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우상숭배에 대하여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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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승태 | 작성일2007-03-15 | 조회수796 | 추천수0 | 신고 |
성화상(성상)은 유럽에서 프랑크(게르만)족이 남하하게 되면서 문자를 깨치지 못하는 대다수의 미개한 사람들에게 신앙(복음)을 전하기(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래의 내용을 통해서 보여지듯이 많은 오해와 논쟁을 통해서 가톨릭에서는 주로 성상공경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우상숭배와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화상 공경은 신앙 교육을 위해서 도입된 것인데, 성화상이 하느님 공경에 더 쉽게 이르기 위한 수단임을 의식한다면 성화상을 마치 예수님과 성화상이 표현하는 대상의 또 다른 현존처럼 잘못 생각하고 신앙의 대상처럼 여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마음, 성모님의 믿음, 성모님의 순명, 성모님의 정결을 우리는 성모상이라는 이미지화를 통하여 배울 수 있으며, 다른 성화상도 똑같은 이유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그러한 형상을 숭배하는 것이 어떠한 주술적인 영향으로 인간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믿음이기에 가톨릭의 성화상 공경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하의 내용은 검색을 통한 가톨릭 대사전의 내용입니다. ◆ 성상 ◆ 한자 聖像 라틴어 Statua 영어 Statue [관련단어] 성화상 예수 그리스도, 복되신 동정녀, 성인 또는 천사의 모습을 조각하거나 주조(鑄造)한 물건. 가톨릭 교회에는 성상을 모시는 관습이 있다. 이는 성상을 대할 때마다 보이지 않게 우리 곁에 현존하고 계시는 그리스도나 천상에 있는 성모 및 성인들을 쉽게 연상하고 흠숭이나 공경을 효과적으로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당에 성상을 모시는 관습을 유지하는 한편 신자들에게 덜 건전한 신심을 조장하지 않도록 수효를 조정하고 모셔두는 위치도 올바른 순서를 지키게 하였다(전례헌장 125, 교회법 1188조 참조). ⇒ 성화상
◆ 성화상 ◆ 한자 聖畵像 라틴어 Icon 영어 Icon [관련단어] 성화상 논쟁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천사, 성인들 혹은 교회 역사상 성스러운 사건을 재현해 놓은 그림이나 부조(浮彫). 현대에 와서는 특별히 들고 다닐 수 있는 것을 의미하지만, 원래는 제구(祭具)나 제의(祭衣), 벽과 판자 등에 여러 가지 색깔로 그려지거나 모자익이나 여러 재료로 만들어진 성스러운 재현물들을 의미하였다. 이것들은 동방교회에서 시작되어 널리 공경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그 지방의 색채를 가미하여 제작되었다. 5세기부터 동방교회에서 널리 만들어졌으며 8-9세기의 성화상 논쟁과 그 결과로 성화상에 대한 공경이 크게 증대되었다. 그 뒤 동방교회에서는 친구(親口)나 장궤(長-), 향(香)과 같이 성화상에 대한 공경은 신심을 표현하는 일반적인 양식이 되었다. 사람들은 성화상을 통해 성인들이 자비를 베풀고 삶의 중요한 사건을 주재하며 병을 치료해 주고 악마를 쫓아 주기 때문에 성화상은 영적 세속적 은총의 통로가 된다고 믿었다. 에데사(Edessa)의 그리스도화상과 테오토코스(Theotokos)의 성화상 등이 기적으로 유명하며 현대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현재 로마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마리아'(Our Lady of Perpetual Succour) 화상일 것이다. 성화상이 동방교회에서 널리 공경된 반면 서방에서는 성상이 일찍부터 공경되었다. (⇒) 성화상 논쟁
◆ 성화상 논쟁 ◆ 한자 聖畵像 論爭 라틴어 controversia sacrarum imaginum 약 725년부터 842년 사이에 그리스 교회가 격론(激論)하게 된, 성화상 공경을 둘러싼 논쟁. 7세기말과 8세기초 성화상 공경을 반대하는 경향이 동로마제국, 특히 그리스도의 인성을 극소화시키는 단성론자와 파울리키아누스파(派)의 마니교 경향, 그리고 이슬람의 영향 등으로 생겼다. 동로마의 레오(Leo) 3세는 726년 마침내 성상 파괴령을 내렸고 곧 전 제국에 심각한 반응이 일어났다. 총대주교 제르마노(Germanus)는 교황에게 호소하였으나 730년 파직되었다. 조직적인 박해가 가장 열렬한 성화상 공경자인 수도자들에게 가해졌고, 교황 성 그레고리오(St. Gregorius) 3세는 로마에서 두 차례의 교회회의를 열어 레오 2세의 지지자들을 단죄하였다(731년). 레오 3세의 계승자인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5세는 선왕의 정책을 고수, 753년 히에리아 교회회의를 소집, 총대주교가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성화상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만을 표현하기 때문에 신성과 인성문제에 있어서 성화상 공경자들은 그리스도의 일치성을 네스토리우스파처럼 두 본성을 분열시키거나 단성론자들처럼 두 본성을 혼란시킨다고 주장하였고 또한 동정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성화상이 우상임을 선언하고 파괴를 명하였다. 이러하여 박해는 더욱 극렬해졌으며 재속 성직자들이 이에 굴복하였지만 수많은 수도자들은 순교하였으며 이는 수도원 반대운동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레오 4세(재위 : 775~780) 때에 이르러서야 박해는 완화되었고 그의 사후에 아내였던 여황제 이레나(Irena)가 섭정에 올라 교황 하드리아노(Hadrianus) 1세와 타협을 시작, 787년 제2차 니체아 공의회에 사절을 파견, 여기서 히에리아 교회회의의 결정은 무효화되고 성화상 공경이 법령을 통해 허용되었다. 그러나 성화상 타파주의자들은 특히 군대 내에서 강력한 세력을 유지, 814년 2차 성화상 논쟁이 아르메니아의 레오 5세 치하에서 발생하여 성상 파괴, 박해 및 순교가 뒤따랐다. 이는 824년 테오필루스(Theophilus)의 사망으로 그의 아내 테오도라(Theodora)가 섭정, 여황제로 즉위하면서 그 막을 내렸으며, 사순절 첫 일요일을 성화상을 기념하는 ‘정교회의 축제’로 지키게 되었다. 서방에 있었던 이 논쟁은 주로 제2차 니체아 공의회 법령의 구절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황제 이레나에 의한 제2차 니체아 공의회의 결정은 반(反)비잔틴 감정과 더불어 이 공의회의 결정과 성화상 공경을 반대로 하는 <샤를르 문서>(Libri Carolini, 790)를 작성하게 하였다. 여기서 이들은 그리스어로 하느님에 대한 ‘흠숭’(Latreia)과 창조물에도 할 수 있는 ‘공경’(Proskynesis)의 차이를 구별하는 라틴어 표현이 없었기 때문에 성화상에 대한 동방에서의 소위 ‘흠숭’을 부당하게 논박하였다. 그러나 차츰 니체아 법령을 받아들였으며 이 반대논쟁은 실제적으로 10세기에야 끝났다. 성화상 논쟁은 신학적 결과라기보다는 그 실제적 결과 때문에 더 중요한데, 보통 동방 대이교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이를 향한 촉발제로 간주되고 있다. [참고문헌] J. Marx, Der Bilderstreit der byzantinischen Kaiser, Trier 1839 / H. Koch, Die altchristliche Bilderfrage, 1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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