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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370] 구약과 신약의 다른 하느님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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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경민 쪽지 캡슐 작성일2000-09-17 조회수3,729 추천수2 신고

<비고 : 글이 다소 길다고 느껴질 수있지만,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길다고 느껴지시면 다운로드해서 보시는 것도 좋을 듯 싶네요 ^^;;>

 

  아래 글에 대한 답변이 늦어진 것에 대해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과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이 왜 다른지에 대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 주제로 글을 쓴다면 그것은 상당한 두께의 책의 분량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서에 나타난 이 다른 하느님의 모습을 아는 것은 성서 전체를 아는 것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서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왜 하느님께서 구약에는 그렇게 두려우신 분으로 신약에서는 구약과 달리 사랑이 넘치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제게 베푸신 은총을 쫓아서 감히 간략하게 쓰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에 나타난 하느님과 신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사람들은 거기서 한 분 하느님이 아니라 마치 두 분의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확실히 하느님은 구약에서는 두려우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신약에서는 이와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하신 바입니다.

 

  이렇게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 분의 인류에 대한 계획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세기의 처음부터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인류에 대한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구약을 통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과 신약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 서로 달랐던 것입니다.

 

  성서은 항상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해가 있으면 달이 있습니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습니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땅이 있으면 하늘이 있습니다.

 

  "고린1 15:47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성서가 무엇을 말합니까? 인간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땅에 속한 첫째 인간이 있으며, 하늘에서 난 둘째 인간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땅에 속한 인간은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에서 난 둘째 인간들은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성서를 가지고 계십니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까? 성서도 두 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류와 맺으신 언약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첫번째 언약이 바로 구약이며, 두번째 언약이 신약입니다.

 

  "히브8:13 하느님께서 새 계약이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먼젓번 계약은 낡은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첫번째 언약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제 낡은 것이 되었고,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방법은 창세기의 최초의 인류에게서 발견되어집니다. 바로 첫번째 언약하에 있는 사람을 상징하는 카인과 두번째 언약하에 있는 사람을 상징하는 아벨에게서입니다. 이 처음의 형제에게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방법과 왜 하느님의 모습이 신약과 구약에서 그리도 다른 모습을 하고 계시는지를 약간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카인은 하느님께 무엇을 드렸습니까?

 

" 창4:3 때가 되어 카인은 땅에서 난 곡식을 야훼께 예물로 드렸고"

 

  아시는 것처럼 카인은 이 저주 받은 땅의 소산을(창3:17) 하느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하느님은 이 예물을 기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속한 것은 하느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땅에 속한 곡식은 카인의 개인적인 노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카인은 곡식이 익을때까지 정말로 많은 땀을 흘렸을 것입니다. 카인은 곡식이 익었을 때에 참으로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비록 땅을 저주하시기는 하였지만, 그 땅에서 수고함으로 곡식을 얻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카인은 그래서 자기에게 있는 것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하느님께 바치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있는 것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고르고 골라서 하느님께 예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것은 반가워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든지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에게 속한 것, 사람의 행위에서 나온 것을 절대로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아벨은 무엇을 하느님께 바쳤습니까?

 

"창4:4 아벨은 양떼 가운데서 맏배의 기름기를 드렸다"

 

 아벨은 양의 기름을 바쳤습니다. 양의 기름을 바치기 위해서는 양이 죽어야만 했습니다. 마치 아담과 그의 아내가 범죄한 후에 하느님께서 가죽옷을 해 입히기 위해서 동물을 죽여야만 했던 것처럼 아벨은 양을 죽이고 양의 기름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하느님은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인의 노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양은 전적으로 하느님이 주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아벨은 하느님께 돌려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아벨의 예물을 기뻐하신 이보다 훨씬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양의 죽음입니다. 아벨도 아담의 자손으로 죄인이었습니다. 죄인은 절대로 거룩하신 하느님앞에 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회개한다고 하더라도 하느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개한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가 없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필요했습니다.

