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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Re:궁금합니다?(야고보)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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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수근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23 조회수753 추천수2 신고
+ 찬미 예수님.
 
성 대야고보
 
 
  성 야고보(Jacobus)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요한(Joannes, 12월 27일)의 형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갈릴래아 출신으로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였다. 그들은 부친과 함께 겐네사렛 호수에 배를 띄워 고기잡이로 살던 사람들이다(마태 4,21-22; 마르 1,19-20; 루가 5,10-11).

   그들은 예수와 함께 시몬과 안드레아(Andreas)의 집에 갔을 때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를 예수께서 낫게 해주신 현장에도 있었다(마르 1,29-31). 그들은 또 자기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태 20,20-28) 하고 청했던 사람들이다. 또 천둥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둘 다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얻었고(마르 3,17), 예수께서 사마리아에서 냉대를 받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가 9,54)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에는 베드로(Petrus)와 그들 형제만 따라오게 하셨으며(마르 5,37), 예수의 영광스런 변모 순간에도 베드로와 그들 형제만 함께 자리하게 하셨고(마태 17,1-8), 게세마니(Gethsemane)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그러하셨다(마태 26,36-46).

   성 야고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서 참수를 당함으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로 순교하였다(사도 12,1-2).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그는 순교하기 전에 에스파냐에서 설교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에스파냐 북서부 갈리시아(Galicia) 지방으로 옮겨져 모셔졌고, 후일 이곳에 대 야고보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지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라는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는 유럽의 3대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이다.
 
 
+ 찬미 예수님.
 
성 소야고보
 

 알패오(Alphaeus)의 아들인 성 야고보(Jacobus)는
복음서에 그리스도의 12사도로 기록되어 있고,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같은 인물로 가끔씩 등장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예루살렘의
어느 2층 방에 모였던 11제자 중의 한 분이다(사도 1,13).
야고보는 분명히 주님의 형제로 언급되고(마태 13,55),
‘주님의 동생’으로 불린다(갈라 1,19).
베드로(Petrus)는 자신이 기적적으로 감옥을 빠져나온
사실을 알려주라고 이른 사람이 바로 야고보이다(사도 12,17).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야고보는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초대 주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들을 괴롭힐 것이 아니라
다만 우상에게 바쳐서 더러워진 것을 먹지 말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고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먹지 말라고 편지를 띄웠으면 합니다.”(사도 15,13-21) 하고
비유대계 그리스도인에게 4가지 관행만을 실천하도록 요구하였다.

   후대에 생긴 전승에 의하면 야고보는
팔레스티나(Palestina)와 이집트에 정착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이집트의 오스트라키네(Ostrakine) 또는 시리아에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그는 복음을 열심히 전하였는데,
그의 설교가 군중을 노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신전 지붕에서 내던져졌다고 한다.
그리고 군중들로부터 곤봉과 방망이로 매맞아 순교하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곤봉이나 방망이를 든 모습으로 자주 그려진다.
 
야고보서 누가 썼나요?

야고보서에 대해 명확한 언급을 한 최초의 교부인 오리게네스는 이 서간의 저자를 단순히 ‘야고보’ 또는 ‘사도 야고보’라고 밝히고 있어요. 유세비우스는 이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사도 15,13; 21,18)며 “주님의 형제”(갈라 1,19)로 여겼지요.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야고 1,1)이라고 야고보를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이며, “자유를 주는 완전한 법”(야고 1,25)을 지키라는 권유가 유다교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던 야고보(사도 15,13-21; 21,18-24)를 연상케 했기 때문이죠. 나아가 사도 15장에 나오는 야고보의 설교와 문체가 서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팔레스티나의 기후현상을 정확히 반영하는 “가을비와 봄비”(야고 5,7)라는 언급도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아요. 서간에 쓰인 그리스어 문체가 갈릴래아 농부 출신치고는 너무 유창할 뿐 아니라, 주님의 형제로 오래도록 생활해 온 것에 비해서는 예수 자신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으며, ‘율법의 효력’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서 믿음과 행동을 다루고 있음이 의아하다는 점을 들어, 익명의 저자가 야고보의 이름을 빌어 집필했을 거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어요.

자료: 굿뉴스 성경해설

 
 
최초의 순교자
 
성 스테파노  축일 12월26일
 
그리스어에 능숙한 유대인으로서 아마도 유대 나라 밖에서 태어난 듯하나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성 스테파누스(Stephanus, 또는 스테파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였다. 그는 예루살렘의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의 세속적인 요구에 부응하도록 사도들로부터 선발된 일곱 부제 중의 한 명이다.

   그는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았고, 하느님의 은총과 성령의 힘을 가득히 받아 백성들 앞에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많이 행하였다. 또한 그는 키레네(Cyrene)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유대인들로 구성된 일명 '자유인의 회당'에 속한 몇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그들이 성 스테파누스를 감당할 수 없음을 알고 사람을 매수하여 그가 모세(Moyses)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그는 체포되어 의회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설교를 하자 의회 의원들은 성 스테파누스의 말을 듣고 오히려 화가 치밀어 올라 이를 갈며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래서 그는 도시 외곽에서 돌을 맞고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사도 6-7장 참조). 사도행전 8장 2절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성 스테파누스를 장사지냈다고 언급되어 있으나, 그의 무덤이 어디인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한편 415년 8월 3일 루키아누스(Lucianus) 신부가 예루살렘에서 15km 떨어진 카프르 가말라(Kafr Gamala)에서 성 스테파누스의 유해를 발견하였는데, 이 유해는 에스파냐의 메노르카(Menorca), 아프리카의 히포(Hippo)와 예루살렘, 시온(Sion),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거쳐 로마(Rome) 등으로 나누어져 전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각 도시에 보관된 유해 위에 성 스테파누스 기념 성당이 건축되어 이 성당들에서 많은 기적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성 스테파누스의 유해 공경은 세계 각 곳으로 퍼져 나갔다. 서방 교회에서는 9세기경부터 1955년 공식 전례에서 제외될 때까지 성 스테파누스의 유해가 발견된 8월 3일을 '성 스테파누스의 유해 발견 축일'로 기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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