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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사도신경 않에는 12가지 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던데 어떤기도문인지 궁금하네염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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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승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2-04 조회수850 추천수0 신고

우선 입문적인 내용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를 인용합니다.

 

185 "나는 믿나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나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앙의 일치는 모든 이에게 규범이 되고 동일한 신앙 고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주는 신앙의 공통 언어를 요구하고 있다.

 

186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초창기부터 자신의 신앙을, 모든 사람을 위한 간결하고 규범적인 신앙 조문들을 통해서 표현하고 전달해 왔다. 또한 매우 일찍부터 교회는 신앙의 핵심을 유기적인 조문 형태로 결집 요약하고자 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세례를 원하는 예비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종합은 인간적인 생각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신앙의 유일하고 완전한 가르침을 위해서, 성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모은 것이다. 아주 작은 겨자씨가 그 안에 많은 가지를 간직하고 있듯이 이러한 신앙의 요약은 몇 마디의 말 속에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포함된 참된 신심의 모든 지식이 들어 있다.

 

187 이러한 신앙의 종합들은 "신앙 고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하는 신앙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를 "크레도"(Credo)라고도 부르는데, 이러한 종합적인 기도문들은 보통 "나는 믿나이다"(Credo)라는 말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신경"(Symbolum de fid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88 그리스어 "심볼론"(symbolon)은 깨뜨린 물건의 반쪽(말하자면 도장과 같은)을 의미하는데, 이는 신원의 증표로 제시되던 것이었다. 제시된 물건을 나머지 반쪽과 맞추어보아 그것을 가진 사람의 신원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경"은 신앙인들 간의 확인과 일치의 표시였다. 그리고 "심볼론"은 결집, 전서 또는 요약을 의미한다. "신경"은 신앙의 중요한 진리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경"은 교리교육을 위한 초보적이고 근본적인 기준이 된다.

 

189 첫 "신앙 고백"은 세례 때에 이루어진다. "신경"은 무엇보다도 세례를 위한 신경이다.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참조) 베풀어지므로, 세례 때 고백하는 신앙의 진리들은 성삼의 세 위격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190 그러므로 신경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하느님의 제1위격이신 성부와 그분의 놀라운 창조 업적에 대해서, 다음에는 하느님의 제2위격이신 성자와 인간 구원의 신비에 대해서, 끝으로 우리들 성화의 원천이며 원리이신 하느님의 제3위격 성령에 대해 고백한다." 이것이 "우리들 세례 인호의 세 가지 주제이다."

 

191 "이 세 부분은 서로 결합되어 있지만 또 서로 구분이 된다. 교부들이 종종 사용하던 비유를 따라 우리는 이 구분을 절이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 몸에 사지를 구별하고 구분해주는 관절이 있듯이, 이 신앙 고백 안에서 우리가 특별히 구분해서 믿어야 할 진리들에 대해서 '절'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타당하고 옳은 일이었다." 성 암브로시오가 이미 확인한 오랜 전통에 따르면, 사도들의 수로써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신앙 전체를 상징하기 위해서 신경을 열두 절로 구분하는 관습이 있었다.

 

192 시대가 흐르면서 다양한 시대적 필요에 따라 많은 신앙의 고백 또는 신경들이 있었다. 여러 사도 교회와 옛 교회의 신경들과 아타나시오 신경이라고도 불리는 "퀴쿰퀘(Quicumque) 신경", 그리고 몇몇 공의회의 신앙 고백(톨레도; 라테라노; 리옹; 트리엔트)이나 "다마소 신앙 고백"(fides Damasi), 교황 바오로 6세의 "하느님 백성의 신앙 고백"과 같은 교황들의 신앙 고백들이 그러한 것이다.

