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862] 궁금한 문제 답변 | 카테고리 | 성경 | ||
---|---|---|---|---|
이전글 | 몇가지 궁금한 것들.^^ | |||
다음글 | Re:교회법에서의 근친의 범위 | |||
작성자한시몬 | 작성일2003-06-24 | 조회수1,942 | 추천수1 | 신고 |
주님의 평화!
김 소라님, 안녕하세요. 몇가지 궁금하신 것들을 질의하셨는데 저가 도움이 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모스 예언자에 대해서...
아모스 예언자는 다윗-솔로몬 왕국이 분열된 이후의 민족사에서 남쪽 유대 왕국 출신의 일개 소목장주였습니다.(기원전 8세기 경). 그런데 그가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예언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가 예언 활동을 벌인 곳은 당시 시리아-팔레스틴 일대의 최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북왕국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성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왕의 성지인 베델에서 하느님의 신탁을 선포합니다. 고성장 시대를 맞고 있는 여로보암 2세의 정부를 향해, 발전 일로에 있는 이스라엘의 정치권을 향해 아모스는 대중의 꿈을 배신한 정치를 고발합니다. 정의를 팔아먹은 대신 얻은 발전을 저주합니다. 그런 점에서 유신 체제의 성장주의 정책을 비판하던 몇몇 민중 신학자들이 아모스 예언자의 텍스트를 특별히 주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 던 것입니다.
아모스서는 어떤 성서인가?
이 책은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적은 성서라 그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아모스라 불렸어요. 아모스서는 유다 문학 사상 가장 먼저 쓰여진 예언서로 중요하지요. 비록 분량이 적어 후기 예언서에 속하는 12개의 소예언서에 속하지만, 다른 예언서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컸답니다.
누가 썼는지?
예언자 아모스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성서의 주된 내용이지요. 아모스란 이름의 뜻은 ’주님을 짊어진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남 유다 사람으로 "목자요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아모 7,14)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가난하고 무식한 농부는 아니고 상당한 자기 재산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주변의 국제정세나 유다와 이스라엘의 국내 사정에 밝은 걸 보면, 그는 꽤 많이 배운 사람이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아모스는 본래 예언자 가문에 속하지도, 왕실 예언자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북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와 베델에 가서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전한 뒤, 그는 남 유다로 추방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구약의 위경들이 전하는 전설에는 아모스가 베델의 사제 아마니야의 아들에게 살해되었다, 또는 남 유다의 왕 우찌야에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아모스는 하느님의 현존과 정의를 크게 강조하였기에 ‘정의의 예언자’란 별명을 얻기도 했지요.
언제 쓰여졌는지?
예언자 아모스가 활동한 때는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기원전 786-746) 시절로서 대략 기원전 760년경으로 추정됩니다. 아모스의 예언활동이 그친 얼마 뒤에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아모스가 선포한 신탁들을 모우고, 또 자신이 직접 밝힌 자서전적인 내용(7,1-9; 8,1-3; 9,1-4)을 덧붙여 아모스서의 골격이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남 유다에서도 계속 살아 움직여서 유다에 관한 내용이 뒷부분에 덧붙여졌지요. 아마 최종적인 아모스서의 형태는 다른 예언서들처럼 유배기나 그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추정합니다.
왜 쓰여졌는지?
아모스가 예언자로 등장한 때는 북 이스라엘의 전성기가 저물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세력이 위축된 탓에 기를 펴고 살면서 상업으로 부를 축적한 북 이스라엘의 부유층은 가난한 동족을 괴롭히는 불의를 자행하며, 자만과 향락 속에 빠져 안일하게 살고 있었지요.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선택받았으므로 그분의 보호를 받아 아무 일도 당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의 환상을 지니고, 자기식의 예배행위에만 열중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태평스레 있는 백성들에게 아모스는 무서울 정도로 엄하고 가혹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이 심판은 그들의 잘못에 대한 처벌을 넘어, 하느님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실제로 계시며 그분은 정의를 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일깨워 주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 중심적인 생활에서 하느님 중심적인 생활로 되돌아갈 것을 강하게 일러준 것이죠.
<새김과 나눔>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될 때, 우리는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며 현실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아모스의 예언은 불과 몇십 년이 지나지 않아 실현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떻게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살고 싶으냐? 야훼를 찾아라
(아모 1-9장)
아모스서는 9장인데, 내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나 야훼가 선고한다(아모 1,1-2,16)
하느님께서 심판을 선고하신 나라는 모두 몇 나라입니까?(2,21-24)
하느님께서 외치시면 가르멜 산마루의 푸른 초원이 말라버릴 정도로, 말씀의 힘은 살아 있고 대단합니다. 이제 그 하느님께서 다마스커스, 불레셋 등 여러 민족의 죄상을 드러내며 그들에게 멸망을 선고합니다. 그들의 죄는 다른 민족 사람들을 마구 다루고 죽인 잘못입니다. 그 누구라도 형제를 괴롭히고 생명을 짓밝는 자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욕보이는 짓입니다.
