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에 나타나는 물과 관련된 다섯(5)가지 사건들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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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두석 | 작성일2008-11-03 | 조회수469 | 추천수2 | 신고 | ||||||||||||||||||||
이는 제가 성경및 교리서를 공부하며 알게된 내용인데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구약에 나타나는 물과 관련된
다섯(5)가지 사건들에 대해 주님의 은혜로 주일 아침에 여러 교형자매님들과 나눔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적어 봅니다.(노아의 홍수/홍해바다를 건넘/ 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뀜/바위에서 솟는 물/요르단 강을 건넘)
1.노아의 홍수 사건.
베드로 1서 3장 20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및 교리서 1219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노아의 홍수는 세례를 예표합니다.
설명드리자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물 밑에 처한 옛사람(죄악된 자아)은 마치 노아홍수 때에 물 밑에서 심판으로
죽음을 당한 사람들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같이 죽게 됨을 영적으로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교리서에서 다음과 같이 세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삯인 사망이 이루어지고 해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는 순간 죄인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영적으로 죽기 때문에 세례받기 전의 원죄와 본죄에 대한 죄사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죄의 삯인 사망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임. 그래서 우리는 바로 이것을 믿어야 하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공로로 흘리신 피로 죄사함이 이루어져, 레위기의 말씀. " 피가 그 생명으로 속죄한다." 라는 말씀이 성취되어 그리스도의 성혈로 죄사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죄에 대한 해방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여 죄인이 죽음으로써 죄에 대해서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계시를 통해 이와 같은 영적인 진리를 풀어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교리서 1220 :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일치함을 의미한다.
즉, 세례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일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노아의 홍수심판은 결국 세례를 의미하는 데, 세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하고,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일차하는 것이라고 교리서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주님께서도 십자가 대속이 바로 주님이 받게될 세례라고 복음서에서 마르코복음 10장 38절에서 39절 말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위의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면 주님께서 앞으로 받게 될 십자가 수난이 바로 세례인데, 그러한 세례를 믿는 우리도 받게되고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 죽음에 동참하여 주님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내용들을 계시를 통해 깨달아 알게 된 바오로 사도께서 로마서와 갈라티아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삽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므로로,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바오로 사도 안에서 살아 계시는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례성사는 놀라운 성사인 것이며. 이렇게 놀라운 세례성사를 위해 노아의 홍수사건이 구약에서 예표로 일어난 것이라고 성경과 교리서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2.홍해바다를 건넌 사건.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사건과 탈출기의 홍해바다을 건넌 사건은 공히 세례를 예표합니다.
교리서에 보시면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으므로 홍해를 건넌 사건도 세례를 예표합니다.
교리서 1221 : 특히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참으로 해방된 것은 세례로 이루어지는 해방(죄와 사탄의 사망권세에서의 해방)을 예고한다.
그러면 노아의 홍수와 홍해바다를 건넌 사건에 있어서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공통점은 물 밑에 처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물 밑에 처하게 되는 데 이때 하느님의 전능하심으로 영적으로는 우리의 죄악된 자아(옛사람, 죄인)이 심판으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으로 새로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받은 우리 안에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새생명으로 살아있는 것이며 그리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냥 자녀가 아니고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녀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벅찬 기쁨입니까?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찬미합니다.
세례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일치하는 것임을 바오로 사도께서 로마서 6장에서 다음과 같이계시를 통해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홍해바다를 건넌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세례를 통해 살아나고 해방된 것임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계십니다.(코린토 1서 10장)
참고로, 위 성경말씀에 나오는 구름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구름기둥을 말하는데, 구름기둥(밤에는 불기둥으로 변함)은 성령을 예표합니다. 즉 교회(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를 인도하는 성령(구름기둥)과 같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기둥이 인도하였던 것입니다.(교리서에도 구름이 성령 예표로 나옴)
3.마라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뀜 (탈출기 15장 25절)
탈출기 15장 22절에서 27절까지 보시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사흘길을 걷는 동안 물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내 마라에 도착하여 연못의 물을 먹으려 하였으나 도저히 써서 먹을 수가 없자 모세에게 불평을 합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무 하나(유일하신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징)를 보여주시어 모세가 나무를 물에 던지자 물이 달아져서 마실 수 있는 물이 됩니다. 이는 영적으로는 우리가 세례받은 후에 우리의 삶에 십자가를 적용(죄에 대해 죽은 사람같이 성화된 삶을 성령의 인도로 살아감을 상징)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에 항상 쓴 물이 나오도록 하느님께서 섭리하신다 라는 말씀입니다. 다시말해 세상적으로 죄인들과 같이 탐욕에 의해 죄악된 삶을 살면
내면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을 통해 항상 죄책감(양심의 가책)을 심어주심으로써 삶이 쓰디 쓰고 영적갈증으로 인해 내면에 평강이 없는 삶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삶에 적용하여 죄에 대해 회개하고(고백성사를 보고),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단 물을 솟게 하시어 삶에 기쁨과 소망과 평화가 있도록 섭리하신다는 말씀으로 영적으로 해석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위의 체험을 여러차례에 걸쳐서 했거나 아니면 앞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부지불식간에 욕심에 치우쳐 잘못을 범하면 내면에 하느님의 음성이 이러한 죄에 대해 알게 하십니다. 회개하기 전까지는 계속 쓴 물이 나오게 섭리하시어 인생이 공허해지고 힘들고 평강이 없게 만드십니다. 이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믿는 이에게 성령께서 양심을 활성화시키시어(베드로 사도께서 말씀하시듯이) 일어나는 영적인 현상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뒤로 하고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살게 되면 반드시 쓴 물을 맛보게 섭리하십니다. 오직 주님을 향하여 십자가가 우리의 내면의 죄악된 본성을 죽일 때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생명으로 함께 하시어 기쁨과 평화가 샘솟도록(쓴 물이 단 물이 되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삶이 바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삶이 되고, 그러한 삶에 주님께서 축복을 부어주시고 물질적인 필요까지 더하여 주신다고 복음서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따라가서 혹여 물질적인 성공을 얻더라도 그러한 성공에는 내면의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가면(하느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기쁨과 평강이 있고 나아가서 세상사는데 필요한 공급 또한 주님께서 보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영적인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온 우주의 주인이시므로 그 분의 전능하심으로 성경말씀이 이루어지도록(성취되도록) 섭리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이는 의심해서는 안되는 진리입니다.