 

193 교회 역사상 다양한 시기에 생겨난 신경들 가운데 어느 것도 지나가버린 시대의 것이거나 쓸모 없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안된다. 이 신경들은 영원한 신앙에 대한 요약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영원한 신앙에 다다르고 깊어지도록 오늘날에도 돕고 있다. 이 모든 신경들 중에서 두 가지가 교회의 삶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4 사도 신경은 사도들 신앙의 충실한 요약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져 이렇게 불린다. 사도 신경은 로마 교회의 세례를 위한 옛 신경이다. 이 신경의 막중한 권위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부터 나온다. "이 신경은 사도들 중의 으뜸인 베드로가 주교좌에 앉았으며 그 곳에서 공적인 결정을 내렸던 로마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신경이다."

 

195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고 불리는 신경은 초기의 두 세계 공의회(325,381년)에서 나온 신경이라는 의미에서 큰 권위를 가진다. 이 신경은 오늘날에도 동방과 서방의 양대 교회에 공히 간직되고 있다.

 

197 신앙을 가지고 신경을 외우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며, 우리에게 신앙을 전해주고 그 품안에서 우리가 믿는, 교회 전체와 일치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입문 내용을 근거로

사도 신경의 열 두 절의 해설은

이미 질문과 답변이 되었던 2020번을 재인용합니다.

 

[사도신경 살펴보기]


1.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느님인 것이다.
일부 철학자들이 말하는 관념적인 신이 아닌 것이다.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의 하느님이신 것이다. 인간의 창조는 일반 생명체의 창조
와는 달리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영적인 존재였다. 그렇기에 하느님
께서는 우리 인간의 존재에 대한 근원이 되시며, 생명의 주인이 되신다.
그러므로 우리를 양육하시며 보호하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육신의 아버지는 그 자녀를 사랑하는 데 한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근본
적으로 연약하고 자기 중심적인 한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그렇기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의
찬미와 흠숭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 되신다.


2. “그 외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아들이라는 말은 유일성과 독특성을 나타내는 말이며 출생이나 기원
을 의미하기보다는 관계를 더 잘 나타내는 용어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뿐만 아니라 아들을 시켜 이보다 더 큰 일도 보여 주실 것이
다. 그것을 보면 너희는 놀랄 것이다."(요한 5,20) 라고 말씀하셨고,
하느님께서도 예수님을 가리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성서에서와 같이 외아들이라는 말은 곧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곧 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사랑하는 관계임
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것과
같이 예수님은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동등한 본질을 가지신 분이심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어 "사제이고 예언자이며 왕"으로 세우신 분
이다. 하느님 백성 전체가 이러한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에 참여하며,
거기에서 나오는 사명과 봉사의 책임을 지고 있다.
주님은 곧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우리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초대 교회 신자들의 신앙 고백인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시
며 참 인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움직여주시고 성부께서 이끌
어주시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
심”(마태오 16,16)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3.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인간적으로 성적(性的)인 관계
를 통해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오로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표현인 것
이다. 이는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피조물이 되신 신비의 사건인 것이
다. 동정녀인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이 탄생하게되는 이 신비는 생물학적
인 자연법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신비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참 인간이시고 참 하느님이심을 말해 준다. 곧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인간이시기 때문에 죄 많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실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
마리아를 통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셔야
만 했다.


4.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예수님은 아무 죄 없이 본시오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십자가는 유다인들에게는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사형방법이었다. 십자가 형벌은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로마 시민
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 처형을 할 수 없었다. 다만 노예나 반역자나
살인 강도 등 흉악범들에게만 십자가형에 처할 수 있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무죄한 자에게 가장 중한 십자가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러면 죄 없으신 예수님이 그토록 잔인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왜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까지 버려 두셨는가? 이는 인간들이 받아
야 할 되 값을 예수가 대신 받으시도록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의로
우신 분이셨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철저히 벌하셔야 했다. 죄를 처벌하
지 않고 인간을 용서하신다면 하느님은 불의 한 분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게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무덤에 묻히셨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셨다는 사실은 예수
님의 죽음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 준다. 또한 저승에 가심은 구약시대
에 죽은 성조(聖祖)들에게까지 하느님의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뜻하며,
구약에 수 없이 예언된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부활, 메시아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을 증명됨을 뜻한다.


