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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용어 : 초성 생명 , 초성 은혜 |
영복이란 오늘날 잘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나 영벌과는 반대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천국의 끝없는 행복이다. 그리고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인간의 생명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 세상의 마지막 날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됨을 의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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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復活 |
라틴어 |
Resurrectio Christi |
영어 |
Resurrection of Chris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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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죽더라도 그 죽음을 넘어서 부분적으로나마 살아남는다는 통념과 "나 자신도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우리의 염원이다. 종교인들이나 철학가들은, 육신과 영원을 구별하는 이원론적인 인간학에 따라, 인간의 장래에 있어서 흙으로 돌아갈 육신은 땅에 묻히지만 영혼은 불멸하다고 가르쳐 왔다. 그리고 성교회는 인간의 사후생명에 대하여 반신반의하는 인류 앞에서 "하느님께서는 나자렛 출신 예수란 분을 부활시키셨다는 기막힌 소식, 즉 예수께서 몸을 포함해서 온전한 인간으로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고 또 선포하고 있다. 사실 이 교리는 인간의 갈망을 채워주기보다는 오히려 현대인들을 당황케 만든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부활하신 순간부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진면목이 드러났으며, 인간의 본성 및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새로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이 부활이 그들 신앙의 원천이며 핵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교리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고 …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1고린 15:1719).
1. 예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 : 부활교리를 이해하려면 우선 신약성서에 산재해 있는 초기 교회의 신앙고백문들을 살펴보는 길밖에 없다. 바울로 사도가 서간들을 작성하기 전에 이미 교회는 유태인들과 외교인들을 상대로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고(로마 1:34, 8:11, 10:9, 갈라 1:1, 1데살 1:10, 사도 17:3031) 설명할 때(1고린 15, 로마 6:111), 또는 전례를 거행하는 도중에 찬송가를 부를 때(필립 2:611, 1디모 3:16, 베드 3:1822)에 고정된 용어로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고 이었다. 부활하신 예수께 대한 체험을 겪은 첫 증인들(증인들의 명단 1고린 15:58)은 구약성서에서 발췌된 귀절들(특히 2사무 7:1214, 이사 53:112, 시편 2, 12, 110)을 재해석하면서 독특한 표현들을 선택하였다. 예를들면, '일어났다'는 동사(1데살 4:14, 로마 1:34, 사도 2:24 · 32)나 죽음에서 '깨어났다'는 동사(1고린 15:4 · 1214, 2고린 5:15, 로마 4:25)는 이미 사무엘 후서 7:1214에 나온 말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대당적(對當的)인 표현(고린 5:5, 로마 6:9, 4:10, 1데살 5:14)은 신명기 32:39(또는 2:6, 2열왕 10:7)에서 이미 사용되었던 용어다. 또한 '올림을 받았다'는 표현(필립 2:9, 요한 8:28, 사도 2:33, 5:31)은 다니엘서 7:13과 이사야서 52:13에서 이미 나왔다. 요약해서 말하면,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살아계신다"는 신비는 처음부터 서로 보완하는 두 개념, 즉 '부활'과 '현양'으로 표현되었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충실한 의인(義人)을 일으켜 주시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보다 나은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뜻이며, 현양은 묵시문학적 의미에 따라 비하 상태와 대조적인 '의인의 높임'을 말하고 있다.
나자렛 출신 예수의 지상생활을 전해 주는 복음서에 의하면,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마르 1:15) 당신 자신에 대한 신앙을 요구하셨고(마르 5:34, 9:23, 10:52) 당신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구현되리라고 주장하셨다(마르 4:1-34). 또한 그분은 하느님의 권리를 되찾으셨고(마르 11:17-18)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부르시며(마르 14:36) 부자관계를 주장하셨다. 유태교의 장상들을 당황케 하는 전례없는 주장과 해방을 기다리던 대중들의 기대에 어긋나는 활동 때문에 예수께서는 죽음을 대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유태교의 장상들이, 그분을 하느님께 대한 모독자라고 단죄하며(마르 2:7, 요한 19:7) 로마제국의 힘을 빌어 사형에 처하였다. 결국 예수께서는 십자가 형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시고 묻히셨다(마르 15:44-46).
