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최후의 만찬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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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성수 | 작성일2008-03-07 | 조회수1,732 | 추천수3 | 신고 | |||||||||||||||||||||
0 이 부분은 주후 2천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신학자들간에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으며, 그 당시 유대 자체의 달력에도 바리사이파 달력, 사마리아 달력(사두가이 달력)이 다르고, 하루의 시작시점 자체가 오늘날의 우리의 시간개념과도 다른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혼란스럽네요.
제가 본 몇 가지 책에서도 설만 분분하고(마가복음을 중심으로 한 공관복음의 기록이 맞다는 설, 요한복음의 기록이 맞다는 설 등) 잘 정리가 안 되어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서 본 자료를 몇 개 올려 봅니다.
0 어느 첫째 분의 자세한 답변
우리는 마르코복음이 공관복음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마르코복음과 요한복음을 우선 비교하겠다. 특히 수난사에 있어서 마태오와 루가는 마르코를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의 만찬과 수난 및 죽음의 때를 알리는 대목들을 살펴보자.
1) 마르 14,12: "무교절 첫날에는 과월절 양을 잡는 관습이 있었는데…"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은 예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 무교절과 과월절은 둘이 함께 하나의 큰 축제를 가리켰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도 무교절과 과월절을 서로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고 같은 축제로 여겼다.
실제로 유다인들은 니산 달 14일 오전에 누룩을 모두 태우고, 과월절 식사 때부터 이미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 이 만찬을 먹는 시간은 밤중, 곧 과월절이 시작된 15일 밤(우리 식으로 말하면 14일 해가 지고 난 이후)이고 요일로 따지면 금요일이 시작되는 밤(우리 식으로 말하면 14일 해진 이후)이다. 유다인들의 하루는 해가 지면서 시작된다는 사실에 유의하기 바란다. 바로 '이날 밤'에 베드로는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하였다.(마르 14,30:15,66-72) 2) 마르 15,25: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33절: " 낮 열두 시가 되자 온 땅이 어둠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 되었다." 42절: "날이 이미 저물었다. 그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니산 달 15일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다. 이날은 안식일 전날, 곧 금요일이었다. 해방절에 들어 있는 안식일은 여느 안식일보다 특별히 더 거룩하게 지내야 하기 때문에, 그날 시체를 염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저녁 해가 지면서 안식일(16일)이 시작되는만큼, 그 전에 서둘러 예수의 주검을 장사지내야 했다. 3) 마르 16,1-2: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그리고 안식일 다음날 이른 아침 해가 뜨자 그들은 무덤으로 갔다." 마르 15,25.33.42: 15일(금) 낮 예수님이 못박히고 돌아가심 (안식일) 16일(토) 밤 예수님이 무덤에서 쉬심 16일(토) 낮 해방절의 안식일은 더욱 거룩함 마르 16,1-2.9: 17일(일) 밤 동트기 전에 예수님이 부활하심 "안식일 다음날" 17일 (일) 낮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그 다음 요한복음의 시간표를 살펴보자.
1) 요한 13,1: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셨다."
이 구절에 이어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이 제자들과 저녁을 잡수시고 제자들의 발도 씻어주셨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저녁 식사가 과월절 만찬인지 아니면 일반 저녁 식사인지 이 구절만가지고는 판단하기 어렵다.
2) 요한 18,28: "사람들이 예수를 가야파의 집에서 총독 관저로 끌고 갔다. 그때는 이른 아침이었는데, 그들은 부정을 타서 과월절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될까봐 총독 관저에는 들어가지않았다."
여기서 예수를 고발한 유다인들은 아직 과월절 만찬을 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비추어 보면, 요한 13장의 저자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것으로 전해주는 최후만찬은 과월절 만찬이 아니라 일반 저녁 식사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최후만찬을 드시고 체포되신 때는 니산 달 13일 해지기 전 저녁에서 해가 지고 난 다음 14일 밤이다. 유다인들은 하루에 보통 두 끼만 식사를 하였는데, 이 경우 아침 식사는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에 간단하게 하고 저녁 식사는 오후 3시 기도시간(사도 3,1: 10,3.30) 바로 직후에 대략 4시경에 한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이 요한의 두 제자를 초대하신 때가 4시였다고 밝히는데, 이 초대가 저녁 식사를 위한 식탁의 초대가 아닌가 싶다.
