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창세기 - 바벨탑부분 질문입니다. | 카테고리 | 성경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재혼을 하려는데.. |4| | |||||||
작성자송두석 | 작성일2008-10-31 | 조회수696 | 추천수5 | 신고 | ||||
저 또한 성경을 읽으며 문의하신 내용에 대해 궁금한 적이 있었는데 신부님 강론 말씀과 그동안 성경공부하며 묵상을 통해 제 나름대로 생각하게 된 내용을 나눔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봅니다.
1.바벨 탑을 쌓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먼저 다음 성경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창세기 11장 4절).
위 성경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바벨 탑을 쌓은 이유가 세가지인데, 첫째는 하늘 끝까지 도달하겠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해서 자기들의 이름을 드날리자는 것이었고 셋째는 그렇게 해서 높은 탑(인본주의)을 중심으로 해서 흩어지지 않고 뭉쳐서 인간들끼리 잘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첫째로 인간이 탑을 아무리 높이 쌓아도 하늘 끝까지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즉, 그러한 노력은 헛수고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늘 끝까지 탑을 쌓아 도달하고자 했던 욕망(무한대에의 도전)을 영적으로 살펴보면 인간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겠다는 인본주의적 의도가 외적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즉, 하늘 끝까지 도달하고자 바벨탑을 쌓은 내적인 동기는 스스로의 행위와 노력으로 하늘(무한)의 신비를 깨달아 알고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인본주의적 욕망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 끝----> 무한대(소) 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 자신의 신비를 계시(revelation)해 주실 때 우리가 은혜로 알게 되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로 값없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지(강생의 신비), 우리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무엇인가 노력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하느님의 구원은총을 노력의 댓가인 품삯으로 비하시키는 것인데, 구원은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보물로서 어떠한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노력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지게질해서 품삯받겠다는 일꾼의 발상인 것이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받은 사람의 발상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감사함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사랑하게 됩니다. 이는 노역이 아닌 기쁨인 것이고 또한 평강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며(행위가 아님)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탈출기 22장 25절에 중요한 말씀이 있는데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정을 대서 돌을 다듬으면 안된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에 도달할 수 없음과 하느님께서는 우리 자신 그대로(가식없이) 하느님 앞에 나아오기를 바라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돌은 자연적인 것이고 벽돌은 인위적인 것임. 돌은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고 벽돌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더해서 가공한 것임) 그러나 바벨 탑을 쌓기 위해(하느님의 신비와 구원의 쟁취를 위해), 그들은 다음과 같이 성경에서 아야기 하듯이 인위적인 노력을 가했습니다.(창세기 11장 3절 말씀 다음과 같이 인용함)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즉, 자연적인 돌대신 벽돌을 빚고 구워내었고, 진흙대신 역청을 써서 차곡 차곡 쌓아올려서(가식과 행위를 통하여) 하늘 끝까지 도달(구원을 스스로 쟁취)하겠다고 시도한 것입니다.(영적인 해석임) 이미 설명드린 대로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셔야만 우리가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가 행한 선행의 결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그러나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사람에게서는 선행이 나오게 됨) 위에 설명드린 영적인 원리에 근거해서 비추어 보면, 도달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에 이르고자 벽돌을 쌓는 헛된 노력을 중지시키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바벨탑을 허무심으로써 무위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설령 하느님이 무너뜨리지 않아도 그러한 노력으로 하늘 끝까지 벽돌(행위,가식적 선행이나 노력)을 쌓아서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그런 헛된 노력을 하지 못하게 자비로이 바벨 탑을 무너뜨리신 은혜로우신 하느님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그렇게 쓸 데 없는 짓을 해서 자기들의 이름을 드날려보려고 그런 식으로 바벨탑을 쌓아 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손으로 쌓은 모든 것은 무너질 것으로되 오직 하느님께서 베푸신 것(은총, 그리스도, 생명나무, 영생)만 영원한 것입니다. 하느님 한 분만이 영원하시고 그러한 하느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될 때 우리는 감사하게도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름을 드날리고자 하는 모든 전시적인 노럭과 과시욕은 구원받은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세속적인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것이며, 세속적이면 세속적일 수록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세번째로 자기들끼리 자기 마음대로 원하는 장소에서 뭉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이야기 하듯이 하느님께서 경계를 정해 주시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펼쳐주시는 환경과 상황(시간과 장소)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코헬렛 3장, 사도행전 17장26절 참조) . 우리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면서 만일 자기 맘대로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맘껏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은총을 충만하게 받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맘대로 내가 살 수 있다면 내가 주인이지 주님이 주인이 되실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2.