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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께서는...[Re : 764]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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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호경 쪽지 캡슐 작성일2003-01-01 조회수2,378 추천수0 신고

+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셨도다 !!!

 

 

   신부님과의 상담을 권고드립니다.  이러한 신앙상담은 신부님들의 당연한 직분입니다.

 

   그러나 우선은 님의 글에 대한 나눔을 가졌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님의 글 속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답이 아니라 나눔입니다.  평신도일 뿐이며, 신앙상담에 대한 자격증도 없는 제가 감히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제 글은 답이 아니라 단지 저 역시 자신의 신앙의 부족함에 안타까워하는 님과 똑같은 입장에서의 나눔임을 다시 상기시켜 드립니다.

 

 

 

님의 글; <저는 무신론자적 사고가 잦슴니다.  삼풍이나 고베 대지진 북한 핵 문제등을

          보며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여겨짐니다.>

 

   ◎ 신이 없다는 無神論이나 신이 죽었다고 하는 死神論에 대해서 종교학자들은 이런 요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이나 사신론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펼치는 그 기저에는 결국 신의 존재에 대한 기본 인식이 깔려 있다.  그들의 마음 속에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아예 언급할 필요조차 없는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한 그러한 주장 자체가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들은 그들의 삶의 여정 중에서 겪은 신에 대한 체험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기 때문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성이나, 산다는 것이 결국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면서 느끼는 자기 모순성 때문에 결국은 이를 뛰어넘는 어떤 절대성이나 초월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고, 이를 우리는 "종교적 경향" 혹은 "신적 경향"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은 그러한 절대성이나 초월성에 대하여 두려움과 한편으로는 따르려고 하는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그 경외심은 인간을 결국 종교 지향성의 존재로 규정짓게 합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 자체는 바로 그 무엇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로 신의 존재이며,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이십니다.

 

   혹시 님의 삶의 여정 중에서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겪어 보지 않으셨는지요?  혹시 체험하셨다면 그 체험을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본질적인 신앙관 안에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시간과 조건에 따라서 변하고 마는 인간적인 잣대를 기준으로 바라보지는 않으셨는지요?   혹시 체험하지 않으셨다면 그 이유가 님께서 "하느님은 이러저러 하신 분이다"라고 자의로 정해놓은 범주 내에 하느님을 가두어두고, 그 범주에만 해당하는 하느님의 체험을 말하려고 하지는 않았는지요?

 

 

 

님의 글; <예수님은 잘 믿으면서 하느님은 자주 말문이 막힘니다.>

 

   ◎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 개념이 인간의 사고와 철학적 관념에서 유래된 것이라면,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한 교의는 바로 인간의 일상의 삶과 구원경륜사적 체험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서의 계시를 통해 명백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지와 구원역사(役事)를 보고, 그 구원역사의 역사적 성찰을 통해 나온 결론이 하느님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느님(성부)의 구원역사, 예수님(성자)께서 오셔서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드러내신 구원 행위, 승천하신 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보내주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게 한 빠라끌레토스(성령)의 교회 내에서의 역할을 보면, 이 세 위격은 언뜻 다른 시대에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같이 보이지만 결국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의 본질을 지니신 한분이심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실로 이 기가 막힌 일치의 신비가 곧 "삼위일체 하느님" 교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음은 곧 하느님을 믿음이요, 또한 성령과 함께 함을 뜻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은 본질에 있어서는 결국 같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 없이는 존재 자체가 성립되지 않은, 사랑의 본질을 지니신 위격체로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님의 글에서는 -물론 님께서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하느님의 계시 곧 성서에서 이미 드러나고 명백하게 증명된 이 일치의 신비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 교의는 관념적 교의가 아니라 인간의 삶과 역사적 체험에서 우러난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교의입니다.  머리에서 추상적으로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고 인식하게 된 하느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따로 하느님 따로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체험했고, 그래서 고백하고 믿는 교의입니다.

 

 

 

님의 글; <안식일 논쟁>

 

   ◎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작게는 일상의 분주함으로 인한 피곤함으로부터의 쉼을, 크게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궁극적으로는 인류 구원을 위한 당신의 사랑의 표현을 위한 것입니다.  본래의 목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고 하느님의 의(義)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은 하느님에게 감사하고, 찬미 찬양하는 날입니다.  단순한 게으름의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계약과 율법은 바로 자기네 민족과 하느님을 이어주는 끈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율법 지상주의가 유다사회를 휩쓸면서 여러 규정들이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이 규정이 너무나 많고 복잡하여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조차도 미처 다 외우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유다사회의 기득권자들이었던 그들은 자신들은 빠져나갈 구멍은 마련해 놓고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 규정을 지키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규정들을 다 지키기는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였습니다.  결국 모든 백성들을 죄인으로 만든 결과가 되었습니다.  신앙이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져들어 안식일의 근본 정신은 사라지고 오로지 규정만이 남는 안식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안식일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안식일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랑의 정신으로 제정된 안식일의 근본 정신은 잊어버리고 규정에만 목매는 것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나무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말씀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원래의 의도와 인간 구원의지와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상기시키고 회복시킨 말씀이었습니다.  결코 안식일을 부정하여 하느님을 몰아내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율법을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축약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느님 율법의 근본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고, 현세적 의미에 한정되었던 구약율법의 규정 하나 하나를 영적인 의미로까지 보다 넓게 확대시키신 것입니다.  바로 근본 정신이 훼손된 구약의 율법에 대한 새로운 계약이었고, 새로운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새로운 계약과 새로운 율법은 온전히 새롭다기보다는 하느님과 맺었던 원래의 계약과 원래의 율법정신으로의 복귀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한점 한획도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님의 글; <십자가 상에서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수님은 구약을