어떻든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13일 오후에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신 다음, 14일 밤에 체포되시어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시고 14일 이른 아침에 총독 관저로 이송되셨다.
3)요한 19,14: "그날은 과월절 준비일이었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는 유다인들을 둘러보며, '자, 여기에 너희의 왕이 있다.'하고 말하였다,"
이 대목은 빌라도가 예수께 십자가 처형 선고를 내리는 장면이다. 빌라도가 그분을 유다인들에게 내어준 때는 과월절 준비일, 곧 니산 달 14일 낮 열두 시였다. 이 시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과월절 양을 살해할 채비를 차린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의 사형선고 시각을 여기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4) 요한 19,31: "그날은 과월절 준비일이었다. 다음날 대축제일은 마침 안식일과 겹치게 되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체를 십자가에 그냥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시체의 다리를 꺾어 치워 달라고 청하였다."
요한 19,42: "그날은 유다인들이 명절을 준비하는 날인데다가 그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
이 두 구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신 날은 과월절 준비일, 곧 니산 달 14일이며 동시에 안식일 전날인 금요일이었다.
이로써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을 두고,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날짜는 틀리지만 요일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요한복음 저자가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짜를 과월절 양이 뼈를 하나도 다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탈출 12,46(참조: 민수 9,12: 시편 34,20)의 말씀이 인용된 요한 19, 36이 그 결정적인 증거다.
5) 요한 20,1: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의 일이었다.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날은 니산 달 16일 일요일이었다.
마르코복음처럼 요한복음의 유다교식 시간표도 정리해보자.
요한 13,1: 13일(목) 낮 최후만찬과 세족례 "과월절 하루 전날" 14일(금) 밤 예수님의 체포, 안나스의 심문 요한 18,28: 19,14: 14일(금) 낮 빌라도의 심문과 사형선고 "과월절 음식 먹기 전날" 요한 19,31.42: 14일(금) 낮 예수님이 못박히시고 돌아가심 "과월절 준비일, 안식일 전날" 해지기 전에 예수님을 장사지냄 (안식일) 15일(토) 밤 예수님이 무덤에서 쉬심 15일(토) 낮 해방절의 안식일은 더욱 거룩함 요한 20,1: 16일(일) 밤 동트기 전에 예수님이 부활하심 "안식일 다음날" 16일(일) 낮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심
이상 열거한 마르코복음의 수난사와 요한복음의 수난사를 비교할 때,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마르코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이 수난과 죽음을 니산 달 15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고, 요한복음의 저자는 니산 달 14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둘 다 이 사건을 목요일 밤에서 금요일 낮에 일어난 것으로 보는 데에는 일치한다.
출처 : 현문우답(바오로딸)
0 또 다른 분
1. 과(유)월절. (Pesach, Pascha, Passover)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명절이며, 유다인들의 가장 큰 명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탈출을 기념하여 성립된 명절이다. 첫날 벌이는 과월절 식사는 유다교뿐 아니라 기독교측에도 뜻 깊은 의의를 지닌다. 여기에서 주님의 만찬이 유래되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공동번역, 탈출기 12장) 1. 너희는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에게 알려라. 이 달(아빕월) 10일에 사람마다 한 가문에 한 마리씩, 한 집에 한 마리씩 새끼 양을 마련해 놓아라. 2. 만일 식구가 적어 새끼 양 한 마리가 너무 많거든 한 사람이 먹을 분량을 생각하여 옆집에서 그만큼 사람을 불러다가 먹도록 하여라. 3. 흠이 없는 일 년 된 수컷이면 양이든 염소든 상관없다. 4. 너희는 그것을 이 달 십사일까지 두었다가 이스라엘 온 회중이 모여서 해 질 무렵에 잡도록 하여라. 5. 그리고 그 피를 받아, 그것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라고 하여라. 6. 그 날 밤에 고기를 불에 구워 누룩 없는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도록 하는데, 7. 날로 먹거나 삶아 먹어서는 안 된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도 반드시 불에 구워 먹어야 한다. 8. 그것을 아침까지 남겨두어서도 안 된다. 아침까지 남은 것은 불에 살라버려야 한다 9. 그것을 먹을 때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 이것이 나 야훼에게 드리는 과월절이다.