4.바위에서 솟는 물(탈출기 17장 6절과 민수기 20장 8절)
바위에서 솟는 물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데, 우리의 영적갈증을 해갈시켜 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써 바오로 사도께서 코린토 1서 10장 2절에서 다음과 같이 계시를 통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바위에서 솟는 물을 주시어 갈증을 면하게 해주시었는데, 이러한 바위에서 솟는 물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되심을 예표한다고 바오로 사도께서 밝히고 계시는 것입니다.
상기한 성경말씀에 특기할 내용이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라는 표현입니다. 바위가 일정한 장소에 있는 고정물이 아니라 살아서 따라오는 바위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탈촐기 17장과 민수기 20장에 두번에 걸쳐 바위에서 물이 솟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해갈시켜 주시는데, 이는 각기 다른 시점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탙출기 17장의 사건은 호렙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출애굽한 첫 해에 있었던 일이지만, 민수기 20장에서 므리바에서 있었던 사건은 지리적으로도 다른 장소이며 시기적으로도 미리암이 죽고 난 다음에 40년 광야생활이 거의 끝나가는 종반기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바위가 살아서 이스라엘을 따라다녔다고 서신서에 표현하시며 바로 그 바위가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계시를 통해 하느님께서 바오로 사도에게 그렇게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하신 것입니다.
바위에서 솟는 물, 즉 샘물은 항상 성경에서 생명을 상징합니다. 참고로 주님께서 요한복음에 보시면 우물가에 물길러 온 여인에게 그리스도께서 바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구세주)이시며 우리 안에 생명강수를 솟게 하시는
분이시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요한복음 4장 14절)
물에는 바닷물이 있고 샘물 또는 강물(요르단강수)이 있는데 바닷물은 죽음을 상징하고 샘물이나 강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경과 교리서에 나옵니다. 다음과 같이 교리서를 인용합니다.
교리서 1220 : 샘물이 생명을 상징하는 반면 바닷물은 죽음을 상징한다.
5.요르단강을 건넘(새생명으로거듭남을 상징함).
먼저 교리서를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교리서 1223 : 끝으로 요르단 강을 건너는 일에서 세례가 예표되었다. 요르단 강을 건넘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된 땅을 선물로 받는데, 이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다. 이 복된 상속의 약속을 새 계약(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안에서 성취된다.
여호수아기를 자세히 읽어보시면 모세가 죽고 난 다음에 여호수아의 인솔 하에 요르단 강을 건넘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하느님 나라 예표)에 하느님의 도움으로 입성하게 됩니다.
요르단 강을 건너는 것으로 예표된 구약의 사건은 영적으로는 거듭남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기에 보시면
12지파가 각기 돌을 요르단 강 한 가운데에 가져다가 묻고(죄악된 자아가 성화되어 없어지는 것을 상징), 마찬가지로 강바닥에서 돌을 캐서 자기들이 묵는 곳에 세웁니다(주님의 부활생명, 즉 성령이 우리의 삶 안에서 항상 같이 하시고 중심이 되심을 상징).
요르단 강을 건너는 사건을 자세히 기술한 여호수아기 4장 말씀을 보시면 특기할 만한 기술 순서가 발견되는데
4장 3절에 보시면 주님(하느님)께서 명령하시기를 강바닥에 있는 돌 열두개를 메고 건너오라고 말씀하시고 그래서
말씀하신 대로 돌을 메고 나와서 그들이 묵는 곳에 내려놓았다고 나오는데 이어지는 9절 말씀에는 요르단 강 한복판에 돌 열두개를 세워 놓았다고 나옵니다.
