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사도신경 않에는 12가지 기도문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던데 어떤기도문인지 궁금하네염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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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승태 | 작성일2007-02-20 | 조회수655 | 추천수0 | 신고 |
서방교회(로마 가톨릭)와 동방교회가 함께 고백하고 있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차이가 나는 부분이 바로 "필리오케"입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서방교회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에 "필리오케"라는 말마디를 추가함으로써 낳음을 받지 않은 유일한 기원이라는 아버지의 개별적인 고유성을 침해할 수 있다는 염려를 하며 이를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즉 아들에게 삼위일체 내재적으로 오직 아버지에게만 해당되는 것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냐는 우려인 것입니다.
서방교회에서 5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스페인에서는 사변적인 사고 과정을 거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발할 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전달하였다는 견해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원천이 되는 것까지도 전달하였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의 원천으로 생각되는 바, 아버지는 본래부터 원천이 되고,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전달을 받아서 원천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filioque)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 차이로 동방교회가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라틴어 원문에는 "필리오케"가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구세경륜적 삼위일체, 즉 세상과 관련해서 밖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활동의 측면에서는 동방교회가 "Filioque"를 수용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 15,26에 따르면 성령은 아들로부터 유래되어서 세상에 보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이상은 손희송 신부님(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의신학 교수 신부님)의 신삼위일체론 강의록을 참조 인용한 내용입니다.
- 이하의 내용은 굿뉴스의 사전에서 검색한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실은 것입니다.
◆ 필리오케 ◆ 라틴어 Filioque [관련단어] 동방이교 ‘그리고 그 아들’이라는 뜻의 라틴어. 성령의 이중적 발출을 표현하는 교의적(敎義的) 문구. 원래의 니체아 신경(信經)에는 없었으나 니체아 · 콘스탄티노플 신경에 서방교회에 의해 삽입되어 “아버지와 그 아들로부터 나신 성령…”이라고 쓰이게 되었다. 제3회 톨레도(Toledo) 교회회의(589년)에서 처음 삽입되었으며 796년 프리울리(Friuli)의 시노드에서 아킬레이아의 파울리노(Paulinus of Aquileia)에 의해 그 삽입이 옹호되었으며 전(全) 프랑크 왕국의 미사에서 암송되기 시작한 800년경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847년 프랑크왕국의 수도자들에 의해 이것이 예루살렘의 올리브산 위에 있는 그들의 수도원에 소개되었을 때 성 사바스(St. Sabas)의 동방교회 수도자로부터 강한 반대를 받았다. 이 문제가 레오 3세에게 알려졌을 때 그는 교의적인 문제에서는 동의하였지만, 신경에 필리오케를 첨가하는 것은 막으려고 하였다. 그는 이 신경을 필리오케가 없는 원래의 형태대로 성 베드로의 묘지에 기탁된 2개의 은제 테이블에 새겨 넣도록 하였다. 그러나 필리오케는 미사에서 계속 불려졌고 1013년경에는 로마 교회에 의해 정식으로 신경에 첨가되었다. 이 문구를 신경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던 포시우스(Photius) 시대 이후로 필리오케는 정교회가 로마 교회를 공격하는 주요 근거가 되었다. 