요약하면, 10일에 새끼양을 마련하고, 14일 저녁 어스름에 양을 잡는다. 그리고 15일로 바뀐 밤에 과월절 만찬을 연다는 것이다. 이 것이 바로 과월절의 가장 원형적인 형태이다. 따라서 니산월의 14일을 과월절 저녁(Erev Pesach, Passover Eve)이라고 부르며, 15일은 과월절이라고 부른다. 이 날은 무교절 주간의 첫날이며, 이후에는 무교절 주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리사이파가 해석한 과월절이기도 하다.)
특히 과월절의 첫날과, 무교절 주간의 마지막 날은 욤 토브(בוט מוי : 좋은 날)라고 부르며, 이 날에는 꼭 안식을 하도록 규정되었다. 무교절 주간의 둘째 날은 바리사이파의 달력으로 이른 초실절(욤-하비쿠림)이다. 이 날은 햇 곡식단을 흔들어서 바쳤고, 어린 숫양 한 마리를 번제로 바쳤다.
문제는 초기의 무교절은 7일이었으며, 그 첫날을 과월절로서 계수했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그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과월절은 무교절과 동일시 되었다. 마르코 복음에 따르자면, 무교절(과월절) 첫날을 양잡는 날, 즉 니산월 14일로 잡고 있다. 과월절은 원래 7일 동안이며, 욤 토브는 첫날과 끝날이지만, 디아스포라 유다교의 경우에는 과월절 주간을 8일간으로서 계수하며, 욤-토브는 첫날 이틀과 끝날 이틀로 잡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구약과 신약의 과월절 기간과 계산 방식의 차이, 그리고 성경의 제각기 표현은, 실로 복잡한 상황을 연출시킬 수도 있다. 즉, 예수님 수난일과 부활일을 측정하는 데에 이설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문제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일을 한번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예수님의 수난일자.
모든 복음에는 이의가 없는 부분이 있다.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에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서, 금요일에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하루의 시작이 저녁부터인 유다인의 시간 관념으로는, 최후의 만찬에서부터 묻히신 것까지 하루에 모두 일어났다. 안식일의 전날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안식일에 저승에 계셨다가, 안식 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것이다. 문제는, 이 것을 유다력 날짜로 환산했을 때의 일이다. 공관복음의 경우 예수님께서 과월절 첫날 저녁에 만찬을 드셨다고 증언한다. 이 경우에 15일은 안식일 전날이 되기에 예수님은 15일 날 돌아가시고, 17일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이 나온다. 신학자들은 이에 대해 최후의 만찬이 과월절 만찬임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즉, 과월절 만찬 대신에 새로 주님의 만찬이 제정되는 그 내면적 의의를 중시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과월절 예비일에 돌아가셨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과월절 예비일 자체가 특정되어지지 않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공동번역에서는 대축제일이 때 마침 안식일과 겹쳤다고 친절하게 설명하여, 과월절(의 안식일) 예비일임을 친절하게 설명하여 과월절의 전날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날은 과월절의 양을 잡는 날이기도 하다. 즉, 예수님은 14일날 돌아가시고, 16일날 부활하셨다는 결론이 나온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께서 과월절에 돌아가셨다라고 언급하고 있고,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과월절 예비일에 돌아가셨다고 언급하고 있기에,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내용 상 불일치 문제는 교회 안에서 골칫거리가 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요한복음이 더욱 사실에 충실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보지만, 공관복음을 지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일부의 성경학자는 요한 복음의 대축제일을 욤-하비쿠림(이른 초실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 공관복음 해당 구절과의 조화를 모색하기도 한다.
