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주정꾼 노아 노아 하면 떠오르는 것은 노아의 방주와 대홍수 사건이다. 당시의 상황은 하느님도 수습하기가 곤란하셨던 모양이다. 홍수로 한번에 쓸어 버리려고 마음을 먹으셨을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었고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
하느님은 노아만 살려두고 싶어하셨다. “노아야, 악한 이 세상을 홍수로 멸망시키려 계획중이다. 너는 큰 배를 만들어 네 가족과 동물들을 태워라….”
노아는 하느님 말씀대로 산꼭대기에 배를 만들었다. “산 꼭대기에 배를 만들다니. 저 노아 영감, 날씨가 더워서 미친 것 아니야?”
하느님의 은혜를 받은 노아
드디어 대홍수로 세상은 물에 잠겨 버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성서에서는 “노아는 의인이며 흠없는 사람이었고,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었다”(창세 6, 9)라고 칭찬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노아는 거룩하고 완전한 믿음의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의인인 노아도 죄를 짓고 실수를 저지른 사례가 있다. 홍수가 끝난 후 노아는 산기슭을 개척하여 포도밭을 일군다. 노아에게는 세 아들, 즉 셈·함·야벳이 있었다. 어느날 함이 장막 안으로 들어가보니 아버지 노아가 포도주에 곤드레만드레가 되어 벌거벗고 있었다.
“눈꼴사납구먼, 아니 노인네가 망령이 났나…, 술에 취했으면 취한 거지… 왜 옷은 다 벗고 저렇게 누워있담….”
밖으로 나와 함은 셈과 야벳에게 빈정거리며 아버지 흉을 보았다. “형제들, 아버지가 이젠 갈 데까지 간 것 같구먼. 이젠 술주정에 옷까지 모두 벗고…. 동네 창피해서 어디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
노아는 술에 취해 추한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준 적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작은아들 함이 아버지를 조롱하고 비웃은 것을 감안하면, 노아는 자주 술주정을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추한 모습을 보지 않았다. 뒷걸음쳐 들어가 옷을 입혀드렸다. 사실 두 아들의 심정도 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함은 겉으로 흉을 보았고, 다른 두 아들은 마음 속에 묻어둔 것뿐이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한술 더 떠서 큰 실수를 저지른다. 자기를 흉보았던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내린다. 그리고 셈과 야벳에겐 축복한다.
“아버지가 일하다 한잔하고 실수 좀 했기로서니, 그걸 가지고 동네방네 나발을 불고 다녀? 네 형과 동생 발뒤꿈치라도 닮아라. 이런 불효막심한 놈 같으니….”
사실 술주정쟁이 아버지를 둔 자식들의 고통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이다. 자주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게 되면 가족관계는 미움과 불신이 생겨 비뚤어지게 마련이다. 술주정도 여러가지이지만 노아처럼 벌거벗은 몸을 자식들에게 보이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은가.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의인으로 칭송받은 노아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과거의 의연한 모습은 어디 가고 비웃음을 사는 술주정쟁이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이가 들어 노망이 들었단 말인가?
회개하는 사람이 '의인'
우리도, 노아도 보통 사람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노아가 긴장감이 풀렸다고 생각도 되고, 혹시 시간이 흐르면서 교만해진 것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다. 성서에서의 의인이란, 죄를 전혀 짓지 않는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죄와 잘못을 저지르고 살지만 하느님과 함께 살려고 노력하고 회개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의인인 ‘노아’도 한결같을 수는 없었다. 인간이기에 때로는 흐트러지고 망가지기도 했을 것이다.
화도 불같이 내고 욕설도 서슴지 않는 그런 보통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노아를 더 친근하게 느낀다.
어떤 사람도 완전한 존재일 수는 없다. 완전을 향해 때로는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노력하는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의인인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과 인간의 가치판단은 다르다. 부족한 면에서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노아, 그러나 믿음을 가졌던 노아, 그는 그야말로 위대한 보통 사람이었다.
평화신문 기자 pb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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