          패러디하며 신을  몰아내고 있다는 생각이 듬니다.>  

 

   ◎ 여기 <성서 묻고 답하기>의 # 594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이 말씀은 단순히 문자 그대로 볼 수 없는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님의 글; <그분은 자신의 아버지가 하느님이라는 말에서 신을 몰아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아들"과 "아버지"란 낱말의 의미는 국어사전적, 혹은 생물학적인 혈연관계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 낱말들은 현세적 의미를 뛰어넘는,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와 그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매우 깊은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곧, 이 말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성를 가장 잘 드러내기 위한 신학적 용어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다"라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 믿음이야말로 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표이고, 사도들의 선교의 중심이었으며, 바로 우리 신앙의 근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은 메시아이시다"라는 말보다도 더 구세주로서의 그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말이며,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말입니다.  이 개념은 베드로의 설교,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기도, 바울로의 편지에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시고, 자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은 당신께서 메시아이시고, 종말의 때에 인자로서 재림하실 분이심과 동시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알리시는 말이었습니다.  한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말씀으로 계셨던 당신의 신원에 대한 확실한 자기선포인 것입니다.  결코 하느님을 몰아내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님의 글: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대답해 주세요>

 

   ◎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찌 한계성 속에서 헤매이고 있는 무지한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그저 자신의 좁은 시야 속에서 느꼈던 하느님일 수밖에 없겠지요.  하느님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인식 범위 내에 갇혀계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완전한 그분의 자유의지대로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선악의 기준에, 인간의 정의의 기준에, 인간의 미의 기준에 맞추어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정체를 나타내는 존칭들은 참으로 많습니다.  유일하신 분, 창조주, 전능하신 분, 절대자, 초월자, 생명의 주인, 역사의 주인, 우주의 주재자, 만군의 주님, 지존하신 하느님, 영원하신 하느님 ..........등등.  이 처럼 수없이 많은 하느님에 대한 존칭들, 그러나 솔직해 말씀드려서 이러한 존칭들은 어딘가 허전함을 줍니다.  이러한 존칭들을 통해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느님이심을 직접적으로 실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어마어마한 존칭들은 우리들의 삶의 일상과는 유리된 느낌을 주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인간의 언어로는 그분을 정확히 표현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습니다.  하느님은 삶의 전체로서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참으로 많은 상대되는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쁨이 있는가 하면 분노가 있고, 즐거움이 있는가 하면 슬픔도 있습니다.  행복이 있는가 하면 불행이 있고, 편안함이 있는가 하면 고통이 있습니다.  선이 있는가 하면 악이 있고, 착실함이 있는가 하면 불량함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완전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렇듯 원죄 이후의 인간의 삶은 좋은 면과 고통스러운 면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완전한 삶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상대적 요소들을, 그것이 비록 고통으로 얼룩져 있는 삶일지라도 그 모두를 아우르고 있는 완전한 형태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하느님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분의 전능함으로 왜 삶의 바람직하지 못한 요소들을 없애실 수 없겠습니까?  그분은 말씀으만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까짓 인간의 삶의 모든 불행한 요소들이나 고통이야 얼마든지 순식간에 없애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침묵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횡행하고 있는 온갖 악과 불의와 불행과 고통에 대해서 짐짓 모른척 하고 계십니다.  왜 이겠습니까?  그분이 존재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그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불행과 고통을 미처 알고있지 못해서일까요?

 

   하느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갖고 있는 불행과 고통까지도 거부하지 않고 현세에서의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래서 온갖 상대되는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진 완전한 형태의 삶을 살아 가면서, 더 나아가서는 우리 삶 속의 온갖 불행과 고통까지도 인간 스스로가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방법으로, 인간 스스로가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아닐까요?  온실 속의 화초처럼 하느님의 손에 의해 길러진 수동적이고 나약한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저 광야의 폭풍우 속의 나무처럼 온갖 역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서서 자신들의 자유의지로 하느님 당신을 사랑해 주는 그런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인간이 되기를 원하시고 도와주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아닐까요?  당신께서 마련해 주신 시간과 공간의 틀 안에서 세상의 악과 싸우면서 스스로 모든 고통을 극복하면서, 마침내는 처음의 창조질서를 회복해 나가는 강한 인간이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당신의 생명에 동참하는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아닐까요?

 

 

님의 글’ <제 보물 신앙이 망가지고 있담니다>

 

   ◎ 어느 누구도 자신의 보물이 망가지거나 없어지는 것을 그냥 안타깝게 보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꼭 지녀야 할 가치가 있는 보물이라면 적극적인 행동의 실천으로 이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우리도 행동으로 지켜나갑시다.  발만 동동 구르면서 쳐다만 보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니라 현세의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가도록 행동으로 실천하며 살아 갑시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셨던 제 십자가를 제가 지고 가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가 비록 먼 미래의 종말에 있기는 하지만, 언제 다가올 지 모르는 종말을 고대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현세의 지금 삶의 현장에서 그 종말의 예행연습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노력을 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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