 

 "히브리서9:22  피 흘리는 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합니다."

 

 성서는 피 흘리는 일이 없이는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회개와 그에 해당하는 보속을 한다고 하더라도 죄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죄는 오직 피 흘리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를 위해서 성전에 양을 가지고 가서 사제에게 드리고 양을 죽였던 것입니다.

 아벨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예물이 하느님 앞에 반갑게 드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피 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고 있었고, 양의 피를 흘리고 예물로 기름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반기시는 예물이 된 것입니다.

 

 그럼 구약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합시다. 구약은 어떤 언약입니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것으로 십계명을 그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계명을 주시고, 사람은 그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지키는 사람은 복을 받으며,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벌을 받는 것이 구약의 간략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구약하에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법인 계명과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자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복을 받고자 합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특히 하느님의 법을 철저하게 지키던 자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주 나무라셨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굉장히 놀라운 수준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나무라기는 하셨지만, 그들이 오늘날 우리 옆에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도덕적 수준에 존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이 바리사이파 출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은 하지만 지킬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비난의 대상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많은 계명을 지키고 자기를 하느님 앞에 의롭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계명을 지켰다고 하더라도 하나만 어겨도 모든 계명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래서 성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3:10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꾸준히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주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하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하느님의 저주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모습이 구약에서는 사람들에게 두려우신 분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하에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보지 못하고 그 분의 저주만을 볼 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고 두려우신 하느님의 심판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깨우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구약성서를 읽을때마다 왜 하느님의 모습이 이렇게 신약의 모습과 다를까 궁금해 할 때에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알게하고자 하신 것은 바로 구약의 율법하에 있는 사람들은 저주아래에 있으며 두려운 하느님의 모습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3:20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 줄 따름입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율법, 즉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지킴으로 복을 받도록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것을 주심으로 구약의 하느님이 두려우신 분인 것을 깨닫고 율법을 지킴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 것이며, 단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자 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늘날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마치 카인처럼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경우에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자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자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저 자신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 매일 등교길에 묵주기도를 하고, 틈나는대로 기도를 하고, 주일 미사에 참석하고 다양한 선행을 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저에게 있는 것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하였습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것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에 이웃을 미워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노력은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 수 없었습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언젠가 보면 이웃을 미워하고 있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성서에 기록된 것처럼 저주아래에 있었던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보기도 하고, 십자가의 길을 보속으로 바쳐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피흘림이 없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 십계명, 율법으로 혹은 우리의 열심이나 우리의 선행으로 하느님앞에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까? 이것에 대한 해답을 써놓은 책이 바로 신약성서입니다. 신약성서는 바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피흘림에 대해서 써 놓은 책입니다. 누가 피를 흘렸습니까? 양이 흘렸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하느님 자신이신 우리 예수님께서 직접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요한 복음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마치 아벨의 어린 양처럼 죄인들의 어린양이 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피를 모두 흘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10:1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단 한 번 몸을 바치셨고 그 때문에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17~18 나는 이제 결코 그들의 죄와 잘못을 마음에 두지 않으리라.하고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용서받았으므로 이제는 죄 때문에 봉헌물을 바칠 필요는 없게 되었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말합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으므로 우리가 거룩한 사람이 되었다고... 그리고 이제 죄 때문에 봉헌물을 바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기억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언약입니다.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오직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하느님 혼자서 일하시는 언약입니다. 저희들은 그 하느님의 은총가운데서 다만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에 나타난 하느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사랑의 하느님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신약을 보면서 하느님의 참 모습이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구약의 저주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두려운 모습으로 벌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실제로 하느님은 그 저주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짧게나마 구약의 하느님의 모습과 신약의 하느님의 모습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 써 보았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이 글에 대한 어떤 의견이 질문이 있으시면 제게 메일을 주시기 바랍니다.

 

 --- 주 안의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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