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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병곤 쪽지 캡슐 작성일2008-06-20 조회수361 추천수1 신고
[''바오로 서간'' 해설] 1.그리스도교를 세계 종교로 탈바꿈 시킨 바오로
 
올해는 사도 바오로의 탄생 2천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 뜻 깊은 시기를 맞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특별희년 ‘바오로 해’(Pauline Year)를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한 바오로 사도의 용맹한 신앙을 기리도록 했습니다.

본지는 이 같은 보편교회의 지향에 응답하며 ‘바오로 해’를 맞아 유충희 신부(원주교구 백운본당 주임)의 ‘바오로 서간 해설’을 연재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정신과 영성을 깊이 알고 그를 본받고 싶어하는 신자, 바오로 서간을 처음 접하는 예비신자 등에게 이번 지상 강의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머리말

그리스도교에서 사도 바오로만큼 널리 알려진 인물도 없다. 그리스도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탈바꿈시킨 인물이 바로 사도 바오로이기 때문이다.

바오로의 생애와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바오로에 관한 사료들을 살펴야 한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사료는 그가 손수 쓴 편지들이다. 신약성경에는 그 서두에 바오로의 이름이 언급된 편지 13개가 있다. 신약학계에서는 테살로니카 전서, 갈라티아서, 고린토전 후서, 필리피서, 필레몬서, 로마서 등 일곱 개를 바오로가 친히 쓴 친서로 간주한다. 그밖의 여섯 개의 편지인 테살로니카 후서, 콜로새서, 에페소서, 티모테오전 후서, 티토서는 바오로 사후 사도의 유산을 이어받고 보존하기 위해 그의 제자들이나 그를 존경하는 후학들이 바오로의 이름을 빌려 쓴 차명서간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바오로를 이해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사료는 사도행전이다. 특히 사도행전 9장과 13~28장에는 바오로의 회심과 행적이 집중적으로 기록돼 있다.

바오로는 친서에서 자신의 신상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도행전 필자는 나름대로 전해오던 단편 전승들을 모아 사도행전을 쓰면서 바오로의 생애를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했다.


출생연도

사도 바오로가 언제 출생했는지는 분명하게 밝힐 수 없고 다만 바오로의 나이를 가늠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성경구절들을 통하여 추정할 수 밖에 없다.

33년경 스테파노가 유다교 최고의회에서 예수를 증언했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바오로는 돌로 때리는 사람들이 벗어놓은 겉옷을 맡아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사도7, 58).

그리고 55년경 바오로는 에페소 감옥에서 필레몬에게 편지를 써 보내며 자신을 늙은이로 소개했다. “사랑 때문에 오히려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필레 1, 9).

바오로의 나이를 짐작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보는 이 두 구절뿐인데 젊은이와 늙은이의 기준이 모호하다. 다만 학자들은 당시 쉰 살이면 노인으로 불렸기 때문에 바오로가 33년경에는 20대 중반, 55년경에는 50대였을 것으로 추정하며 바오로의 출생연도를 기원후 5~10년으로 본다. 아무튼 바오로는 예수보다 몇 살 연하였을 것이다.


출생지

바오로가 로마의 킬리키아 속주의 수도인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하다.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것을 세 차례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사도 9, 11; 21, 39 ; 22, 3). 특히 바오로가 제3차 선교여행(53~58년)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성전에서 체포된 후 천인대장 앞에서 변호한 사도행전 21장 39절을 보면 타르수스가 로마 제국 안에서도 매우 유명한 도시였던 것 같다. “나는 유다 사람으로 킬리키아의 저 유명한 도시 타르수스의 시민이오”(사도21, 39).

타르수스는 지중해로 흐르는 치드누스강 양편에 자리잡은 도시로서 지중해에서 직선거리로 약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휴양지였다.

히에로니무스(347~419년) 성인은 자신이 쓴 ‘유명한 사람들의 전기’에서 바오로의 부모는 본디 나자렛 북쪽에 위치한 갈릴래아의 한 도시인 기스칼라(기샬라) 지역에 살다가 로마인들에 의해 추방되어 타르수스로 이주한 후 율법공부를 위해서 바오로를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가말리엘의 학교에 입학시켰다고 주장하나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 유충희 신부는?

