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知善惡果"의 의미 [Re : 570] | 카테고리 | 성경 | ||
---|---|---|---|---|
이전글 | 창세기에서 '선악과'에 대해.. | |||
다음글 | 그렇담...만약에... | |||
작성자김호경 | 작성일2001-08-31 | 조회수2,232 | 추천수0 | 신고 |
+ 찬미 예수님 !!!
사실 님이 품고 있는 의문은 어쩌면 당연한 의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으로 그 답을 알 수 없는 곤란한 의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우선 이 성서구절에서 우리가 가장 궁금해 할 수 있는 사항이 바로 "惡의 기원"에 대한 의문이고, 많은 이들이 이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1. 먼저 <창세기>에서 인간의 범죄 부분(창세3,1-24)을 저술한 작가들(야훼계 작가)이 어디에 중점을 두고 이 부분을 저술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전체적인 흐름의 이해를 위해서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되어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 부분을 저술한 야훼계 저자들은 "惡"에 대해서 인간 실존을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신비로서, 결코 해명되지 않은 불투명한 실존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다시 말해서 야훼계 저자들은 惡을 하나의 현실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惡은 인간의 실존과 더불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그래서 그들은 惡의 기원을 따지려고 이 부분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惡의 존재를 이미 현실로 받아들이고 단지 惡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의 실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문제제기를 위해 이 부분을 저술한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이 구절에서 "惡의 기원"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惡의 기원"을 알아낼 수 있는 명확한 단서는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악의 기원"을 알아내려는 시도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한편으로는 하느님께서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므로 惡도 하느님이 창조하셨다는 주장과, 한편으로는 善이신 하느님에게서 절대로 惡이 나올 수는 없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는 것입니다.
2. "善과 惡을 알게하는 나무"는 성서 전체에서도 오직 창세기의 이 부분에서만 등장하며, 당시 성서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주변 근동지방의 문헌에도 나와있지 않다고 합니다. 또한 이 나무는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되는데 있어서 주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기에서의 "善과 惡"은 윤리적 의미에서의 "善惡"이 아니라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즉 모든 일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 결정 그리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참된 판단의 몫은 오직 하느님만의 것입니다(마태7,1-5; 루가6,37-38.41-42 참조). 그래서 판단할 수 있음은 곧 하느님의 능력과 영역을 뜻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경계, 즉 인간의 한계점을 설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인간의 한계점이란 다름 아닌 인간이 인간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은 지켜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결코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표지판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 나무가 뜻하는 것은 또한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이 당신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까지 선물로 주셨으나, 인간의 불완전성을 아시기에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한계점을 설정해 놓으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인간 자유의지의 한계점을 상징하는 계시적 설정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따라서 "善과 惡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창조 질서의 표시입니다. 즉 인간의 위치와 역할에 관한 하느님의 뜻이 확고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최고의 가치와 사랑을 부여받은 존재이나, 결코 홀로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인간은 하느님과, 자연과, 또 다른 인간사이의 질서를 지키며 살아야만 참된 행복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넷째, "善과 惡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명령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참된 사랑의 질서를 제시한 명령입니다.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의 의지가 깔려있는 명령이며, 인간이 자신의 한계 내에서가 아닌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는, 그래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의 의지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인간의 참된 행복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따르며, 그분 안에 머무를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분과 같이 되려는 교만을 범할 때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이 금지 명령에서 볼 수 있습니다.
3. "뱀"에 대한 의미를 살펴봅니다. 여기서 인간의 타락에 대한 촛점은 인간 자신이지 "뱀"이 아닙니다. "뱀"은 단지 인간의 번죄에 대한 유혹의 원인을 "뱀"으로 형상화했을 뿐입니다. 즉 성서의 야훼계 저자는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는 유혹은 인간 내부에서 스스로 유래한 것이며, 범죄를 저지른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인간 자신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을 "뱀"이라는 상징적 실재를 이용해 표현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훼계 저자들은 왜 하필이면 "뱀"을 선택했을까요? 우리가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다른 동물이나 사물도 많은데 말입니다. 당시 근동지방에서는 뱀 숭배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변 국가들의 뱀에 대한 숭배사상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앙(야훼신앙)에 위협을 가했으리라 판단되고 있습니다(민수21,8-9; 2열왕18,4; 요한3,14 참조). 그래서 야훼계 저자는 자신들은 뱀을 단지 하느님의 피조물로 여기고 있었지만, 이러한 주변 국가의 신앙적 위협으로부터 자기 민족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뱀"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부여하려고 "뱀"을 선택한 것입니다. "뱀"에 대해서는 여기 <성서 묻고 답하기>의 #509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4. 여기서 우리는 "惡의 기원"에 대해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나타난 惡 혹은 罪는 결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신 자유의지라는 특은을 하느님의 의도대로 사용하지 않고 잘못 사용함으로써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고, 惡이 발생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로 상징되고 있는 인간은 자유의지라는 특은을 잘못 사용하여 죄를 범하였고, 스스로 고통을 느끼는 존재가 되었으며,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자유의지를 남용할 때의 대가는 바로 불행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5. 인간의 범죄에 관한 이 이야기를 대하는 우리는 죄를 짓게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야훼계 저자들이 사용한 소재들(예를 들면 "지선악과", "뱀" 등)에 집착하기 보다는 인간이 죄를 짓게 된 동기(자유의지의 남용)와 그로 인해 빚어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변화를 잘 살펴보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넘치는 자비와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점입니다. 즉 인간에 대한 처벌의 밑바탕에서조차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 의지가 깔려있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성서를 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결코 님과 같은 의문에 고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근무 중에 시간적 여유가 없는 짧은 시간에 정리를 하여 산만한 답변이 되었습니다. 이점 사과를 드립니다. 그렇지만 뻔뻔스럽게도 잘 이해하시기를 바라봅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