그러나 예수께서 처형되신 지 며칠 뒤에 그분의 제자들이 나서서, "살아 있는 자들의 하느님께서는(마르 12:27) 당신의 성신을 통해서(로마 1:3-4, 8:11)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예수를 위해'(사도 2:3236) 몸소 개입하시어 그 분을 살리셨다"고 주장하였다(사도 4:20). 이 개입으로써 "예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1고린 15:20, 로마 6:4·9, 7:4, 1데살 1:10, 갈라 1:1, 골로 2:12, 에페 1:20)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충실한 증인이신 예수께 존재와 생명을 되돌려 주심으로써 죽음에 대한 주권을 드러내시며 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 증인을 회복시키시고 복권시키셨는데(1디모 3:16), 이는 증언의 타당성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증인을 인격적으로, 즉 몸을 비롯하여 인간 전체를 보다 나은 상태로 옮겨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한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단원론적인 성서의 인간학(人間學)뿐 이니라, 현대 인간학의 요구에 따라 몸이 곧 인간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이원론적인 인간학에서도 육신과 관계없는 영혼이란 있을 수 없고, 또한 영혼이 없는 육신도 있을 수 없다(영혼불멸의 교리는 죽은 뒤에 영혼이 독립된 존재로 존재한다는 뜻보다는 현세와 후세의 연관성을 뜻한다). 그러나 부활하신 인간 예수께서는 이제 생리학적인 생기(生氣)로 사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인 성신의 힘으로 살아 계신다(로마 8:11, 1고린 15:45).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우리의 현세계로 돌아오는 단순한 귀환도 아니며 더구나 소생도 아니다. 그분은 새로운 형태로, 새 차원에서 물질계와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간들을 되찾아 주셨다(마태 28:20). 바울로 사도는 믿는 이들의 부활문제를 언급할 때마다(1데살 4:13-18, 1고린 15:1-58) 부활한 몸의 실재성과 동시에 몸의 변화를 강조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죽음에서 벗어나신 동시에 높임을 받으시고 하늘에 올라가셨다"(필립 2:9, 사도 2:33, 5:31, 로마 10:6-9, 에페 4:8-10)는 명제도 의미가 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위하여 개입하신 것은, 예수의 주장과 죽음의 상황을 가만해 볼 때, 그분이 처음부터 하느님과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말해 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한낱 인간에 불과한 존재로서 하느님의 아들 신분을 자칭하던 모독자를 살리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말과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는 상징적인 표현들은, 실제로 예수의 신성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과 공동으로 소유하시는 이 유일한 신성을 부자관계를 통해서 누리신다. 초기 교회는 예수의 신성을 고백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국한되었던 주님이란 존칭을 예수께 그대로 적용하였다(1고린 1:2-3, 2고린 1:2, 1데살 1:1). 유태계 출신의 예루살렘 초대 신자들은, 시편 110:2에 따라 예수를 '마레' 즉 주님이라고 불렀다. '마라나타'('주여, 오소서' 또는 '주님이 오신다'는 뜻)라는 전례용어는 고린토 전서 16:22와 묵시록 22:20(디다 10:6 참조)에 전수되었다. 그리고 그리스 언어권 출신의 예루살렘 신자들이 사용하던 '주님이신 예수'란 표현은, 그들의 첫 신앙고백문이라고 할 수 있다(1고린 12:3, 로마 10:9, 필립 2:11). 요약해서 말하면, 하느님의 아드님은 신성에 따라 영원토록 계시고, 인간이 되신 순간부터는 신성과 인간성에 따라 살으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죽음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던 인간성을 부활을 통해서 되찾으셨기에 이제 두 본성에 따라 한 주체로 살아계신다. 신성과 인간성을 같은 차원에서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아드님은 두 양상으로 사신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잠시 인간으로서 사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활은 항구적인 몸되심(인간화)을 말한다. 삼위일체에 관한 교리뿐 아니라 아드님의 인간화의 신비까지도 부활 신비에서 연역되었다. 아드님의 인성은 신비를 계시해 주는 수단이었고, 부활하신 몸은 계시의 내용을 보장해 준다(사도 13:33, 로마 1:4).