3. 부활절의 기원에 대하여. 사도시기의 초대교회의 신자들에게는 두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이라는 날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둘째, 유다교처럼 과월절 의식을 거행하되, 그 행사 내용은 유다교인들의 과월절 식사와 달랐다. 즉, 지금의 부활절 절기는 최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니산월 14일의 저녁에 양을 잡는 것으로 시작하여 15일의 과월절이 된 밤까지 유다인의 과월절 만찬이 행해질 때,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단식을 거행하였다. 그들은 출애굽기 12장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가, 새벽 3시 정도에 과월절 만찬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아가페 식사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된 주님의 만찬을 거행하였다. 이 행사는 초대교회의 보편적인 행사라기 보다는, 유대-기독교 계열과, 요한 공동체의 영향을 받은 소아시아 교회들에 의해 주로 행하여 졌을 것으로 추론된다. 이 기독교식 과월절 행사는 지금의 성찬의 전례에서 기억하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행하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는 사도 요한 전승에 따라 과월절 전날, 즉 유다인의 과월절 의식보다 하루 빠른 14일이 된 밤에 이 의식이 거행되었다.
(* 바로 이 관습을 안상홍교에서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도 문제가 있다. 아래(챕터 4)에 비교적 자세하게 상술해 놓았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이른 재림'에 대한 기대가 초대교회 내부에서 사라지고, 유다교가 기독교를 저주하고 축출하면서,기독교는 종말론적인 극단성과 유다교의 잔재에서 벗어난 독자적인 성례전을 다수 가지게 된다. 안식일 회당 예배 참가는 사라졌고, 예수님의 부활 영광을 상징하는 ‘주일’이 보다 강조되었다. 그리고,이런 신학적 재정립은 파스카 식사에 관한 새로운 논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스미르나 감독 성 폴리카르포와 로마 감독 성 아니체토 사이에서 제 1차 파스카 논쟁이 불거졌다. 폴리카르포는 ‘14일파’라고 불리던, 사도 요한의 전승에 따라 과월절 전날에 파스카 식사를 거행하는 전통을 지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아니체토는 서방 관습에 따라 파스카 식사는 반드시 주님이 부활하신 안식 후 첫날을 기준으로 하여야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때에는 아니체토가 폴리카르포의 로마 교회 내에서의 성만찬 집전을 허용함으로서 두 주교 사이에서 화해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50여년 뒤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로마 주교였던 성 빅토리오는 가톨릭 교회의 일치라는 목적으로, 부활절의 날짜 통일을 시도하였다. 반드시 안식 후 첫날에 부활절이 와야만 한다라는 초대교회의 보편적인 전통을 승계하였지만, 유다력을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하는 경우에 예수님 수난일과 부활하신 날인 안식 후 첫날 사이 기간이 사흘 동안에 고정되지 않고 매년마다 들쭉날쭉해지는 문제로 인하여, 가끔 성경상의 유다력과는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생기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춘분 후 첫 만월 다음에 오는 안식 후 첫날로 부활절을 고정시켰던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하여 ‘14일파’를 여전히 옹호하던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가 반발하였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에페소의 주교였던 폴리크라테스는 사도 요한의 전승에 따라서 14일에 파스카 식사를 거행하는 것을 옹호하였으며, 이에 성 빅토리오는 교회의 일치를 해친다는 이유로 폴리크라테스의 파문을 결정하였다. 이 때 리옹의 주교였던 성 이레네오는 가톨릭 교회의 일치와 평화 유지를 주장하며 빅토리오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소아시아 지역 교회 측의 반발도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갈등은 기독교 공인 이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연 니케아 공의회에서 교령의 형식으로서 전 가톨릭 교회가 로마의 결정을 따르기로 함으로서 내부적으로 봉합되었다.