필리오케를 둘러싼 이들 양 교회 사이의 논쟁은 리용(1274년)과 피렌체(1439년)에서의 동서방 재결합 공의회 때 그리스 정교회측이 비록 신경에 필리오케를 첨가하는 것은 거절하지만 그 교의는 승인함으로써 중단된 듯 보였으나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다. 1874년과 1875년에 본에서, 1912년에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구 가톨릭과 영국 성공회 그리고 동방교회의 대표들은 이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긍정적 결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 동방이교 ◆ 동방교회 ◆ 한자 東方敎會 라틴어 ecclesia orientalis 1. 역사적 유래 : 동방(東方)교회, 서방(西方)교회라는 명칭은 고대 교회에서는 지리적 의미가 있었지만 오늘에는 오히려 역사적 유래에 의하여 호칭된다. 그리스도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당시의 로마제국(帝國)의 동부지역인 시리아, 소아시아, 그리스반도, 이집트 등지로 전파되었고, 로마제국의 국경을 넘어서 갈데아지방과 아르메니아 등지로 확산되었다. 기원후 400년경에는 제국의 동부지역에 약 1천만 명의 그리스도 교인들이 있었으니 이들을 동방교회라고 하였다. 한편 그리스도교는 1세기 중엽에 제국의 수도 로마에 전해졌고 거기서 제국의 서부 즉 서유럽에 전파되었으며, 400년경에는 약 500만 명의 신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서방교회라고 한다. 서방교회에서는 유일한 종교 · 문화 · 정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로마교회의 고리신학, 전례, 법제, 관습들이 서방교회 전체에 확산되어서 서방교회는 외형적으로도 상당히 통일된 단일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방에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소아시아의 에페소, 그리스의 아테네 등등 정치 · 문화 · 교역 · 학문의 중심지들이 여러 군데 있었으므로 동방에 전파된 그리스도교도 자연히 이러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몇 개의 서클이 형성되었으며, 특히 알렉산드리아와 안티오키아는 그 신자수와 신학적 권위로 쌍벽을 이루고 있었다. 박해가 끝나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 로마를 교황에게 맡기고 자기는 동방의 비잔틴(콘스탄티노플)으로 옮긴 뒤부터(330년) 비잔틴은 황제의 후광을 업고 영향력을 증대하여 끝내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 총주교좌가 공인되었다. 각 총주교좌는 그 주변의 교회들을 지휘하여 거의 자립적인 블록을 형성하였으므로 각 블록은 고유한 전례와 관습을 발전시켰으며, 다만 신앙교리의 완전한 일치만이 동서방 교회들을 하나의 그리스도교로 통일시켰던 것이다. 5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네스토리우스는 그리스도 안에 신격(神格)과 인격(人格)의 두 가지 위격(位格, persona)이 있다는 설을 주장하다가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단죄되고 추방되었다.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은 페르시아지방으로 피신하여 그곳에 자파의 교회를 세웠다. 그 뒤 네스토리우스파는 인도와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나 타멜란의 박해로 위축되었고, 16세기에 일부는 가톨릭으로 귀의하였고, 일부는 오늘에까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인도, 미국 등지에 10여만 명이 있다. 네스토리우스설에 반대하는 에우티케스는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완전히 그리스도의 신성에 흡수해 버리는 단성설(單性說, monophysitism)을 주장하여 칼체돈 공의회(451년)에서 단죄되었으나 이집트, 시리아 그리고 에티오피아와 아르메니아에서 단성설을 추종하는 이교가 생겨나, 그들을 큐트파, 야곱파라 불렀다. 그 뒤에 이슬람교가 이 지역을 휩쓸어서 그리스도교는 아주 소수가 되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로마 교회와 비잔틴 교회는 사소한 분쟁을 계속하면서도 신앙의 일치를 유지하였지만,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차이, 관습과 제도의 차이, 니체노-콘스탄티노플 신경의 해석 차이, 그리고 비잔틴 총주교들이 로마 교황과의 동등권을 주장하는 야심 등으로 인해서 양 교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9세기 포시우스 총주교 때엔 한 때(864~868년) 로마와 분리되었다가 다시 화해하였으나, 미카엘 체롤라리우스 총주교는 콘스탄티노플의 라틴계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하고, 라틴교회가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고, 사제의 독신제를 고집하고 신경에 필리오케를 삽입하였다고 맹렬히 공격하였다. 