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례와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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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신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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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밤(부활성야)에 구원의 신비에 감추어진 모든 이야기를 집중시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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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말과 상징의 언어를 총동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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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성야의 예절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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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빛의 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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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말씀의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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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성세 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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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성찬의 전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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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예식에는 불 축성과 초 준비가 있다. 이 모든 예식은 밤에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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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밤이 시작되기 전에 시작하지 말고 날이 밝기 전에 마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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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밤은 오랜 관습에 따라 주님을 기억하는 밤이고, 루카복음(12, 35)의 권유에 따라 등불을 밝혀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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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기다리는 충성스런 종처럼 깨어 준비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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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축성은 고대 로마 전례에는 없었다. 아마도 프랑크 지역의 이교적인 봄맞이 불로 잡신에게 풍년과 다수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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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하던 관습에서 나왔을 것이다. 빛은 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신의 선물이었고 이스라엘 백성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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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훼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생각하였으며 그리스도인들도 촛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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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자신을 소모하여 빛과 따스함을 준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에 빛과 사랑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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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축성하여 부활 초에 붙이는 것도 자신을 봉헌하는 빛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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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초는 초기부터 로마와 기타 지역에서 부활 성야를 밝히는 데 사용하였다. 이 초는 스스로의 빛을 통하여 죽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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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서 부활한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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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사람 키만한 두 개의 초를 사용했었다. 빛의 예식은 부활 초의 품위와 상징을 표면에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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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표시는 그리스도를, 알파와 오메가는 시작과 마침 또는 영원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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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의 연수는 인간의 시간 생활을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 속에 연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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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개의 붉은 향덩이는 예수님의 다섯군데 상처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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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광명" 을 노래하며 촛불을 붙여 행렬함은 그리스도의 말씀 자체를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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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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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의미는 구약성서에서 이집트를 탈출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밤길을 비추는 횃불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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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몸소 밤길을 비추며 앞서 가신다. 그분은 죄악의 어둠을 몰아내는 불기둥이시다. 그분은 죄악의 어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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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내는 불기둥이시다. 신자들이 촛불을 들고 뒤따를 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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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찬송은 밤과 빛의 대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하느님과 세상과 만남, 승리자로서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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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세상에 파견된 빛이신 그리스도를 묘사한다. 세상이 구세주를 주범으로 판결하고 진리와 사랑을 사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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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했지만 부활을 통하여 빛이 승리를 거둔다. 부활 찬송은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기쁨의 노래이며 부활 예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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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점이다. "... 영원한 대왕의 광채 너를 비춘다. 비춰진 땅아, 모두 깨달으라. 세상 어둠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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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성수 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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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도교는 부활주일에 세례를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준비가 되면 언제라도 예비자에게 세례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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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성세수를 사용하는데 부활 성야에는 성세 준비자들이 없더라도 성세수를 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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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낙원과 풍요를 연상시킨다. 또한 생명체의 시작도 물에서 비롯된다(창 1, 1-2;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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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모든 생명이 바다에 있었듯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태아도 바닷물 같은 양수에서 자라게 하시고, 영세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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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적 탄생 역시 물에서 시작하신다. 성세수는 부활 초를 세 번 물에 담가 축성한다. 셋이란 수는 완전을 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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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숫자로 사용된다. 물은 세탁, 풍요, 소생, 생동의 힘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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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을 때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은총의 샘물이 흐른다. 세상의 값진 원천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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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축성 때에 부활 초를 물에 담그는 것은 하늘과 땅이 상징적으로 결합하는 뜻이다. 태양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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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운 면모를 이미 체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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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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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동안 보류했던 알렐루야를 오늘 밤 다시 노래한다. 힘을 다하여 아름답고 즐겁게 하느님을 찬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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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찬송, 부활 성가, 알렐루야 등의 노래는 근본적으로 기쁨의 표현 이외에 별다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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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기쁨의 노래는 인간 이성의 벽을 뚫고 무아지경에 이르게 한다. 여러 성가 중에서 알렐루야가 가장 순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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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알렐루야란 원래 "하느님 야훼를 찬미하다"란 뜻이다. 그러나 이 밤 예절에서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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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뜻을 담고 있다. ''알렐루야''는 번역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자기 표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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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없고 기뻐 용약할 뿐이다. 