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711]공관복음이란 무엇?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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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시몬 | 작성일2002-09-26 | 조회수4,599 | 추천수0 | 신고 |
(질문)
성서를 구약,신약 4복음 등등.....나누고 있는데 그중에서 공관복음은 어떤 복음말씀을 말하시는지요. 그리고 또 왜 공관복음서라고 하는지요. 매우 궁금합니다
(답변)
신약성서의 4 복음서 중에서 요한복음을 제외한 다른 3개의 복음, 마태오, 마르코, 루가 복음을 공관복음서라고 합니다.
님께서 질문하신 내용과 관련하여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서의 차이에 대한 다음의 해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요한복음과 공과복음서를 비교할 경우, 가장 놀랄만한 사실은 요한 은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매우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비록 간접적으 로나마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들을 생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령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세례 요한에 의한 수세, 시험받 음, 변모, 최후의 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에 대한 말, 게쎄마니 동산 에서의 고통 등이 생략되어 있다.
만일 요한이 마르코나 루가를 알고 있었다는 가정이 옳다면, 또한 그가 단순히 복음서들이 기초하고 있는 전승들만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그는 이 모든 사건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충분하다. 요한복음 1장 32-34절은그가 그것을 쓰고 있을 때 세례에 대해서 생각 하고 있었음을 암시해주며 12장 27-30절과 18장 11절은 게세마니의 고통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그리고 1장 13절에는 동정녀 탄생에 대한 암시가 있는 것 같다. 요한이 그러한 사건들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대강 처리해 버렸으리 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사실 그는 그것들을 단순한 ’사건’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공관복음서에 나와 있는 설화들은 대개가 쉽게 그 맥락에서 분리시킬 수 있다.
이것은 복음서들을 형성하고 있는 전승재료가 전해진 방식 때문에 그 럴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공관복음 서에서는 아주 중요한 사건들까지도 쉽게 부수적인 것으로 될 수 있었으며 그것이 있는 적합한 자리에서 분리시키면 오해될 위험조 차 있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러한 사건들이 지니는 역사적 개별성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들을 그의 복음서의 신학적인 틀 안에 세움으로 써 그 의미를 안전하게 보존했던 것이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마태오와 루가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하지만 예수의 유일성을 선언하고,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며 모든 일에 있어서 아버지의 뜻에 따르고 순종한다는 사실 과, 따라서 그가 이 세상에 온 것은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됨 을 알린다는 믿음을 선언하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러한 주제 모두 가 제4복음서의 중심주제라는 점에 대해서는 증거를 제시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아마도 요한 복음의 모든 장들은 그러한 주제들을 위해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요한은 유년설화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을 그의 복음서에 편입시킨다. 그러나 마태오와 루가에는 신학적 의미이외의 것도 담겨 있다. 즉 그것은 유년 설화의 불확실한 역사성이다. 그리고 (요한이 역사적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그 이전의 전승들을 대했을 리가 없으므로 보다 중요한 것은) 불행하게도 마태오와 루가에는 믿을만 하지 못한 이방 신화의 흔적이 보인다. 후에 저스틴과 다른 변증론자들은 그리스도교적 이야기의 신빙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이방 신화를 도입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보다 훨씬 더 성서적인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작업에 임했던 요한은 그것들에서 자신과의 동질성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예수의 탄생에 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전하지 않는 마르코는 그 의 복음서 첫머리에서 예수의 수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마르코는 예수의 인격과 활동을 정의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했던 것 이다. 즉 예수는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들이고 성령이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이다. 요한은 1장 32-34절에서 이 이야기를 분명히 암시하 고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세례받았다는 말은 생략한다. 이에 대 해서 세례자를 그리스도와 비교해서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사람 들과의 논쟁에 요한이 가담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수긍이 가는 면 이 있기는 해도 적절한 설명은 아니다.
사실 마르코의 설화는 그것 자체대로 심오한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만족할 만하지 않다. 그것은 양자론적 관점에서 해석되기가 쉽다. 즉 예수는 보통 사람들 과 똑같이 태어났다가 세례 때 신적인 능력이 그에게 내려와서 그를 그리스도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요한은 예수의 세례나 탄생은 둘 다 복음서의 시작으로서는 너무 늦은 시점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로고스의 선재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모든 양자론적 주장들을 배제했을 것이다. 나아가서 마르코의 세례 이야기에 나오는 성령의 강림에 대 해서는 영감의 불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반면 요한은 관찰할 수도 없고 기술할 수도 없는 사실인 예수 위에 성령이 머물렀다는 말을 첨가할 필요성을 느꼈다(1,32). 여기서도 역시 요한은 신학적인 사실 을 보다 충실하게 다루기 위해서 설화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마르코와 마태오, 또 루가에서는 수세 다음에 시험이 나온다. 여기 서는 메시아가 사탄과의 결정적인 대립 가운데, 그리고 그에 대한 승리 가운데 나타나는데 이것은 후에 공관복음서 뒷부분에서 예수 가 귀신축출을 행할 때 사탄의 부하들과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예수와 이 세상의 왕과의 싸움이 요한의 두드러진 주제이기 는 하지만(12,31; 14,30; 16,11) 시험과 귀신축출은 요한 복음에 나오 지 않는다. 이점에 있어서도 요한의 의도는 뚜렷하다.
