 하느님은 ??? 창세기를 읽으시는 분들이 이러한 것으로 관심을 돌리다보니까 정작 성서 저자가 독자에게 주려고 한 영감의 영자에도 접근 못하고 성서가 진짜 하느님의 말씀일까 하는 문제만 골똘해 지는 것입니다.
하여 창세기를 비롯하여 다른 성서의 목록들을 포함한 성서의 저자들은 그때 그때마다 그 책들을 저술한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서술된 문장을 읽고 거기서 영감을 얻고 그 영감 안에서 행동양식을 변화시켜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것은 저희의 몫이지만.
카인과 아벨에서도 같습니다. 성서 저자는 아마도 제 생각에 크게 2가지의 영감을 주려고 했을 것 같습니다. 참고적으로 성서를 포함하여 다른 어떠한 문장을 읽을 때는, 주어진 그 본문 안에서 글을 차근히 읽고 영감 얻도록 시도합시다. 첫째로 저자는 카인의 아내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하느님이 창조하셔서 보기 좋은 이 세상이(창세기 1장), 창세기 2장 아담과 하와를 거치면서 마귀의 속임수에 빠져들면서 두 부부가 불신하고 서로 죄를 전가시키는 조그마한 폭력을 보여줍니다. 그후 4장 카인의 이야기에서는 부부의 폭력에 이어 형제간의 살육을 보여주면서 하느님으로부터 " 일곱 배의 복수를 " 원하는, 즉 폭력이 폭력을 낳으며 복수(폭력)의 증대를 이야기하면서 보복과 폭력의 급속한 확산을 암시하지요. 그리고 그 다음 장을 보시면 카인의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5장에서도 아들의 아내 같은 사항은 관심도 없어요. 물론 그 당시에 여성의 지위를 고찰해 볼 수 있을 자료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여하튼 카인의 아들 라멕은 하느님이 지으신 좋은 세상에 폭력의 극치 그 폭력이 도를 더 해 가는 모습의 극치를 보여 줍니다. " 아버지가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에게 일곱 배의 복수를 하였다면, 내 털을 건드리는 자는 일흔 배로 갚아 주리라 장담하지요. 그리고 교만 증오 자기방어 음행 등등의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자 하느님께서는 대홍수를 일으키는 이야기로 극을 달하면서 세상은 물로 심판을 받고 선택받은 자가 살아납니다. 다시 인류는 번성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이 되려고하는 교만이 다시 싹터서 바벨탑을 세우지만 다시 실패하지요, 창세기2-3장과 차이점은 2-3장에서는 두 부부가 하느님처럼 되려했지만 바벨탑에서는 인간 집단 저부가 하느님의 지위에 오르려고 합심해서 탑을 세웠다는 것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이제 그들을 심판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계획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은 다시 그 선택받은 자들 중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계약을 맺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이것을 염두에두고 계속하여 서술을 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이 교만과 폭력의 고리를 구약에서 제시한 ( 복수를 하겠다고 표현한)바로 그 숫자로 죽음으로 이르는 교만과 복수(폭력)의 고리를 끊으라고 제시하셨습니다. " 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아마도 이것만 말하려 카인 이야기를 썼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문자도 매우 중요합니다만 창세기 첫장에서부터 11장까지는 문자와 정신 그리고 함축성을 가진 상징성 등등이 너무도 중요합니다. 단순히 이런 문자로 되어 있다 창조 일자가 칠일이니 비과학적이다! -- 아닙니다. 단순히 신화적인 글이다 -- 아닙니다. 공룡이 없으니 이상하다? --- 없는 게 어디 공룡 뿐 입니까 플랑크톤이라는 말도 없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영감을 담은 글을 쓰는데 ,공룡을 창세기의 저자가 생각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노아의 방주에 어떻게 모든 생물의 한 쌍씩을 다 넣었을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노아의 방주는 구원에 대한 성서 저자의 섬세한 영감이 깃든 글이니까요. 노아의 방주이야기가 뜻밖에도 매우 아름답고 동화적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죄악을 보시고 홍수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하느님이 인간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것을 다 구원하시리라는 이 이야기는, 어린이나 어른들 할 것 없이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이 희망의 메시지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겠다는 그 이야기와 동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습니까. 성서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씌여 있습니다. 단지 수천년 전, 세상에서 그 폭력과 어둠이 날뛰던 그러한 세상에서(지금도 별반 차이없어도), 수천년전 문자도 표현력도, 과학적 합리적 사고방식이 덜 했던 그 시대에 하느님의 존재와 그 희망의 메시지를 창세기에서 볼수있는 메시지 이상, 더 어떻게 표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나마 양떼를 키우느라 정착하여 살지도 못한 유목 민족이 이웃의 좀 더 발전된 문화라든지 풍습 등등에서 비유를 따온 것도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서 지루한데 카인과 아벨은 미개한 유목민족(히브리족)과 보다 발전하여 정착된 농경문화 민족간의 혈투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압축한 것으로 이해하는 분도 있습니다. 목축을 하는 아벨(목축민-히브리인-야훼를 믿는 백성)이, 발전된 농경문화민족(다신교를 믿지만 문화적으로 발전된 카인족속)에게 압제(집단 살육) 당하지만 살아남는 그러한 역사 안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 한 것으로도 본다는 거지요. 고상한 말로 표현하면 고등학교때 배운 사회의 발전 단계 안에서의 유대민족의 생존사라고도 할 수가 있을까요(?)
이렇게 거창하지만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를 표현하려고 하는데, 카인의 아내라든지 공룡이 어딨느냐 하는 것은 안중에도 없을 테지요 우리 신화에 곰과 호랑이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곰이 웅녀가 되지요. 그러면 호랑이는 어디로 갔을까요. 또 그리고 왜 하필 곰이고 호랑입니까, 로마 신화같이 늑대가 나오면 안됩니까. 웅녀와 하느님이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면서요. 단군은 홍익인간의 기치를 걸고 조선을 세웠답니다. 나라를 세우는데 홍익인간이라는 말 하나로 세워집니까. 왕건이 고려를 세우는데 구름을 타고 와서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안에는 얼마나 많은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있었겠으며, 한 많은 민초들이 그 와중에서 서럽게 죽어갔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어지러운 시대에 하느님의 일곱배의 일흔번도 용서하라며, 사랑을 외치셨는데, 그 댓가로 우리 주님뿐 아니라 그 분의 제자들이 수 백년간 피를 흘렸습니다. 조선에서는 남녀평등 이웃사랑 하느님 사랑을 외치다가 2만명 이상이 처참하게 살육을 당했습니다.(순교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오늘에는 멎어있습니까. 여전히 카인의 이야기는 계속되지 않습니까.
카인 이야기라든지 기타 구약성서에서 첫 11장은 이러한 것들을 감안하시고 읽으시면 조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지루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