2. 부활 신비에 접근하는 길, 증인 등의 체험 : "예수께서 죽음을 넘어서 살아 계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예수의 죽음으로 실망하던 제자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태도를 바꾸어 예수의 부활을 용감하게 선포했는데, 이는 어떤 획기적인 사건이 없는 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사태이다. 만일 그들이 살아 계신 예수를 체험하지 않았다면 감히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체험한 부활이 역사성을 띤 사건인가. 우선 역사성이란 말은, 우리 인간 세계에 속해있는 사건을 두고 쓰는 말이다. 그런데 부활은 현세와 후세 사이에 위치하는 사건이며 후세에 가서 인간이 누릴 상태를 말하고 있으니만큼 이런 의미에서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없다(곧 초자연적 사건이다). 또한 역사성이란, 현대 사학이 요구하는 바와 같이 문헌에 입각하여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을 뜻하는데 - 부활에 대한 선포활동은 역사적인 사건일지라도 - 이런 의미에서도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볼 때, 부활은 실재성 있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또 다른 한편, 부활은 하느님이 개입하시는 행위이며 예수께서 천상세계에 계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부활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부활의 성격을 살리는 태도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세상에 개입하실 때 항상 표징을 남겨 주신다. 표징이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하느님을 향하여 시선을 돌리게 하는 구체적인 사실이나 사물이다. 예수의 부활과 관련된 표징들을 본다면, 빈 무덤의 발견, 예수의 발현, 예수를 거부하던 유태인들의 회개와 입교(入敎), 성령의 활동에 뒤따르는 기적들 등을 들 수 있다. 이 모든 표징들을 수렴하여 종합 분석해 보면, 이 표징들은 자연과학자들이 요구하는 증거가 못 된다. 이 표징들은 무시할 수 없는 근거는 되지만 다만 신앙에 의해 해석해야 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하느님의 행위인 부활은 역사를 초월하긴 하지만 우리 인간 세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행위가 아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표징들이 다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행위에 접근하는 데는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이란 예수의 부활을 믿는 행위로서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 곧 은총이다. 예수를 부활시킨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을 통해서(사도2:3334) 우리가 믿도록 하신다. 이 점에서 볼 때 사도들의 입장과 오늘의 우리 입장은 같다. 그리고 신앙이란 믿을 내용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죽음을 넘어서 살아 계신다"는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로 부활에 대한 증인들의 체험에서 나왔다. 사도들의 체험과 증언은 신앙의 내용을 밝히는 데 있어서 필수요건이다. 이 체험은 주로 예수의 발현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체험은 표징에 불과하다. 둘째로는 지상에 계실 때 예수께서 남기신 언행 역시 필수적인 것이다(요한 2:22, 루가 24:44, 마르 16:7과 14:28). 예수께서는 죽으시기 전에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 부르셨고 당신의 훗날을 아버지께 맡기셨으니, 이로써 부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의 언행을 전수하는 첫 증인들의 역할도 결정적인 요건이다(사도 1:2122). 셋째로 구약성서도 부활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예수와 사도들의 해석에 따라, 구약성서가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사실과 그 방법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루가 24:27, 44, 1고린 15:34 '성서에 따라'). 그래서 초대 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성서를 골고루 인용하였다.
복음사가들은 복음서를 끝맺으면서 부활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부활에 대한 첫 증인들의 체험, 즉 빈 무덤 이야기와 예수의 발현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바울로의 체험담(1고린 15:8, 필립 3:12, 갈라 1:15)을 제외하고는 제자들의 체험이 비교적 늦게 기록된 셈이다. 초기교회가 빈 무덤의 발견 사실을 알면서도(사도 2:25-32, 13:35-37) 강조하지 않았고, 나아가 예수의 발현 내용보다도 사도들의 증언에 역점을 두었다. 바로 그 때문에 증인들의 명단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베드로와 11제자 1고린 15:5, 마르 16:17, 루가 24:34-36, 요한 20:19-20, 21:2, 예수의 형제와 사도들 1고린 15:7, 루가 24:18, 여자들 마르 16:1, 마태 28:9-10, 요한 20:1).
무덤이 열려 있고 비어 있었다는 전승은 여자들과 베드로가 예수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간단한 점검으로 끝났다.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증명한다고 결론짓는 일은 금물이지만, 이는 부활의 신비를 암시해 주는 표징이라고 볼 수 있다. 나중에 천사의 입을 빌어 교회의 신앙고백문을 첨가하고 난 뒤에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유태인들과의 논쟁이 심해지자 호교론적(護敎論的)인 요소도 다시 첨가되었다(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치지 못했다 마태 27:62-66, 28:11-15, 요한 20:6-7, 마리아가 예수를 동산지기와 혼동하지 않았다 요한 20:15-16). 마지막으로 마태오 복음사가는 신학적 요소까지 상술하였다(마태 28:2-4). 발현의 시기와 장소 문제를 제쳐놓고서 그 내용상 확인의 발현과 파견의 발현 이야기만 보아도 예수 발현에 관한 전승들은 다양하다. 그러나 이 전승들의 공통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증인들이 하나같이 예수를 봤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예수께서 증인들에게 보이셨다"(1고린 15:5-7, 루가 24:34, 사도 13:31, 디모 3:16). 그 외에 '본다'를 뜻하는 여러 동사가 많이 사용되어 있다(루가 24:24, 요한 20:14, 마르 16:11). '본다'는 말은 성서적인 표현이며(출애 3:2, 루가 1:11, 마르 9:4, 마태 17:9), 이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실제적이고도 불가시적인 천상 세계에 속해 있는 인물이나 사물을 시각으로 인지하는 행위를 뜻한다. 다시 말해서 이 감각은 환상도 아니고 환각도 아니다. 그러나 증인들이 살아 계신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신 신앙과 예수께서 지상에서 하시던 말씀 없이는, 인간으로서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발현은 표징이다.
