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에로니모 성인에 대해 | 카테고리 | 성경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평화방송의 미사전례를 함께바치며... |1| | |||
작성자노성수 | 작성일2008-10-07 | 조회수1,416 | 추천수1 | 신고 |
+ 찬미예수님
성 예로니모(Jerome, AD 347- 419)
저술과 번역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38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현지 총대주교 나치안츠 그레고리오의 강의를 듣고서였다. 예로니모는 이때 오리제네스 성서 주석 방법에 빠져들었고 오리제네스의 저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성서 번역을 접하게 된 것은 382년 다마소 1세 교황 비서로 임명된 후 신 구약 성서의 라틴어 번역 임무를 맡게 되면서였다.
번역 작업과 병행해서 상류층 미망인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고 수도 생활에 대한 이상을 교육시켰던 그는 이에 대한 적대자들의 의심과 비난에 부닥쳐 본의 아니게 로마를 떠나 386년 베들레헴에 정착했고 이때부터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예로니모는 이로부터 34년동안 수도원에 머무르며 막대한 양의 저술 번역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의 생애 후반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예로니모에게 있어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4복음서와 바오로의 편지들, 시편의 라틴어본 사본 제작, 「헬비디우스를 반박하며」 등의 이단 반박서, 호교론 등의 저술들이 이뤄진 것도 이때였다.
예로니모는 한편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열렬했었다. 이전의 어느 교부도 그만큼 교회에 대한 사랑을 명확하게 표현한 적이 없다고 전해질 정도인데, 그런 말처럼 그는 교회를 위해 싸웠고 교회에 적대적 입장을 보이는 자들은 원수처럼 여겼다. 일례로 오리제네스의 추종자였음에도 오리제네스 이단 논쟁이 일자 반대 입장에 서서 교회를 수호했고 히포의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서신 연락을 통해 당시 교회의 큰 골치거리였던 펠라지우스 이단을 없애는데 힘을 모았다.
학자들은 그의 성서 번역 연구와 관련, 「성서를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성서의 무류성을 역설했다」고 밝히면서 성서 본문 연구와 주석에 예로니모가 그처럼 주력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풀이하고 있다.
예로니모는 격한 성격과 신랄한 비평, 빨리 화를 내는 한편 빨리 후회하는 성격이었고 다른 사람의 결점보다 자신의 결점에 더욱 더 가혹했다고 하는데, 한 교황은 돌로 가슴을 치는 예로니모의 초상화를 두고 「만일 그 돌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교회는 결코 성인으로 추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라틴 교부들 중 가장 박학했으며 동 시대인들 중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 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학자였던 것으로 평가되는 예로니모는 성 아우구스티누스로부터 『예로니모가 무엇을 모르는가를 일찍이 안 사람은 없었다』라는 평을 받았다. 또 현대의 한 신학자는 『예로니모는 이전이나 그와 동시대 사람 가운데는 아무도 그 일에 적격인 사람이 없었으며 예로니모 이후 몇세기 동안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데 적격이었을 뿐이었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늘 성서를 읽으십시오. 아니 당신 손에서 성서가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편지」 52, 7). 『성서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그대를 사랑할 것입니다. 성서를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성서가 그대를 보호해 줄 것입니다. 성서를 흠모하십시오. 그러면 성서가 그대를 감싸줄 것입니다. … 그리하여 그대의 혀는 그리스도 외에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것들이 아니라면 아예 입에 올리지도 않을 것입니다』(「편지」 130, 20). 『성서를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이사야서 주해」서문 1, 2).
불가따 성서 (불가따 : "대중적"이란 뜻)
[가톨릭신문, 2001년 7월 22일]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