시험설화는 신화적인 형식으로 진리를 전하고 있지만 한편 잘못 오도될 요소를 가지고 잇기도 하다. 예수와 사탄 사이의 싸움은 40일 동안만으로 한정되지는 않는다. 그 싸움의 절정은 사막에서의 금식 기간이 아니라 십자가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예비할 때 ’지금은 이 세상이 심판받을 때이며 지금이야말로 이 세상의 통치자가 쫒겨날 때’라고 말한다.(12,31).
공관 복음서 전승에서 다루고 있는 귀신축출도 역시 매우 중요한 의미 를 지닌다(마르 3,22-27; 마태 12,24-30; 루가 11,15-23; 이외에 다른 곳에도 나온다). 그러나 귀신축출 이야기는 고대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귀신 축출자로서의 예수는 아마도 평범한 마술 예수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때문에 요한은 새로운 설화를 만들어내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하느님의 아들과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을 보다 명백하게 드러내는 데 관심을 가졌으므로 귀신축출 이야기는 빠지게 되었다.
변모사화도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으며, 게세마니에서의 고통은 12,27-30과 18,11에 단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따름이다. 바로 여기 서 요한이 어떻게 마르코의 사건들을 그의 복음서의 중심주제 안으 로 발전시켰는지를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복음서 전체 를 통해서 예수의 영광과 아버지의 뜻에 대한 그의 복종이라는 한 쌍의 주제가 계속 나오고 있는데 예수의 영광은 거룩한 산에서 단 지 한 번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에게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참조 1,14:"우리가 그의 영광 을 보았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뜻에 대한 예수의 복종은 그가 굴 욕을 당하고 수난받는 (참조: 4,34) 가운데서도 중단되지 않는다. 예 수는 영광받은 자이면서도 동시에 굴욕당한 자라는 것이 예수의 인 격에 대한 요한복음의 정의이다.
결국 요한은 공관복음서 설화들의 의미를 알아내고 다음에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요한과 공관복음서 들 사이에 있는 차이가 결코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 다. 요한은 복음서에 외래적 재료들을 유입시키기 보다는 이미 보다 초기의 전승에서 적절치 못하게 표현되어 있던 것의 의미를 드러내 고자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복음서의 역사성에 대한 물음을 위해서 이러 한 일련의 과정을 이해해야 하고 또 주목해야 한다. 나자렛 예수라 는 한 인물이 팔레스티나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은 요한에게 지 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의 생애 동안 일어난 두드러진 사건 들의 정확한 윤곽을 제시하는 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다. 역사를 과학적, 비판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고대 세계에 일반적인 기술이 아 니었다. 그리고 확실히 요한의 일차적인 관심이 거기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부분적으로 설화의 양식과 문체를 사용해서 그가 하느 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던 사람의 삶과 죽음이 지니는 참된 의미를 찾아내고자 했다. 우리가 제4복음서를 연구해야 하는 것은 정확한 역사적 자료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해석을 알기 위 해서이다.
지금가지의 관찰들로부터 요한이 제시하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피 상적으로는 공관복음서의 그것과 다르지만 보다 깊은 차원에서는 놀랄 만큼 유사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서 요한과 다른 복음서들 사이의 차이점은 다음의 두 가지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1)요한 은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명백히 보여준다. 그는 로고스라는 말 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전혀 새로운 용어들을 받아들 이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묵시문학적 사고유형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 칭호는 존재론적인 관계를 함축하게 되었다. 이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10,30) 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비록 이러한 진술과 나란히 "내 아버지께서는 나보다 크시다"(14,28)라는 진술이 나와 있다 하 더라도 예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관복음서에서는 예 수에 대해 신적인 용어로 정의하지 안고 그의 활동, 그리고 하느님 나라와 그와의 관계에 대한 말로 예수를 정의한다.(예; 마태 12,28; 루가 11,20)
예수에 대한 요한의 사유는 기능적인 관점에서부터 존재론적인 관점으로 옮겨간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가 행한 일들에 의해 인식 된다는 말이나 반대로 그의 행동은 그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다는 말이나 모두 타당하다. 요한은 예수의 인간됨이라는 사실을 보 편화시킨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는 한 인간으로 나타난다. 즉 그의 인간적인 감정이라든가 가난하고 병든 자들에 대한 동정, 권세있는 자들의 완악한 마음에 대한 그의 분노- 이러한 것들이 계속된다. 요 한도 공관복음서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가현론적 그리스도론에 대해 서는 격렬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요한의 그리스도론에서는 개별적인 인간 존재로서의 예수보다는 로고스에, 또한 인간성을-무지함과 배 고픔, 지침에서 그 참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인간성- 떠맡은 하느 님의 아들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요한복음의 이야기들은 아마도 인 간적인 매력은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 신학적인 명 료성과 힘을 가지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끝-
[요한복음 I, 국제성서주석, 국제 신학 연구소, pp86-9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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