이에 대하여 성 레오 9세 교황은 특사를 보내어 담판을 하였으나 결렬되었고, 교황의 사절인 훔베르트 추기경은 체룰라리우스에게 파문을 선고하고, 체룰라리우스는 로마교황을(사실은 그 때 교황좌는 성 레오 9세의 사망으로 공석 중이었다) 파문함으로써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결정적으로 분열되었다(1054년). 그 뒤에 루마니아, 조지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의 정교회(正敎會)들이 속속 로마에서 이탈하였다. 한편으로 동로마제국은 점점 쇠약해져서 이슬람교도가 제국의 아시아지역과 북아프리카를 석권하여 성지를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므로 서방교회는 십자군을 일으켜 여러 번 동방에 원정하였고, 한때는 거기에 라틴제국(1204~1261년)과 라틴 전례총주교좌를 설치하였다. 서방교회의 도움이 필요했던 동로마 황제들의 노력으로 리용 공의회(1274~1284년)와 플로렌스 공의회(1439년)에서 양 교회의 일치를 결의하였지만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호응이 없어서 무위로 끝났다. 미구에 터키제국에 의하여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됨으로써 동로마제국은 멸망하였고(1453년), 러시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지배에서 독립하였다. 16세기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대하여 동방교회는 완강히 반대하였으며, 우크라이나 교회의 중요한 일부가 가톨릭과 합일하였다. 17세기에는 시리아 전례의 멜키트 교회가 가톨릭으로 복귀하였다. 또 19세기에는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의 교회들이 독립된 국민교회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터키가 유럽에서 축출되면서 비잔틴 총주교의 실질적 권한은 이스탄불 근처의 교구들에 국한되었다. 2, 현재의 상태 : 동방교회들의 현재의 상태는 그 대부분이 공산진영에 속하기 때문에 어려운 처지에 놓여 정확한 현상을 파악하기도 힘에 겨운 형편이다. 동방의 여러 교회들은 각 교회가 추종하고 있는 의식(儀式, ritus)에 따라서 크게 다섯 그룹으로 분류된다. 그들의 의식은 전례절차와 법제와 관습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동방교회에서 압도적 다수파인 비잔틴 의식에 속하는 정교회(正敎會, Orthodox)는 이스탄불을 위시하여 그리스인들이 800만명, 멜키트파가 50만명, 러시아를 비롯한 슬라브인들이 1억 4,000만명, 루마니아, 조지아, 알바니아 등지에 1,500만명 등 총 1억 6,000여만명으로 추산되고 있으나, 소련 내의 정교도의 수가 1억명이 아니고 5,000~6,000만명이라고 추산하는 학자들도 많아서 비잔틴전례의 신자수는 1억 2,000만명에서 1억 7,000만명까지 유동적이다. 칼체돈 공의회를 거부하고 분리된 아르메니아 의식의 교회들은 소련령 아르메니아와 기타 흩어져 있는 신자를 합하여 370만명으로 본다. 서부 시리아 의식의 신자는 70만명, 동부 시리아(갈데아) 의식의 신자 17만명, 콥트 의식의 신자 130만명, 에티오피아에 500만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정교회 신자가 아닌 기타 동방교회의 신자는 약 1천만명 이상으로고 본다. 이들은 다 5세기에 이미 분리된 교파들이다. 동방교회에 소속되어 있다가 여러 가지 기회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재일치를 이룬 동방 가톨릭 교회들의 신자도 약 1,000만명으로 추산된다(Uniati). 비잔틴 의식의 가톨릭 750만명, 아르메니아 의식의 가톨릭 18만명, 서부 시리아 의식의 가톨릭 17만명, 동부 시리아 의식의 신자 20만명, 인도의 말라바르 의식의 신자 130만명, 그리고 레바논의 마론 의식의 신자는 전부 가톨릭으로서 50만명을 넘는다. 이들은 그들의 고유한 전례와 관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리 상으로 로마 교회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에 여타의 동방교회들이 항상 경계하는 대상이 되어서, 객관적으로 보면 교회일치 운동에 있어서 좋은 위치에 있지만, 실제로는 오르토독스 교회가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트집을 잡는 구실이 되어 있다. 그들을 동방교회에 대한 서방교회의 침략의 표지로 보기 때문이다. 동방교회의 체제는 다양하고 동방교회 전체를 통괄하는 중심 권위는 없다. 각 의식 그룹별로 총주교, 대주교, 주교의 계통이 있지만, 같은 의식 안에도 여러 총주교좌가 있어서 서로 독립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자치적인 국민 교회의 최고 의결기관은 시노두스 또는 전국 공의회이며 이 회의에는 평신도도 참석하고 있다. 동방교회 전체가 참여하는 세계 공의회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지만 그런 공의회는 역사상 한 번도 개최된 일이 없다. 1950년에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좌는 전체 동방교회의 중심이라고 선언하였지만(아테나고라스 총주교) 아무도 호응하지 아니하였다. 