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全知하심과 관련, 성경말씀을 통해 계시된 내용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또한 부분적이 아니라 온전하게 아시고,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 미래에 일어날 일까지 통털어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예지(미리 아심)를 포함한 하느님의 전지하심으로 인해 하느님께서는 그릇됨이 없는 판단을 공의로우심에 근거하여 내리실 수 있읍니다. 부분적이고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지식만 가지고 있는 인간 입장에서 어느 특정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공의롭지 못하다는 인간적 판단을 내리는 불경을 범하게 되는데, 우리는 겸손하게 하느님의 크신 섭리를 우리의 제한적인 지식으로는 알 수 없음을 하느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온전하게 아시고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모두 아시는 관계로, 하느님께서 구원섭리를 펼치시어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구원의 완성)을 이루도록 섭리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것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아벨의 제물), 어떤 것은 하느님께서 싫어하시고(카인의 제물)에 관해 많은 말씀들이 나오는데, 하느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그 마음 속에 진심으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전지하심에 의해 판단하심을 성경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유다가 은전 30냥에 예수님을 팔았고 베드로도 천한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지만, 유다는 마음 속에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이 돈에 눈이 멀어 주님을 배반한 것이기 때문에 저주받아 죽게 되었고 베드로는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한 가운데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죽음이 두려워 주님을 부인한 것을 주님께서는 속속들이 아시기 때문에 베드로를 반석으로 하여 교회를 세우시어 베드로를 초대교황으로 오늘날까지 교회가 이어져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의 황당한 주장에 의하면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게 된 것이 하느님의 예정섭리에 의한 것이고 유다가 주님을 팔아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임했으므로 유다야말로 하느님의 예정섭리에 충실하게 순종한 성인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예정섭리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성경의 진리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의 배후에는 모든 악의 책임조차도 하느님께 돌리려는 사탄의 교활한 책략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순종과 불순종 중에서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셨읍니다. 순종에는 축복과 영생이 따라오고, 불순종에는 저주와 죽음(멸망)이 따라오게 예정하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선택한 결과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즉 불순종을 택한 유다는 저주와 멸망이 임하게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악한 행위로 유다는 저주받고 멸망했지만 놀라우신 하느님의 섭리로 그러한 악조차도 인류구원을 위한 십자가 구속에 사용하신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것이지, 돈에 눈이 멀어 주님을 배반한 유다는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탐욕으로 인해 멸망당한 엄연한 성경적 진리를 왜곡해서 유다가 성인인 것처럼 주장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정론을 잘못 이해하면 자칫 사탄의 꾀임에 넘어가 모든 악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는 불경죄를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요즘 게시판에 유다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여 하느님의 예정론에 대해 간략히 설명드리게 되었음.) 악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구원의 완성)을 이루게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섭리에 우리는 다만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악(불순종)을 저지른 사람으로 인해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악한 행위 조차도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로 인해 구원이 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그러한 악(불순종)을 저지른 당사자는 저주와 멸망에 처하도록 준엄하신 하느님께서 섭리하시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악한 행위 조차도 구원에 이용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놀라우신 분이시다 라고 이해해야만 하느님의 예정섭리를 성령의 빛 안에서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30장 15절의 말씀 "보아라, 내가 너희 앞에 (순종하면) 생명과 행복, (불순종하면)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라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말씀하시는데 이는 우리가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이 임하게 섭리하시고 불순종할 때 저주가 임하도록 섭리하심을 분명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어 선택하도록 하시는 하느님의 예정섭리는 신명기 27장에서 30장까지 자세하게 나와있읍니다. 기도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겉으로 보기에 일주일에 단식을 두번이나 하고 십일조 정확히 내고 계명을 외적으로 충실히 지킨 바리새인들을 주님께서 그렇게도 심하게 책망하시고 저주하신 이유도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 없이 속으로는 온갖 욕심이 가득한 상태에서 겉으로만 선한 척, 가식적인 삶을 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 미워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에는 시체가 썩어있는 회칠한 무덤이라 욕하신 이유가 바로 이중적인 마음을 탓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간음한 여인, 세리, 창녀들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꾸짖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의 육신이 연약하여 죄를 짓고 그 죄책감에 눌려서 고생하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즉 회개할 마음가짐이 있음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가엾이 보시고 영적으로 치유해 주시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시면 주님께서는 죄인을 나무라시지 않고 이중적인 사람들(바리새인, 서기관, 율법학자)을 나무라십니다. 죄인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알기 때문에 주님께서 회개의 은총을 주시어 치유하실 수 있지만, 이중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의인인 것으로 착각하고 살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올 수 없읍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의인(죄인이면서 의인이라 착각하며 사는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그렇게 심하게, 심지어 저주까지 하시며 바리새인, 서기관, 울법학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루카복음 23장에 나오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곁의 (우편)죄수 이야기는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알게 하는 상징적 예화가 될 수 있읍니다. 한 죄수는 주님에게 "당신이 메시아라면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 라며 조롱합니다. 반면에 십자가 (우편) 죄수는,첫째로 자신이 죄인이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이 마땅하다는 것과 둘째로 주님께서는 죄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것과(영적으로 보면 주님의 대속을 인정하는 것임) 셋째로 주님 나라 들어가실 때 죄인인 자신을 기억해 주십사(구원에 대한 갈망과 주님께로 향한 심령 깊은 곳에서의 믿음) 주님께 간청하여 주님의 은혜로 당일로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임하게 되는 믿는 이의 마음과 고백이 (우편) 죄수에게서 드러나는 데 바로 이러한 마음과 믿음이 주님보시기에 합당한 믿음으로써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임하게 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평생을 죄짓고 살다가 죽기 바로 전에 주님께 몇마디 말한 것을 가지고 주님께서 십자가 (우편)죄수를 낙원에 임하게 하신 것이 아니고 그 몇마디 말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으며, 그러한 고백을 주님께 드리는 (우편) 죄수의 마음의 절실함과 진정성을 주님께서 합당하게 인정하시어 우편죄수에게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 안에 주님에 대한 신앙이 과연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분량인지 성령께서 비추어 주시는 빛으로 성찰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부족하다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채워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결같은 한마음으로 정직하게 살면서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에 주님께 사랑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마음으로 주님을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경외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사람들 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속마음과 은밀한 생각까지 알고 계실 정도로 전지하심에 대한 성경 말씀을 인용해 드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예수님은 삼위일체로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서 위격으로만 구별되시는 성자하느님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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