5.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예수님께서는 돌아 가신지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
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역사적인 사건이었
다. 이 부활 사건은 예수님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하셨으며,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을 증거 해 준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나자로의 부활과는 차원이 다른 부활이다. 나자로의
부활은 다시 죽을 몸으로 부활하였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다시는 죽지
않는 영생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도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들도 부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게 된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은 죽은 후에도
반드시 부활이 있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가 있음을 말해준다.


6.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
시고 승천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인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도, 승천도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면 하늘에
오르셨다고 했는데 하늘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늘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늘(sky)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heaven)이다. sky는 공간적 의미에서 하늘을 가리키고, heaven은
차원적인 의미에서의 하늘을 가리킨다. heaven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며 활동하시는 보이지 않는 영역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셨다는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신성한 몸으로 부활하셨
음을 말해 준다. 예수님께서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는
역사의 주관자로써 살아 계심을 뜻한다.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 모든
신자들이 장차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증이 되는 것
이다.


7.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래서 죽기까지 죄인들을 섬겨 주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
지셨던 것이다. 그러나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오시는
그때에는 심판관으로 오신다. 그때에는 산 이와 죽은 이, 다시 말하면
그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나, 이전에 죽은 사람이나 모두 심판하러
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고 예수님 앞에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8. “성령을 믿으며”

성령께서는 당신의 은총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일으키는 데에서, 또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또한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을 믿는 것은 곧 성령께서 삼위 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성부와 성자와 본질이 같은 분이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 계획의 처음부터 끝까지 성부와 성자와 함께 일하신
다. 하느님의 영은 그 동안에 메시아의 때를 준비하고 계셨으며, 두 분
다 아직 완전히 계시되지는 않으셨지만, 그분들을 기다리고 나타나시면
영접하도록 약속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교회는 구약성서를 읽을 때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영이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자 하는 것을 찾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숨결은 모든 피조물
의 존재와 생명의 기원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서
이루실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께서는 은총으로
마리아를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마리아 안에서 성부의 자비로운 계획을
실현하신다. 마리아 안에서 동정녀의 아들이 되신 성부의 아들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성령께서는 마리아를 통해서 하느님의 호의적 사랑의
대상인 인간들을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죽음과 부활
로 영광스럽게 되기까지는 성령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의 이행이 될 것이기 때문
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영광을 받으실 때가 이르러서야 성령께서 오리라
는 것을 약속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들을 되새기게 해주실 것이며,
그리스도께 대해 증언해 주실 것이다. 성령강림날은 거룩한 삼위일체가
완전하게 계시된 날이다. 이날부터 그리스도께서 예고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그분을 믿는 사람들에게 열렸다.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궁전인 교회 안에서 성취된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게 하며, 그들이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신비를 그들 안에, 특히 성체
안에 탁월하게 현존하게 하신다. 이처럼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사명
과 성령의 사명에 무엇인가를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의 성사이
다. 교회의 성사들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하느님의 놀라
운 일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따르는 새로운 삶에서 열매를 맺는
다.