동방의 여러 교회들은 로마시대부터 국가의 직접적인 간섭을 많이 받았으며 오늘의 공산체제 하에서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철의 장막 뒤에서 들려오는 교회 당국자의 목소리가 어느 정도 독자적 의사표시인지 또는 공산정권의 뜻이 어느 정도 들어 있는지 알기 어렵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가톨릭 교회와의 관계는 일치운동의 범위 내에서 상당히 호전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상호방문과 공동연구의 단계에 있고 실질적인 변화는 별로 없는 상태이다. 일치운동에 대하여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좌는 상당히 적극적이지만 다른 교회들은 소극적이고 유보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3. 교리와 신앙생활 : 동방교회들 중에서 가톨릭과 일치한 교회는 전례와 관습만 다르고 교리는 가톨릭과 같다. 고대에 그리스도론 논쟁 중에 분리된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자들의 교회의 교리는 분열 당시보다는 많이 변했지만 에페소 공의회와 칼체돈 공의회를 배척하는 한, 가톨릭 측에서나 정교회 측에서 그들의 교리를 정통신앙의 교리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정교회는 교회의 초기 7회의 공의회를 가톨릭과 함께 인정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근본 교리인 성삼론과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표현이나 설명의 차이가 약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몇 가지 교리와 실천사항에 차이가 있다. 하느님의 계시는 성경과 성전을 통하여 전달된다고 인정하지만, 러시아 교회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서 구약성서의 제2정경(正經, Deuterocanonicum)을 성경이 아니라고 한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성령론 해석에 있어서 가톨릭은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하신다고 해석하는데, 정교회는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하신다고 해석한다. 성모께 대한 신심은 두터우면서도 성모 무염시태 교리는 배척한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성모는 모태에서 성화되지 아니하였고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서 성화되었다 한다.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는 하지만 사후에 보속을 하는 연옥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는다. 동방교회에서도 죄의 사면장을 발행하지만, 죄의 사면으로 벌도 사면된다고 하면서 가톨릭의 은사교리를 배척한다. 가장 큰 쟁점은 교황의 명예상 수위권은 인정하나 통치권적 수위권을 배척하고, 교황의 특별 교도권의 무류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동방교회의 신심생활은 미사와 성무일도에 집중되어 있고 대단히 장엄하고 복잡하다. 자신이 세례를 받은 자라야 타인에게 세례를 줄 수 있고(실제는 사제와 부제), 긴급한 경우 외에는 세 번 물에 잠그는 침수식(侵水式)으로 세례성사를 거행한다. 견진성사는 여러 번 받을 수 있고 미사에는 반드시 누룩으로 발효시킨 빵을 사용하며, 평신자도 빵과 포도주를 받아서 영성체를 한다. 고백성사의 보속은 견책이라 하여 속죄가 아닌 치료의 뜻으로 한다. 병자성사는 건강한 사람도 받을 수 있고, 혼인은 양 당사자의 동의로써가 아니고 사제의 축복으로 성사가 된다. 특별한 관면이 없으면 정교도가 아닌 다른 교회의 주교에게서 받은 신품은 무효로 본다. 전례 시기는 예수 부활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성탄 축일은 1월 6일(공현축일)에 지낸다. 성모와 성인과 그들의 성화(聖畵)공경이 활발하고 순례행사를 즐기며, 수도생활(monachism)을 매우 높이 존경한다. 수도자 아닌 재속 성직자는 신품 받기 전에 결혼할 수 있으면, 1923년 이후로는 홀아비가 된 부제나 신부는 재혼할 수도 있다. 일반 신자들은 성탄축일, 부활축일, 베드로 · 바울로축일, 성모승천축일에 영성체하며, 영성체하기 며칠 전부터 단식을 하기도 한다. 신심은 깊으나 교리적으로 너무나 무식한 것이 큰 문제이다. (鄭夏權) [참고문헌] J. Chrysostomus, Eglise d’Orient, in Encyclopedie de la foi, t. 1, pp.449~459 / R. Janin, Eglises orientales et rites orientaux, Paris 1955 / P. Evdokimov, L'orthodoxie, Paris 1959 / O. clement, Byzance et christianisme, Paris 1964 / F. Dvornik, Byzance et la primaute romaine, Paris 1964.