3. 부활의 결과, 새 생활 : 신약성서를 훑어보면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 계신다"고 선포하고 고백하는 초기 교회의 최초의 신앙고백문을 발견할 수 있다. 각 복음서들의 뒷부분에서 복음사가들은 부활교리를 소개하면서 첫 증인들이 어떻게 부활 신비에 접근했는지에 대하여 그들의 체험을 묘사해 주었다. 예수의 지상생활을 전수하는 복음서를 비롯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대전제하에 기록된 신약성서 전체는 한마디로 말해서 부활의 효과를 부연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최종적인 계시가 이루어졌고 아울러 하느님을 모시는 신앙생활도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이 되신 아드님이신 예수를 부활시키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해서 부활을 믿게 하셨으니(1고린 12:3, 요한 15:26) 이제 부활은 우리 신앙의 원천이며 그 대상이다. 인간이 이러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하느님께 신앙으로 응답하고 있기 때문에, 죄와 온갖 악에서 인간을 구제하는 구원도 이루어졌다. 죄의 육체를 취하시고(로마 8:3) 죄인이 아니신 데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신'(2고린 5:21) 아드님이 십자가 위에서는 아버지의 용서를 드러내셨고, 부활을 통해서는 우리 구원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셨다. 아버지께서는 죄인들이 빼앗아 간 생명을 아드님께 되돌려 주심으로써 아드님을 통해서 죄인들을 살리시는 의도를 밝히셨다(로마 5:8-11). 구원은 단지 죄의 용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아빠', 아버지를 부르는 성령의 현존(로마 8:15, 갈라 4:6)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으로써 완성된다. 변함없는 계획에 따라 인간들을 창조하시고 살리시는 생명의 하느님께서는 부활하신 몸을 화해와 생명의 매개체로 삼으시고(로마 7:4) 인간으로서 부활하신 아드님을 통해서 인간들이 누릴 영복을 보장해 주신다(로마 8:17-30, 1고린 2:6-16, 에페 2:4-10). 예수께서는 많은 형제들의 맏아들이시고(로마 8:29),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맏물이시다(골로 1:18, 사도 26:23, 묵시 1:5). 이로써 구원이 온 인류에게 확대되었다(사도 15:7-11).
신앙생활은 부활한 생활이며(에페 2:6, 골로 3:1) 몸의 부활을 향하는 생활이다(로마 8:11, 요한 5:29). 지금 그분을 믿는 이들은 온갖 좋은 일을 행하여 열매를 맺으며(골로 1:10),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닮아 가면서(갈라 2:20) 죄의 죽음에서 일어나(에페 5:14) 영생을 향하고 있다(로마 5:21, 14:9, 2고린 5:15, 요한 6:40-48). 신앙생활은 부활하신 예수의 몸에서 솟아났고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고(1고린 10:16-17)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생활이다(1고린 12:12-27). 왜냐하면 부활하신 몸, 성체이신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오늘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산다(마태 26:26, 1고린 11:24-29). 성령께서 빵과 포도주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시기 때문에 오늘날도 그리스도께서 인간들과 물질세계를 떠나지 않고 깊은 관계를 유지하신다. 이 깊은 관계는 몸의 부활로써 완성된다(로마 8:11, 1데살 4:14, 1고린 6:14, 15:12-22, 2고린 4:14). 그때에야 인간 전체 - 육신을 포함해서 - 는 하느님의 것이 되고 구원이 완성될 것이다(로마 8:23, 2고린 5:2-5).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다"(필립 2:11). (文世華)
[참고문헌] Supplement au Dictionnaire de la Bible, Resurrection, 1982 / Ch. Duquoc, Christologie, Cerf, 1974 / W. Kasper, Jesus der Christus, MatthiasGrunewald Verlag, 1974 / Urs von Balthasar, Paques le Mystere, Cerf, 1972 / Les 4 Fleuves, Dieu l'a ressuscite d'entre les Morts, Beauchesne 1982 / F.X. Durwell, La Resurrection du Christ, X. Mappus, 1950 / M.J. Nicolas, Theologie de la Resurrection, Desclee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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