4. 주님의 만찬은 과연 과월절 식사의 계승인가? 앞에서 말한 바를 정리하면, 공관복음은 주님의 만찬의 유래를 유다인의 과월절 만찬을 기원으로서 본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최후의 만찬이 과월절 만찬이라는 설명을 극도로 생략하며, 오히려 예수님 께서 과월절의 어린 양(과월절 희생물로서, 과월절 저녁에 잡히는 희생양)이 되심을 강조한다. 이런 표현은 '천주의 어린 양'(아뉴스 데이)이라는 표현으로 교회 안에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아뉴스 데이와 파스카 식사는 유다식 시간 관념으로 따지면 공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문제를 놓고 24시간의 시간적 공백을 해소하는 것은 교회와, 신학자들의 임무가 되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복음 사가들이 이용한 달력이 제각기 달랐다고 이해하며, 이는 상당한 개연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즉, 공관복음서 사가들은 바리사이파의 달력을 사용하였다고 보며, 요한복음 사가는 사마리아 달력이나, 사두가이파 달력을 사용한 것으로서 보는 것이다. 각파의 달력은 실제 절기 준수에서 차이가 나며, 특히 과월절 준수를 놓고서 그 문제는 심하게 불거진다. 사마리아인의 달력과 바리사이파의 달력은 과월절 절기 준수에서 하루의 오차가 난다.
(이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13일이 된 밤에 주님의 만찬을 제정하시고, 이어 13일의 낮에 돌아가시고,묻히셨으며, 15일에 부활하셨다는 주장이 성립가능하다.)
하지만, 요한 복음 사가가 의도적으로 예수님께서 과월절의 어린 양이 되셨음을 강조한다는 것을 돌이켜보면, 이런 다른 달력의 사용이라는 설명은 그 설득력을 잃게 된다. 요한 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이 과월절 만찬이라는 설명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과월절 만찬이 아니라고 볼 수 만도 없지만...) 더구나, 당시 유다인의 식사 관습에서 유추해보면, 이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따라서, 다른 설명이 강조되게 되었다.
최후의 만찬은 1세기 경의 유다인의 키두쉬에 영향을 받았다고 유다인 제도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키두쉬(성화)는 안식일이 시작되는 저녁의 식사에서 선포되거나, 축제일의 시초에서 선포되었다. 하지만 일반적 키두쉬와 과월절 만찬은 그 차이가 주어진다.
제자들은 주님의 만찬을 연례 행사로 잡지 않고서 매 주, 혹은 모일 때마다 이 의식을 거행하였으며,이는 오히려 키두쉬 식사에서 주님의 만찬이 파생되었음을 지지하고 있다. 이 경우 14일파의 기독교 식 과월절 의식 거행은 '주님의 만찬'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는, 유다교 과월절 만찬의 파생인 것이다. 문제는, 키두쉬는 금요일 저녁, 안식일이 시작될 무렵에 행해지지만, 최후의 만찬은 목요일 저녁에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학문적인 연구는, 종래 교부들의 증언이나, 복음사가의 의도와는 배치되는 측면도 없지 않다. 신약성서 자체에 나오는 최후의 만찬 기사는 아주 모호한 기록임이 분명하며, 서로 다른 내용의 진술이 배치되어 정확한 이해에 혼란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복음사가의 의도가 과월절 만찬과 주님의 만찬을 연계시키려는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주님의 만찬은 사실 키두쉬에 더 근접한 것이라는 학술적 결론은 상당히 유감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주님의 만찬을 교회의 증언과 배치되게 과월절 배경과 구분할 이유는 없다. 주님의 만찬이 키두쉬에 가깝지만, 과월절 만찬의 형태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성경증언 자체가 과월절 만찬이라고 표기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떤 형태의 식탁을 이용하였든지, 새로운 언약으로서 주님의 만찬을 제정해 주셨다는 점이며, 비록 키두쉬와 형태가 더 많이 닮았다고 하더라도 그 배경이 과월절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출처 : [직접 서술] 직접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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