이는 순서적으로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는데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함으로써 우리가 은총지위에 머물러야만 성화가 일어나, 나중에 요르단 강을 건너게 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약속된 가나안 땅을 얻는 것으로 예표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먼저 홍해를 건너서 40년간의 광야생활의 연단을 통해 옛사람(민수기에 나오는 20세 이상의 옛사람)이 다 죽고 새사람(여호수아및 칼렙 +새생명) 만이 가나안 땅으로 예표된 하느님 나라에 입성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이는 세례를 받고 성령의 성화은층으로 우리의 죄악된 자아가 처리되어 거룩하게 변화되면 마지막 단계인 영화, 즉 주님 재림시에 불멸의 몸을 받고 하느님 나라에 입성하는 것을 상징함)
즉 먼저 새생명을 주시는 성령께서 성화로 역사하시면 우리의 죄악된 자아가 나중에 죽어 강바닥에 뭍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기에 열두개의 돌(각 각 옛사람과 새사람을 상징함)이 나오는데 강에서 나온 것은 새생명을 의미하고 강에다 놓고 나온 것은 죄악된 자아(옛사람)를 상징합니다. 순서적으로 요르단 강바닥에서 가지고 나오는 돌(세례시에 우리가 받는 새생명을 상징)이 8절에 먼저 언급되고 이어서 나중에 9절에 강바닥에 놓고 나오는 돌(성화가 완성되어 없어지는 죄의 본성)이 나중에 언급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느님의 전능하심으로 우리에게는 신비로이 성령께서 생명으로 임하시어 점차로 우리를 거룩하게 성화시키시고 은총지위에 머물게 하시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처리하심으로(죄로 기우는 사욕편정을 처리하시어) 우리를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으로 만드신다는 내용을 영적으로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먼저 세례(홍해바다를 건넘)를 통해 하느님의 생명(성령)이 임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우리가 연단을 받게되어(탈출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40년 광야생활을 통해 성령하느님의 연단을 받는 것으로 구약에 예표됨), 종국에는 요르단 강(거듭 남, 성화의 완성을 상징함)을 건넘으로써 약속의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입성(영화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주님 재림하신 후 영화로운 불멸의 몸을 입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공동상속받는 것으로 기술됨).
결론
위의 다섯가지 사건은 영적으로 보면 세례받은 신자에게 성사생활하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홍해바다는 세례성사를 상징합니다. 이 때 영적으로는 우리의 죄악된 자아가 죽게됩니다.
마라의 쓴 물은 세례받은 후에도 죄악된 삶을 살게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심령에서 죄책감으로 쓴 물이 나오게 섭리하심을 상징합니다. 이때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용하여 죄악된 본성을 죽이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심령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게 하느님께서 섭리하십니다.
바위에서 솟는 물은 우리의 영적갈증에 대해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생명강수가 되시어 갈증을 해갈시켜 주심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모든 영적인 궁금증은 그리스도께로 향해 여쭈어볼 때 성경을 통해 성령의 조명으로 알게 섭리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성령을 의지하여 은총지위에 머무르며 성화된 삶을 사는 이는
요르단 강(견진으로 성령세례를 받아 성령이 충만한 삶을 살고 영화단계에 은혜로 이르게 됨)을 건너가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과 홍해바다를 건너는 사건에서는 공히 물 밑에 처한 죄인들과 애굽의 병거에 있던 군사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즉, 세례성사에는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는 옛사람(죄악된 자아)가 있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바위에서 솟는 물과 요르단 강을 건넘에 있어서는 죽음(죽는 사람)이 없고
오직 생명강수를 마시고 생명강수를 건너는 일들만 있습니다. 생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즉,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뜻은 세례성사를 받고난 신자들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주님으로부터(성경봉독을 통해 성령으로부터) 생명의 말씀으로 먹고 마시며 살아갈 때 마지막 때에 주님 재림시에 영화로운 몸을 받고 의화/성화/영화가 완성됨으로써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후기:
저는 몇일 전에 주님의 은혜로 성경 8독을 끝낸 사람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는 성경이 말도 안되는 설화이거나 이스라엘의 과장된 역사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주님의 은혜가 있어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고 주님의 은혜로 성경의 저자는 바로 하느님(성령)이시며 구약의 내용과 예표, 상징, 사건들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치밀한 영적인 논리에 의해 성령께서 40여명의 서로 다른 명목상의 저자들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남겨두신 하느님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수신인은 성경을 읽는 우리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영적 상태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잔인한 하느님이 되시고 야속한 하느님이 되시고 말도 안되는 하느님도 되시고...................................................................................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가 있을 때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어 성경에 니타나는 하느님의 모든 섭리는 바로
구원을 위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오직 그러한 이유로 주님께서는 강생하시어 십자가에서 그 모진 수난을 당하시고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다만 감사함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한 분이신 삼위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바칩니다.
제가 쓴 내용은 대부분 성경과 교리서에 근거하였으나 만일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제가
쓴 내용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잘못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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