9.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란 세상과 구별된 보편적인 교회를 뜻한다.
교회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ekklesia)’의 번역으로 ‘불러모음’을 의미한
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백성의 집회를 가리킨
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당신의 백성을 교회로 불러모으신다.
그리스도교 용어로서 “교회”는 전례적인 집회를 가리키지만, 또한 어느
지역의 신자 공동체를 가리키거나 세계의 신자 공동체 전체를 가리키기
도 한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온 세상에서 모으시는 백성이다. 교회는
지역적인 공동체 안에 존재하며, 전례의 거행 특히 성체성사를 위한
전례적 모임으로 실현된다.
교회란 결국 그리스도의 말씀과 몸으로 살아, 스스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교회를 우리는 신경에서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한다.
서로 불가분의 관계인 이 네 속성들은 교회와 교회 사명의 본질적 특성
을 나타낸다. 교회가 보편된 이유는 교회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
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전 인류에게 파견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이 하느님 백성의 보편적 일치를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가톨릭 신자이든,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교파 신자이든, 또는 달리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되도록 불린 사람이든 간에, 모든 사람이 이
일치에 그 나름대로 속해 있거나 또는 관계를 맺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성인이라 함은, 세상에서 하느님을 열심히 공경하고, 남에게 좋은 표양
을 주어 거룩하게 산 분들이 죽은 다음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해 그가 확실
히 천국에 있다는 것이 판명된 다음 교회에서 성인이라고 특별히 선언한
분을 일컫는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인은 천당, 연옥, 은총
지위에 있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통공은 공(功)을 서로서로 통한다
는 말이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는 공이 많은 자가 공이 적은 자를 공
으로 도와 줄 수 있고, 힘이 모자라는 공이 적은 자는 힘있는 자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천국에 있는 영혼들은 불쌍한 세상 사람들
을 위해 하느님께 빌어주고, 연옥에서 보속하는 영혼들을 위해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한다. 이렇게 서로서로 도와주고 있는데 이것을 모든 성인
의 통공이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10. “죄의 사함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첫째 이유는, 우리에게 죄를 사하여 주시고자
함이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사하실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당신 사업을 세상 마칠 때까지 맡아보는
기관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 안에 죄를 사하여 주는 권리를 주시
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구속 사업은 헛된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
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
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20,23)하시면서 똑똑히 죄를
사해주는 권리를 주셨다. 우리는 교회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리로써
죄를 사해 주심을 믿는다.


11.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이 표현은 부활이 막연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상적인 의미의 사건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몸과 영혼을 가진 인간이 그 모습 그대로 부활한다
는 뜻이 분명히 드러나는 말이다. 보통 부활이라고 하면 영혼이 계속
살아남는 것을 생각하는데, 인간의 존재를 가늠하는 데 몸도 중요한
부분이다. 예수가 부활 후에도 살아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신 것을
보면, 우리의 몸이란 결코 허무하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모든 신자들의 부활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
다.


12.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영원한 삶이란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
니다.』(요한 17,3) 영원한 삶이란 참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다. 아는 것이라는 말은 인격적인 깊은 사귐을 통해서 인격적인 만남
으로 아는 것이다. 곧 사랑의 관계를 의미한다. 우리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다. 영원한 분이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하고, 친교를
나누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
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섰다.』
(요한 5,24) 라고 말씀하신다. 영원한 삶이란 무작정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삶을 의미한다. 영원한 삶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이 관계는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현재와 육신을 벗고 신성한 몸을 이루는 미래에도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결론]

사도신경은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는 신앙고백이다.
가끔씩 생활 중에 내 신앙에 대해 자신있게 표현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경우가 있게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아직까지 내 자신이 신앙 안에서
성숙하지 못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나의 신앙을
표현하는데 뭔지 모를 석연치 않은 생각으로 신앙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이유일 것이다. 사도신경을 한 구절, 한 구절 읽으면서 묵상하다보면
우리가 신앙을 갖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확연히 드러난다.
신앙인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며 살아나가야 하는 목적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참으로 좋은 신앙 고백문이다. 여기에는 살아 생전의 예수님
의 모습과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예수님의 영광과 장차 우리에게 다시
오실 그분의 모습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 있다. 우리는 초대 교회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을 기다렸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 그들이 지녔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절개를 깊이 묵상하며, 현재의 우리 삶을 되돌아 보며, 하느님께 보다 더
가까이 나아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계명을 실천하면서,
신앙인으로서의 긍지를 갖고 많은 성인들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히
간직했던 신앙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정요한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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