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16번-칼을 주러왔다. | 카테고리 | 성경 | ||
---|---|---|---|---|
이전글 | [Re 345] 창세기 42장 25절은 어디로? | |||
다음글 | [RE:348] 가톨릭대사전에서 | |||
작성자조정제 | 작성일2000-08-07 | 조회수3,063 | 추천수1 | 신고 |
예전에 저도 그러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 칼을 주려 왔다 " ???? 주님이 칼이라니!!!! 더불어 " 내가 평화를 주러 온줄 아느냐? 아니다. 분열을 주러왔다. " 그렇다면 주님은 싸움꾼!!!!????
그러나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지요 " 등불을 켜서 누가 됫박으로 덮어 두느냐?" 더불어 이런 말씀도 하셨지요 " 내가 너희의 귀에 대고 속삭인 것들은 지붕위에서 외쳐라"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 멍애는 가볍고 달다 "
이제 웬만큼 눈치가 있으신 분은 주님의 그 깊은 마음을 깨닳았을 겁니다.
창세이래 특수 지배권자이외에 대다수의 백성들은 한많고 서러운, 그러면서도 살육으로 뒤범벅이된, 절망적 세상의 피비린내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애닳은 삶을 살아 온 백성이라고 하여 그저 선하고 착하게만 살아 온것은 아닐겁니다. 먹을 것도 적고 추위와 더위를 맞써 싸워야하고, 몸을 가릴 주거지도 직접 지어야 했을 겁니다. 지금이야 문명의 발전으로 많이 나아졌지만요. 지금이나 그당시에도 자신의 지배권 혹은 기득권을 유지시키기위하여 못된 법률로 백성들을 옭어메고, 부패한 종교로서 백성들위에 군림하려고, 모든 짓거리를 꾸미는 무당 계통도 있었을 겁니다. 인류가 창조되었을 때부터, 시작된 그릇된 정치와 부패한 종교 삐뚜러진 사회 풍속 및 미숙한 전제적 통치를 뒷바침하는 법률등등
하여 창세기의 첫장부터 12장까지 인간의 교만과 그 이후로부터 드러나는 폭력의 글레 그리고 피할수 없는 죽음에 대하여 성서 저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후에도 예언자들의 음성은 생생하게 지금도 메아리 치구요.
하여 주님은, 그러한 사회적 부정과 폭력의 굴레와 제도적 억압 등등으로 자신들의 향락을 위해 백성들을 조이는 폭력의 고리를 깨어부수며 하느님 아버지께로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행복합니다. 진리의 말씀이신 우리 주님 자체가 온유한 분이시니 온유함의 평화를 느낄테니까요. 그러나 억압과 폭력의 글레안에 사로잡힌 무당들이나 정치세력들에게 주님의 말씀은 그들의 간악한 속셈을 그 폭력의 고리를 가르는 칼이 될 것입니다. 폭력에 굴레에 사로잡혀진 이들이 어디 그들뿐이겠습니까. 인류 모든이들의 마음에 그러한 죽음의 씨앗이 뿌려진터인 걸.
하여 주님은 우리에게 평화(거짓 평화)를 주려 오신분이 아니고 칼을 주러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 생명의 칼로 자신과 이웃의 죽음의 고리들을 한칼로 베어 낸후 거듭 날수가 있을 겁니다.
그 칼은 복음이었습니다. 등불이신 주님을 지붕위에서 밝히면 모든 것이 훤하게 들어납니다. 하여 그 등불에 모든 것이 드러나, 복음이라는 칼로 자신들이 거듭나든지 배척하든지 할것입니다. 우리 주님을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주님이 칼이 될것이며, 등불로 인하여 보든 것이 드러나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모일것이고 반대자들은 다시 반대자로 모일것이며, 무관심한 사람들은 또 그 들 마음대로 행할 것입니다. 하여 하여 주님의 복음은 분열입니다. 그러나 그 분열은 참된 평화를 주는 분열일 뿐입니다.
반대자에게는 주님의 복음이 칼날이 되겠지만, 하느님의 백성들에게는 주님의 복음은 가볍고도 달 멩에일뿐입니다.
이 멍에를 지고, 복음을 전하기위하여 사막으로, 밀림으로, 혹은 버림 받았다고 느껴졌던 땅으로 떠난, 수많은 하느님의 백성들을 생각합니다. 그분들이 뿌린 복음의 칼, 복음의 등불, 그 참된 평화가 오늘에도 지붕위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모든이들에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길 빕니다.
추신 루가 2장34-35절의 말씀을 더하여 읽으시면 더욱 강렬한 영감으로 와 닿겠네요. "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 뜨리기도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입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의 반대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에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것입니다."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