유다와 이스라엘 역시 죄없는 사람을 괴롭히고 우상을 섬겨 하느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더럽힌 잘못을 범했다고 고발되죠. 그들은 자신들의 전존재를 하느님께 맡겨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과 규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심판을 받게 된 것이에요.
네 하느님과 만날 채비를 하여라(아모 3,1-6,12)
아모스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두 가지 송가를 크게 읽어 보십시오(4,13; 5,9-8)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아모스의 외침이 터져 나옵니다. 아모스는 자신이 원하거나 자의 적인 판단에 따라 예언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붙잡혀 순종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의 왕실과 부유한 세도가와 그들의 귀부인들이 저지르는 불의를 규탄하며 멸망을 선고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다른 형제들을 자기 욕망 충족의 대상으로 삼아 무시하고 괴롭히며, 오직 자기 중심적으로 허영심과 자만심에 빠져 살아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들도 성소에서 하느님께 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봉헌하며 감사예물을 끊임없이 바치지만, 아모스는 이것 역시 살아 계신 하느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과 순종함이 없는 자기 기만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기에 결국 하느님과 떨어져 죽음의 길을 가는 그들에게,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돌아와 살 길을 찾으라고 부르짖습니다.
다시는 뿌리뽑히지 않으리라(아모 7,1-9,15)
아모스가 본 다섯 가지 환시의 내용과 뜻은 무엇입니까?(7,1-9; 8,1-3; 9,1-4))
아모스가 본 환시들은 심판의 말씀을 한층 더 생생하게보완해 줍니다. 그러나 베델의 사제 아마지야는 그를 추방하여 그 말씀을 무시하려고 하죠. 하지만 먹을 양식은 넘쳐도 참된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리는 처지는 외적인 불행보다 더 심한 내적인 고통이요 심판입니다.
결국 아모스가 선포하는 요점은 하느님을 무슨 안전장치 쯤으로 여기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참되고 결정적인 힘이신 하느님의 실재를 깨우쳐주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가(회개하여) 하느님만을 유일한 주님으로 섬기고 그분에게서 비롯되는 형제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삶을 살 때, 그분께서 약속하신 구원이 오리라는 선포랍니다. 누구든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습니다.
성령칠은(聖靈七恩)이란...
성령칠은(聖靈七恩)이란 우리 가톨릭 신자가 성령으로부터 받는 일곱 가지 은사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사회에서 일어날 반 그리스도적 사조에 대항하기 위해 필요한 무기가 됩니다. 즉, 세상의 모든 부정부패, 부도덕, 불의 등과 싸워 최후의 승리를 얻고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슬기, 통달, 의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워함이 그것입니다.
1) 슬기 :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의향대로 모든 사물을 판단할 수 있게 하고 구원에 필요한 일에 이끌리어 맛들이게 하는 은사이다.
2) 통달 : 이것은 하느님이 계시하신 것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3) 의견 : 이것은 우리가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 주는, 선악을 분별케 해 주는 은사이다.
4) 굳셈 : 이것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쁜 마음으로 올바른 것을 수행하도록 용기를 주는 은사이다.
5) 지식 : 이것은 영생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사이다.
6) 효경 :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과 연관된 사람들이나 사물을 존중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은사이다.
7) 두려워함 : 이것은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그분과 갈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는 은사이다.
이상의 성령칠은(聖靈七恩)중 슬기, 통달, 의견, 지식은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해주는 은사이고 굳셈, 효경, 두려워함은 우리의 사랑을 길러주는 은사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깨닫고 우리에게 필요한 선물들을 증대시켜 주시도록 청하면 청할수록 성령께서는 우리를 일상 생활 안에서 그만큼 더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은혜에 대해서 고린토 전서 12장과 14장에서 자세히 말씀하시는데, 특히 사랑에 관해서 강조하십니다. 성령의 은혜 중 방언, 구마, 예언, 치유 같은 성령의 특별한 은혜는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는 데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일상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것이다.라는 말대로 성령은 무엇보다도 극히 일상적인 일, 즉 그리스도교적 사랑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갈라 5,22 참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성령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사도들에게 내렸던 특은과는 형태를 달리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것이 그때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특별한 사목 능력, 밝은 지혜, 현명한 지도력, 뛰어난 예술성, 탁월한 일생 등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은총’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 말은 성령의 활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