설령 바벨탑을 쌓는 잘못을 했기로서니 언어를 혼란하게 하시어 말이 통하지 않게 하시고 온 세상에 흩어버리신 것은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 바벨 탑을 쌓는 불경으로 인해 오늘 날 이와 같이 언어가 분화되어 우리가 고생하고 있는 것에대해 어떤 면에서는 하느님께 원망스러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 언어를 공부하고 지금도 사용하며 사는 사람인데, 옛날에 단어 외우고 문법 공부하면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인과관계로 해석하여 언어가 분화되는 징벌(바벨 탑을 쌓은 불경에 대한 징벌)을 하느님께서 내리셨다 라고 해석하기 보다 쓸 데 없는 노력과 언어문자적 지식(인본주의적 지식)을 통해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저는 해석합니다.(순전히 개인적인 견해임) 즉, 쓸 데 없는 지식(하느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력을 의지하여 지식을 찾는 것)으로 하느님을 추구하는 노력을 해보았자 허상의 하느님(상상의 하느님 또는 마음 속의 우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지요.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이 하느님이신 것이지 우리 마음 속에 상상으로 빚어내거나 잘못된 지식을 통해 정립된 하느님은 우상인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불립문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리를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언어문자를 넘어서 살아있는 말씀이 될 때 레마가 되어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레마는 언어문자를 뛰어넘어 살아있는 말씀으로서 성경의 말씀이 레마로 들릴 때 비로소 우리가 성경을 하느님의 온전하신 뜻 안에서 깨달아 알게 됩니다. 거짓없고 숨김없고 가식없이, 이 모습 이대로 겸손되이 하느님 앞에 나아와 하느님을 경배하고자 할 때 하느님께서 그러한 사람에게 성경의 언어문자의 이면에 있는 하느님의 뜻을 알려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하느님과 가까워진다고 생각해서 벽돌(선행)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느님(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벽돌을 쌓아서 하늘 끝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헛된 노력을 무위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벽돌을 쌓은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경신례 차원에서 한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이름을 날려보려고 헛된 과시욕에서 쌓은 것이므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할 때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개인적 영광을 위해서 어떠한 행위를 할 때 필시 우리 마음에는 한가닥 불안이 있을 것입니다.
제가 위의 글에서 지식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자 노력해도 알 수 없고 선행을 통해 구원을 이루고자 해도 이룰 수 없다 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우리가 지식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자 한다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지적인 능력에 의존하여 하느님을 우리의 지식에 가두는(제한하는) 오류를 범하고 그 다음에 하느님에게서 오는 계시(공적계시인 성경)를 떠나 자신의 지식(편견, 고정관념)에 의존함에 따라 하느님을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능력및 지식을 우상으로 섬기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신앙하는 것이지 우리의 잘못된 지식을 신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알고자 노력할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심전력으로 하느님을 알고자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노력과 지식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에 기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은총이란 어느 날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계시하시어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주심으로 우리가 성경과 하느님을 깨달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노력으로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은혜로 스스로를 알려주시면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래서 계시종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자 노력할 때. 그러한 노력의 동기가 다만 자신의 지적욕구의 충족이나 자기만족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출발이므로 하느님께서는 스스로를 계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알고자 겸손되이 우리의 모든 지식과 편견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의탁하고 은총을 구할 때 우리의 가난해진 심령에 하느님(성령)께서 선물(그리스도,생명)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방향이 하느님을 향해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추악한 자아의 자기만족을 향해 있는지에 따라 우리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선물(은총, 성령)로 채워지느냐 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더욱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공로를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믿는 이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선행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은총은 선물로 주어진 것인데 우리가 응답하여 받을 것인가 아니면 자유의지로 거부할 것인가의 선택이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조차도 주님께서 은총으로 역사하시면 우리는 다만 감사하게 은총(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고 그리하여 하느님께로 향한 감사의 찬미가를 부르게 됩니다. 이러한 선물을 받은 사람의 내면(심령)에는 성령께서 생명으로 살아계심으로 그 사람에게서 선행이 나오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행하게 되는 선행조차도 은총(성령)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께서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전기한 내용은 그동안 신부님 강론및 개인적 성경공부를 통해 알게된 것인데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제가 쓴 내용이 틀린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제가 위에 사용한 구원은 완성된 구원이 아닌 시작되는 구원(정확하게는 구속되어 의화 성화의 상태에 있으나 영화 이전 단계)을 의미함을 밝혀둡니다. 이하 질문 내옹임. ///////////////////////////////////// 창세기 읽기모임을 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왔습니다. 바벨탑부분의 배경지식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잘 모르다 보니... 성서만 읽어보면 아래 질문에 답하기 어렵네요.. ======================== 바벨 탑 부분에 사람들은 별로 나쁜의도가 있어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