◆ 동방이교 ◆ 한자 東方離敎 라틴어 schisma orientale 영어 eastern schism 1054년부터 본격화된 동방교회. 수세기 동안 진행되어온 양(兩)교회 사이의 오해의 결과로서 1054년에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천도(330년)와 더불어 시작된 양교회의 수위권 논쟁, 종교에 대한 정치철학의 차이 등은 신학적 논쟁들과 더불어 계속 양 교회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발단은 교황 성 레오(Leo) 9세(재위 : 1049~1054) 시대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체룰라리우스(Michael Caerularius)가 그의 관할지역에서 라틴전례의 관습을 금지시킨 일에서 시작되었다. 교황은 교황특사 훔베르트 추기경을 파견하여 로마교황의 지위를 능가하는 ‘전 세계의 총대주교’라는 칭호를 폐기하고 문제시된 ‘필리오케’(Filioque) 문구를 신경(信經)에 채택하도록 요구하였다. 양측의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자 추기경은 총대주교를, 총대주교는 서방대표를 파문하였다. 1054년의 이 사건은 보통 동방이교의 시작으로 간주되지만 이 일은 특사를 파견한 레오 교황이 이미 사망한 후였으므로 서방측의 파문은 그 합법성이 의심스러우며 동방측의 행위도 교황이나 라틴 교회 전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특사들에 대한 인신공격적인 것이었다. 이 당시만 해도 동시대인들은 이교(離敎)의 진전을 모르고 있었으며 성 레오 9세를 이은 빅토리오(Victorius )2세, 스테파노(Stephanus) 9세, 알렉산데르(Alexander) 2세 등은 곧 비잔틴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하였다. 특히 성 그레고리오(Gregorius) 7세는 터키와 교전 중에 있는 동로마제국을 돕기 위해 군대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4세에 의한 교황권의 위협과 비잔틴의 적인 노르만족과 교황 사이의 친교 등이 화해의 희망을 유산시켰다. 더구나 십자군 원정 중에 일어났던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서방측의 잔혹행위로 반(反)라틴 감정이 대중 속에 구체적으로 퍼져 1182년 분노한 그리스 군중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라틴구역에 대한 대량학살이 있었고 이에 대한 보복조치가 데살로니카에서 취하여졌다. 또한 세 차례의 십자군 원정이 실패한 원인이 콘스탄티노플에 있다는 여론이 서방측에 조성되자 제4차 원정에서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1204년), 양교회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이를 회복시키려는 인노첸시오(Innocentius) 3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교황의 수위권과 서방에 대한 그리스 성직자들의 적대감은 일치회복을 위한 리용 공의회(1274년)와 피렌체 공의회(1439년)에서의 노력을 무산시켰다. 1472년 콘스탄티노플 교회회의에서 피렌체 공의회에서의 일치를 정식으로 파기한 것을 마지막으로 양 교회는 완전히 분열되었다. 양 교회의 일치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으나 1965년 교황 바오로(Paulus) 6세와 동방교회의 총대주교 디미트리우스 1세는 1054년의 파문들을 무효화하고 화해의 인사를 나누었다. 또한 요한 바오로(Joannes paulus) 2세는 동방교회와의 완전한 일치를 모색하기위하여 1979년 교황청에 신학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참고문헌] J. Herhenrother, Photius, Patriarch von Konstantinople, 4b. in3, Regensburg 1867~1869 / W. Norden, Das Papttum und Byzanz, Berlin 1903 / S. Runciman, A History of the Crusades, 3v, Cambridge, Eng, 1951~1954 / The Easter Schism, Oxford 1955 / B. Roberg Ostrogorsky, Die Union zwischen der Griechuschen und der Lateinischen Kirche auf dem, Konzil von Lyon 1274, Bonn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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