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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30 십자가 칠언 중에서...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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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시몬 쪽지 캡슐 작성일2002-03-25 조회수1,988 추천수0 신고

† 찬미 예수님 !

 

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기 바로 전에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돌아 가시면서 남기신 십자가 7언 중 하나입니다. 질문을 하신 분은 아마도 학생의 신분으로 보입니다만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교리는 우리 인간 세상의 어떤 질서와 현상에 대한 기준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며 디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가르켜 주셨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수도회 사이트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본 일이 있는데, 그 분들은 삼위일체의 공부를 하시면서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답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하나이지만 3위가 존재한다는 어려운 내용을 억지로라도 우리 세상의 현상에 맞추어 보면서 물을 예로 들었습니다. 물은 본질은 변함이 없는 하나의 물이지만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면 얼음이 되고, 또한 따뜻해지면 수증기로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이 결국은 비가 되어 땅으로 내려 오는 자연현상에 비유를 해 보기도 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며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신 말씀을 삼위일체와 관련지어 연구하면서 어떤 사이트에서는 이렇게 설명한 부분을 보았습니다. 일찌기 어떤 신학자는 하느님은 한 분이지만, 자기의 계시와 구원의 역사에서 세 가지 형태를 취하시는 "삼위의 일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의 형태 속에서는 창조자로, 아들의 형태 속에서는 구원자로, 그리고 성령의 형태 속에서는 생명을 주시는 자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쉽게 말하면 한 사람이 자녀들에게는 아버지로 나타나고, 아내에게는 남편으로 나타나고, 어떤 회사에서는 사장의 신분으로도 나타난다고 보시면 이해가 좀 쉬울까요? 어쩌튼 하느님의 세계는 우리 인간세상의 그것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이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던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과 살면서 인간과 똑같은 배고픔의 고통과 심적 갈등도 느끼셨고 죄를 짓는 우리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셨으며 구약에서 남기신 하느님 말씀을 신약에서 완성하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본질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는 인간의 본질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절규가 나타났던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삼위일체인 하느님에 대한 이해의 바탕 위에서 질문하신 내용에 대하여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어느 신부님께서 해설하신 내용을 그대로 복사하여 옮겨 드리오니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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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상 예수님 말씀>

 

성서에 언급된 십자가상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뜻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잠간의 묵상으로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1. "엘리 엘리 레마 사박티니?"(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27,46; 마르15,34)

 

이 구절은 시편 22편 1절의 인용 구절로, <마태오 복음>과 <마르코 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각각의 표현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시편>과 <마태오 복음>에서는 "엘리"로, <마르코 복음>에서는 "엘로이"로 되어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엘리"라고 하셨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엘로이"를 "엘리야"로 잘못 들을 가능성이 있음을 감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이 구절은 언뜻 우리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고통에 지치신 예수님께서 마치 당신의 외아드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침묵만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원망하시는 절규와도 같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원망하셨다고 하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예수님의 하느님께 대한 원망의 구절이 아니라 오히려 찬양의 구절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신약성서 저술 당시의 이스라엘의 언어 습관이나 저술 관례에 따르면 어떤 시편의 첫 구절 혹은 어느 한 구절만을 구송하거나 언급함은 그 시편 전체를 구송하거나 언급함과 똑같이 여겼다고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구절은 시편 22편 1절의 인용입니다.  복음서에는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시편 22편의 첫 구절인 이 부분만을 부르짖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당시의 이러한 이스라엘의 관례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시편 22편의 첫 구절만을 부르짖으신 것이 아니라 시편 22편 전체를 부르짖으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시편 22편 전체의 의미를 살펴보아야 하지, 시편 22편 1절의 이 문구만을 가지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시편 22편은 하느님께 대한 찬양시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침묵만을 지키시는 하느님을 원망하셨던 것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까지도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 찬미하셨고 그분에게 자신을 의탁하셨던 것입니다.

 

둘째,  설령 위에서 언급한 당시 이스라엘의 언어 습관이나 저술의 관례를 무시하고, 이 구절만을 가지고 보더라도 이 구절에는 참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참 모습이 드러나 있는 구절입니다.

 

인간의 구원이란 다름 아닌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를 말합니다.  그러나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하느님의 神性과 인간의 人性의 일치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치를 이루기 위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강생하심으로써 당신의 神性에다 人性까지 지니시게 된 참된 중개자가 되셨습니다.  聖子라는 한 위격 안에 神性과 人性이라는 두 가지의 性이 섞이지도 그렇다고 분리되지 않은 채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과 하느님과의 일치를 중개하실 수 있는 참 메시아가 되신 것입니다.