1955년 강원도 원주 출생인 유충희(대철 베드로) 신부는 독일 상트 게오르겐 대학을 졸업하고 1991년 사제품을 받았다. 원주교구 원동본당 보좌, 문박본당 주임, 구곡본당 주임을 거쳐 미국 LA 벤츄라 한인본당 및 강원도 횡성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사목했다. 연세대학교 신학과(학사),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석사), 서강대학교 종교학과(박사)에서 수학했으며, 현재 원주교구 백운본당 주임신부로 사목 중이다.
http://www.catholictimes.org/news/news_view.cath?seq=40655
 
[''바오로 서간'' 해설] 2.독실한 유다교 집안의 로마 시민
 
바오로의 이름, 가족, 결혼

이름

바오로의 이름을 가톨릭에서는 ‘바오로’라 하고, 개신교에서는 ‘바울’이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에 쓰인 대로 바오로의 이름을 표기하면 ‘파울로스’가 된다(갈라 1, 1; 1코린 1, 1; 로마 1, 1).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7, 58~13, 7에서는 ‘사울’이라고 하다가 13, 9에서는 ‘사울’ 일명 ‘바오로’라고 동일시 한 다음, 13, 13~28, 25에서는 ‘바오로’라고만 한다. 그런가하면 사도행전에 세 번에 걸쳐 소개되는 바오로의 회심체험(9, 1~19; 22, 3~21; 26, 9~18)에는 그를 일컬어 ‘사울’이라고 부른다.

사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 최초로 왕을 지낸 사람이다. 당시 이스라엘과 그리스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은 흔히 이중의 이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사도 바오로 역시 이스라엘 문화권과 그리스 문화권에 살았기 때문에 히브리식 이름인 ‘사울’과 그리스식 이름인 ‘바오로’라는 두 가지 이름을 지녔던 것이다.

우리는 바오로와 같은 경우를 신약성경 안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도행전 15장 37절에 나오는 마르코(그리스식 이름)라고 하는 요한(히브리식 이름)이나 사도행전 15, 22의 바르사빠스(그리스식 이름)라고 하는 유다(히브리식 이름)가 있다.

사도행전 13장 9절 이후에 나오는 바오로의 이름이 그 이전에는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된 것은 사도행전의 필자가 유다인들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히브리식 이름을 이방인을 위한 선교를 위해서는 그리스식 이름을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바오로의 이름을 두고 교회에서 ‘사울’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기 전에 지녔던 이름이고 ‘바오로’는 예수님을 만나서 회심한 후 얻은 이름이라고 가르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아전인수 격인 해석에 불과하다
.


가족

바오로는 가족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지만 자신이 쓴 편지 몇 군데에서 언급한 출신배경을 보면 독실한 유다인 정통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유다인의 종교 풍습(레위 12, 3)에 따라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으로서 벤야민 지파에 속했다고 한다(갈라 1, 13~14; 필리 3, 5~6; 2코린 11, 22; 로마 11, 1).

특히 바오로가 이방도시인 타르수스 출신으로 어려서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힐렐율사의 손자로 당대 최고의 율사였던 가말리엘 아래서 율법공부를 했다는 점을 볼 때(사도 22, 3; 26, 4), 그의 부모가 얼마나 독실한 유다교 신자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사도행전에 보면 바오로의 부모가 유다인 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기 때문에 바오로는 태생 로마시민이었다는 사실이다(사도 16, 37~38; 22, 25~29; 23, 27).

당시 약 5천만 명쯤 되는 로마 제국의 백성들 가운데 로마 시민은 50만 명에 불과했다. 즉, 100명중 1명이 로마시민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바오로가 태생 로마 시민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부모가 매우 높은 수준의 부와 명망을 누렸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결혼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을 집필하면서 “혼자 사는 이들과 과부들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나처럼 그냥 지내는 것이 좋습니다”(1코린 7, 8)라고 말한다.

이 말만 보면 바오로는 이 편지를 쓸 때 ‘홀몸’이었음이 분명한데, 이는 결혼하지 않았다는 말일 수도 있고 결혼했지만 상처했다는 말일 수도 있다.

또한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9장 5절에 보면 “우리는 다른 사도들이나 주님의 형제들이나 케파처럼 신자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라며 반문하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을 보면 바오로는 아내가 있었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서 아내를 두고 다녔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7장 24절에 보면 바오로가 “형제여러분, 저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상태대로 하느님과 함께 지내십시오”라는 충고를 코린토 교회에 한다.

이 말은 바오로가 원래 결혼을 한했거나 아니면 상처를 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바오로가 원래 결혼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결혼했지만 상처했는지를 밝히기란 매우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로서의 역할을 했을 때는 ‘홀몸’이었다는 사실이다.

유충희 신부〈원주교구 백운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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