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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성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8-10-07 조회수1,412 추천수1 신고
+ 찬미예수님
 
성 예로니모(Jerome, AD 347- 419)


뛰어난 성서학자이며 수덕가로서 서방교회의 4대 교부(암브로시오,아우구스티노,그레고리오,예로니모)중 한 명인 예로니모 성인은 347년 현재의 유고슬라비아(북부 이탈리아라고도 함)인 달마시아의 스티리도니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로마에 가서 수사학과 치체로 등의 라틴고전문학을 배웠고 19세때 리베리오 교황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의 트리어 지방에서 관리로 일하다 아리우스 이단논쟁으로 트리어에서 귀양살이(335~337)하던 아타나시우스 성인에 의해 소개된 동방교회의 수도생활에 매료되어 일생을 하느님을 위해 봉헌하기로 결심했다.


373년 친구와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열병에 걸려 친구는 죽고 자신은 회복되어 안티오키아에 머물며 성서주석방법과 그리스어를 배운 예로니모는 이때의 체험으로 성서연구를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과거에 예로니모는 성서를 로마제일의 변호사로서 뛰어난 문체를 자랑하던 치체로의 작품과 비교하여 조잡한 문장에 의한 보잘 것 없는 저서로 여기고 있었다.


그후 그는 안티오키아 동편에 있는 칼치스 사막에서 3년동안 은수자 생활을 하면서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완벽하게 습득한 후 성서주해 연구에 나섰다. 그러나 은수자들 사이에서 아리우스 이단으로 대립하는 상황이 오자 379년 안티오키아로 가서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콘스탄티노플로 가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였던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의 강의를 듣고 오리제네스 성서주석에 심취해 이때부터 오리제네스 저서들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예로니모는 382년 교황 다마소 1세의 초청으로 로마로와 3년간 교황비서로 봉직하면서 교황으로부터 라틴어성서번역을 의뢰받았다. 이에 수년간의 노력 끝에 유명한 불가따 성서번역본을 완성했다.


고령이던 교황의 뒤를 이어 후계자로 예정되었던 예로니모는 엄격한 수덕가로서 해이한 생활을 하던 성직자들을 비난하여 동료 성직자들로부터 신임을 얻지못하고 교황 서거후 적대자들의 비난이 심해지자 로마를 떠나 386년 여름부터 420년 선종할때까지 베들레헴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저술과 번역활동에 몰두했다.

 

저술과 번역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38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현지 총대주교 나치안츠 그레고리오의 강의를 듣고서였다. 예로니모는 이때 오리제네스 성서 주석 방법에 빠져들었고 오리제네스의 저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성서 번역을 접하게 된 것은 382년 다마소 1세 교황 비서로 임명된 후 신 구약 성서의 라틴어 번역 임무를 맡게 되면서였다.

 

번역 작업과 병행해서 상류층 미망인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수도 생활에 대한 이상을 교육시켰던 그는 이에 대한 적대자들의 의심과 비난에 부닥쳐 본의 아니게 로마를 떠나 386년 베들레헴에 정착했고 이때부터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예로니모는 이로부터 34년동안 수도원에 머무르며 막대한 양의 저술 번역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 후반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예로니모에게 있어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4복음서와 바오로의 편지들, 시편의 라틴어본 사본 제작, 「헬비디우스를 반박하며」 등의 이단 반박서, 호교론 등의 저술들이 이뤄진 것도 이때였다.

 

예로니모는 한편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열렬했었다. 이전의 어느 교부도 그만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명확하게 표현한 적이 없다고 전해질 정도인데, 그런 말처럼 그는 교회를 위해 싸웠고 교회에 적대적 입장을 보이는 자들은 원수처럼 여겼다. 일례로 오리제네스의 추종자였음에도 오리제네스 이단 논쟁이 일자 반대 입장에 서서 교회를 수호했고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서신 연락을 통해 당시 교회의 큰 골치거리였던 펠라지우스 이단을 없애는데 힘을 모았다.

 

학자들은 그의 성서 번역 연구와 관련, 「성서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서의 무류성을 역설했다」고 밝히면서 성서 본문 연구와 주석에 예로니모가 그처럼 주력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예로니모는 격한 성격과 신랄한 비평, 빨리 화를 내는 한편 빨리 후회하는 성격이었고 다른 사람의 결점보다 자신의 결점에 더욱 더 가혹했다고 하는데, 한 교황은 돌로 가슴을 치는 예로니모의 초상화를 두고 「만일 그 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교회는 결코 성인으로 추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라틴 교부들 중 가장 박학했으며 동 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학자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예로니모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예로니모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일찍이 안 사람은 없었다』라는 평을 받았다. 또 현대의 한 신학자는 『예로니모는 이전이나 그와 동시대 사람 가운데는 아무도 그 일에 적격인 사람이 없었으며 예로니모 이후 몇세기 동안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데 적격이었을 뿐이었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늘 성서를 읽으십시오. 아니 당신 손에서 성서가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편지」 52, 7). 『성서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서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서가 그대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서를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서가 그대를 감싸줄 것입니다. … 그리하여 그대의 혀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것들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편지」 130, 20).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이사야서 주해」서문 1, 2).

 

 

불가따 성서 (불가따 : "대중적"이란 뜻)


그러나 무엇보다 예로니모는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과 같다"(이사야 주해서 서문)는 자신의 말에서 보듯 성서학자였고 그의 불가따본 성서번역본은 교회에 공헌한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이다.


2세기 중엽부터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성서는 4세기 말경에 이르러 라틴어 필사본들이 양산되자 그 순수성의 훼손이 심각할 정도였다. 그러자 라틴 교회 안에서 사용되고있던 성서의 개정 필요성이 대두됐고 이를 맡은 것이 고대교회에서 가장 뛰어난 성서학자 예로니모 성인이었다.


구약성서의 경우 처음에는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에서 번역하던 예로니모는 성서의 순수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구약성서는 히브리어 원문에서, 신약성서는 그리스어에서 직접 번역하게 된다.


예로니모는 382년 교황 다마소 1세의 명을 받은 이후 복음서는 384년에, 신약 전체는 386년에, 구약은 404년에 완성했다.


예로니모가 번역한 라틴어 성서에 불가따(Vulgata)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13세기 경이었는데 원문에 충실하고 정확할 뿐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라틴어로 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트리엔트공의회에서 인수페르(Insuper)라는 칙령을 통해 교회 공식성서로 선언했다.


신앙의 순수성을 위해 원천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예로니모의 원칙은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요구되는 덕목일 것이다. 죄가 되는지 안 되는 지만을 따지기 보다 그리스도의 삶에 얼마나 합당한 것인지를 먼저 찾는 일이 더 중하고 그 잣대의 기준은 성서에 있다고 할 것이다.


예로니모가 '신학교의 주보' 또는 '수덕생활의 주보'로 모셔진 것은 교회 가르침과 교회생활의 기본은 성서라는 것을 표현해주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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