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선 죄송! [Re : 501, 504]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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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호경 | 작성일2001-04-05 | 조회수1,860 | 추천수0 | 신고 |
+ 찬미 예수님 !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사무엘서에서의 사울의 죽음에 관한 차이점의 원인에 대해서 본 듯한데 도무지 저의 石머리가 굴려지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쥐어짜 보아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올린 것은 참고되는 조그마한 단서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한 그 당시 제가 보았던 그 원인도 그 책을 쓰셨던 저자의 추측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사과 드리면서, 알고 계신 분의 정확한 답변을 님과 함께 고대합니다.
[ 사울의 죽음에 관한 기술(記述)의 차이 ]
첫째, 사무엘서는 한 사람이 저술한 단독 저술문학이라기보다는, 여러 개의 구전(口傳)이나 여러 사람에 의해 쓰여진 문헌들을 한 번, 혹은 그 이상의 편집 과정을 거쳐 형성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양한 견해의 자료들이 혼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2) 문제는 당시에는 아직 왕정이 확고히 정착된 시기가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다윗의 초기까지는 여전히 부족연합 체제와 왕정의 과도기적 사회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왕정 지지파와 왕정 반대파가 혼재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울의 왕위에 대한 안정성도 그만큼 불안정했고, 사울에 대해서 지지하는 세력과 지지하지 않는 세력이 각각 존재하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이나 문서화된 기록들도 사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미화하는 것들도 있을 것이고, 반대하여 격하시키는 구전이나 문서상의 자료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기간 동안에 걸쳐 형성된 자료들이어서 그 출처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 딜렘마입니다. 자료의 출처를 정확히 알 수만 있다면 차이점에 대한 원인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사무엘서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문헌들의 편집 방향을 보면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왜 기록되어 있는가 이해가 됩니다. 사무엘서의 편집 방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록에 통일성이 없을 때는 모두 그대로 옮겨다 놓았다. 2) 다른 문헌으로 보충하기도 하였다. 3) 기록 정리가 가능하면 하나로 통일하여 정리하였다. 4) 기록 정리가 불가능하면 두 개의 지료를 모두 병행하여 기록하였다.
셋째, 사무엘서는 열왕기와 더불어 다윗 왕조에 대한 정통성과 솔로몬의 왕위 등극의 정당성를 옹호하기 위한 작품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실들을 사울에 이은 다윗 왕조를 위주로 편집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등장 인물들에 관한 기술도 다윗을 위한 내용으로 편집되고 각색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 사무엘 하권 1장 20절에서 계집들이 좋아하는 이유 ]
"오랑캐"(새번역성서에는 "할례받지 않는 자들")는 역시 블레셋을 가리킵니다. 사울은 당시 여러 민족들과 전쟁을 하였습니다. 블레셋, 에돔, 모압, 아말렉, 아라메아 등이 그들이었읍니다만, 가장 큰 적은 역시 블레셋이었습니다. 사울이 죽었다면 가장 좋아할 사람들은 역시 주적(主敵)이었던 불레셋 사람들이었겠지요. 그들은 당연히 좋아 날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계집들"(새번역성서에는 "딸들")이 문제가 됩니다. 성서를 읽다보면 흔히 도시나 국가, 또는 거기에 거주하는 민족에 대해서는 여성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사람"을 "시온의 딸"이라고 표현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여기서 "계집들(딸들)"이란 글자는 그런 맥락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발티, 발티엘에 대한 문제 ]
설마 그럴리는 없겠지만, 님의 말씀대로 행여 잘못 인쇄되었을까 하는 우려에서 구약성서의 원본 히브리어 텍스트를 대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텍스트에도 사무엘 상권 25장 44절에는 "팔티"(히브리어 원발음으로는 "발티"가 아니라 "팔티"입니다), 사무엘 하권 3장 15절에서는 "팔티엘"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인쇄나 번역의 오류는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 문제도 사울의 죽음에 대한 차이점의 경우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덧붙일 것이 있다면 다음과 같은 경우들도 참고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발티"와 "발티엘"에서의 차이는 뒤에 "엘"이 붙어있는가, 빠져 있는가의 차이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히브리어로 "엘"은 "신, 하느님"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엘"의 복수형, 또는 존칭이나 강조형이 성서에서 "하느님"으로 번역되는 "엘로힘"입니다("야훼"는 성서에서는 "주님"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이 "엘"은 흔히 지명이나 사람의 이름에 첨가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지명으로는 "벧엘"(성서에는 "베델"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인명으로는 "사무엘", 나라 이름으로는 "이스라엘"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를 뜻하는 "임마누엘"도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로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 사람의 호나 아호를 부를 때도 있었고, 밖에서는 본 이름을 부르지만 집에서는 어릴 때의 애칭이나 별명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고, 또 약칭으로 부르는 등등 말입니다. 신약성서에서도 이러한 경우를 많이 봅니다. 사도 바오로의 경우에도 "바오로"와 "사울 혹은 사울로"가 있고, 사도 베드로도 "게파" 와 "시몬 베드로" 와 "시몬 바르요나" 등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 나눔 ]
다시 한번 강조드리지만 정답은 아닙니다. 제 생각이 이렇다는 것일 뿐입니다. 다만 이것이 해석에 어떤 실마리를 제공하는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제안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위에서 언급하는 두 가지의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점은 님께서도 그렇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해 드렸듯이 그러한 차이점들이 있다는 사실들이 사무엘서의 저자 문제나 저술 시기, 편집 문제에 대한 문학비판적 연구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과, 보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편집자들의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와 사고방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서도, 또 그것을 정리하고 편집함에 있어서도 자기네들의 입장과 관점을 대체적으로는 고수하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반대 견해를 가진 측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편집을 하면서도 가능하면 반대편 사람들이 보유한 자료들도 최대한 존중하여 수록하였고, 그들의 사상이나, 심지어는 표현 방법까지도 보존하여 그대로 수록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점은 사무엘서 뿐만 아니라 성서의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최근 <GoodNews>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서 보여주고 있는 "청량리 사건"에 대한 교우들의 "(세속적 혹은 사회적) 자유"라는 명분하에서의 무책임하고 어지러운 태도를 볼 때, 더더욱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러한 개방된 자세가 돋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개방된 자세야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사무엘서에서의 중복되면서도 서로 다르게 묘사되어 있는 대목들에서 배워야 하는 신앙인의 덕목이 아닌가 합니다.
정답도 아니면서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았습니다.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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