 

이 구절에는 이러한 人性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참으로 절절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아버지에게서조차 버림을 받은 것 같은 깊은 인간적인 고독과 절망감이 나타나 있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 고독과 절망감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면서도 참으로 인간이심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신성만을 지니고 계셨다면 神性의 예수님에게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고독과 절망감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이 구절에는 또한 예수님 스스로 구약의 하느님의 구원의 계시를 성취하는 참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신원을 확실하게 표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한 참 메시아는 아버지에게서조차 버림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래서 그 무심하신 아버지를 잠시일지라도 원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고통을 받아야만 인간의 구원을 위한 代贖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죄 없이 고통받고 죽어야 하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상기해 보심도 좋을 듯 싶습니다.

 

 

2.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23,34)

 

루가 복음의 이 구절은 신약성서의 시나이와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는 나와 있으나 파피루스 75호와 바티칸과 베자 사본에는 빠져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당신의 원수 사랑에 대한 설교(루가6,27.55)와 친히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루가11,4; 마태6,12)에 대한 당신께서 손수 실행하신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최초의 순교자인 스테파노도 같은 기도를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사도7,60).

 

 

3.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23,43)

 

이 말은 예수님과 죄수는 죽는 순간 복된 곳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약성서에서는 종말 때의 부활을 기대하는데, 여기서는 죽음과 종말의 부활 사이의 인간의 거취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죽고 난 뒤에 종말의 부활이 있기 전에라도 인간은 낙원에 들어갈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음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낙원"은 구약성서에 2번 등장하고(아가4,13; 전도2,5-6), 신약성서에는 3번 등장하는데(루가23,43; 2고린12,4; 묵시2,7), 그 의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 나라"로 해석하였으며, 테오필라투스, 치릴로, 에우디미우스, 요한 크리소스토모 등은 "에덴 동산"으로 해석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고린토 후서>에서는 "의인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요한 묵시록>에서는 "종말 구원의 장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가23,46)

 

시편 31편 5절에 나오는 구절이며, 유다인들의 저녁기도문이기도 한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당신 죽음의 순간까지도 끝까지 침묵을 지키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철저한 신뢰와 순명과 봉헌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우리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임종에 대한 자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생의 마지막까지도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치면서 절대적으로 의탁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스테파노 역시 비슷한 마지막 기도를 바치면서 순교하였습니다(사도7,59).

 

 

5.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요한19,26-27)

 

교회론과 마리아론적 관점에서 대단히 의미가 있는 예수님의 말씀들입니다.  물론 자구적으로 볼 때는 당신의 어머니에 대한 죽어가는 외아들로서의 걱정이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전체의 문맥으로 볼 때는 이보다 훨씬 깊은 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성모님의 새로운 아들이 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는 예수님의 내적인 모든 것을 직접 들을 수 있고,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하신 중요한 모든 사건의 증인이 될 정도로 신뢰받는 제자이고(요한13,23-26), 예수님의 계시를 설명하도록 불림을 받은 신앙인이며(요한20,8), 믿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입니다(요한21,7).  즉 인간을 위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와 구원 계시, 곧 예수님의 복음을 중재하고 설명하는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예수님의 탄생이 고지된 순간부터 벌써 인류 구원 사업에 동참하셨고, 따라서 그 순간부터 구원받아야 할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던 분입니다.  십자가상의 이 말씀으로 인해 온 인류가 성모님께로 또다시 위탁된 것은 성모님게서 이미 모든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던 사실에 대한 장엄한 확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복음을 중재하고 설명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자기 계시의 내용이 널리 지속적으로 전파되어 결실을 맺도록 바라시고 돌보신다는 예수님의 유언과도 같은 의사 표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씀으로 성모님께서는 온 인류의 어머니가 되셨고,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계시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영원히 지속되고 전파된다는 사실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 "목마르다."(요한19,28)

 

십자가 위에서 겪으신 예수님의 이 육체적 갈증은 지독한 고통이고 쓰라린 슬픔의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뒤에 나오는 "이제 다 이루었다."라는 마지막 말씀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아버지의 일을 다 이루셔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잔"을 마셔야만 하는 것입니다(요한18,11).  따라서 예수님의 배고픔이나 갈증은 아버지의 뜻을 끝까지 다 성취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갈망에 대한 형상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수난과 죽음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다 마시겠다는 당신의 원의를 이 한 마디로 표현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신의 간곡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배반만을 되풀이하고 있는 불신앙의 우리들에 대한 간절한 애닳음에 대한 표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회개와 하느님에게로의 회두를 간절히 원하시는 당신의 애타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셨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7.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19,30)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되셔서 수행하셔야 할 일을 다 이루셨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죽음으로써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은 임무를 순명으로 끝까지 완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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