사순절 동안 절제했던 대영광송과 종도 함께 즐거이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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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활주일의 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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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사건은 역사적으로 확실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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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사망일이 현재의 달력으로 어느 날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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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유다교의 해방절 주간 금요일이라고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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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음력으로 니산월(유다 면력으로 7월, 우리나라 3-4월에 해당) 14일을 빠스카 축일로 지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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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교회는 그 다음날인 일요일을 부활절로 경축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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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아 공의회(325년)에서는 춘분(3월 21일) 이후 만월이 되면서 맞는 첫주일을 부활축일로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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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들은 가장 신빙성있는 날짜로 예수의 사망일을 기원 후 30년 4월 7일이라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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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견을 그대로 믿는다면 30년 4월 9일 일요일이 예수 부활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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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4월 둘째 토요일이 지난 후 주일은 4월 9-15일 사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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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둘째 주일이라면 4월 8일-14일까지이니 이 중 하루를 부활주일로 고정시키면 어떠냐는 주장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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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을 고정시키면 매년 달라지는부활축일 때문에 겪는 혼란과 어려움도 없어지니 신자들의 생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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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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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 이후 부활 주일이 될 가능성은 3월 22일-4월 25일 사이의 5주간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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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매년 사순절의 시작과 부활, 승천, 성신 강림 축일이 우리 달력에서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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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헌장 부록에 보면 제2차·바티칸 공의회에서도 빠스카 축일을 일정한 주일로 고정시키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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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원의를 중요시하였다. 숙고한 결과 당시(1965년)두 가지 결론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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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공의회는 갈라진 형제들이 동의한다면 빠스카 축일을 일정한 축일로 정하는데 반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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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동시에 국가적으로 영구 달력을 도입하려는 시도를 반대하지도 않는다. 물론 주일을 포함한 7일로 구성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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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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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을 고정시키는 문제로 프로테스탄트 교파와 합의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이미 마르틴 루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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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시기의 변동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였다. 그래서 이동 축일들을 그네처럼 왕복한다고 보아 ''그네 축일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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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렀다. 난관은 동방 교회에 있다. 1923년 이스탄불에서 열린 범그리스 정교회 총회에서 부활축일의 고정을 하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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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시켰으나 현행 그레고리오력에 맞추기를 원치 않았다. 1965년에는 부활축일을 4월 둘째 토요일 다음 일요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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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에서도 각 교회들의 전반적인 찬성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1975년 나이로비에서 개최된 세계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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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일치 위원회의 노력도 허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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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가톨릭 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인 ''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 20항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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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 축일을 지내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바라는 합의에 도달할 때까지는 잠정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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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지방이나 같은 나라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나마 같은 날에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총주교들과 그 지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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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들에게 맡기는 바이니, 관계자들끼리 의논해서 주일 부활축일을 지내는데에 만장일치로 합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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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갈라진 교회 가운데 동방교회 특히 그리스 정교회가 찬성하지 않고 있다.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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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하게 앞당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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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원의 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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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표징은 무엇이가? 예수께서는 돌아가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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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만에''란 표현은 하느님이 예수를 부활케 하셨다는 뜻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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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이 구제받도록 몸소 개입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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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이는 구원의 역사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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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을 뵈었소''(요한 20,25)란 체험은 신앙에 입각한 ''뵈옴''임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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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부활 수 40일 중 ''여러날 동안''(사도 13,31)발현하셨다. 발현은 사건을 구체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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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발현하신 분은 확실히 나자렛 예수이며 사도들은 그분을 보고 만지고 그리고 그분과 함께 음식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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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민중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목격하였으나 부활 후의 발현은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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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은 스스로 선택한 증인들에게만 발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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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역사적인 사실 묘사가 거의 불가능하다. 역사적 사건이란 다의적이고 애매한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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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검증되지 않은 사건과 관련된 말들은 증명이라기 보다 표지나 표징 또는 징표하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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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예수님의 삶의 표징은 ''말씀''을 통해서만 살아 계시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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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먹고 마실 수 있는 ''빵''으로서 실재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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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수께서는 성사라고 일컫는 표징을 통하여 살아 계신다. 특히 신자들은 세계로써 예수의 죽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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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참여하고 새 생명에로 다시 태어나며, 성체성사를 통하여 살아계신 분과 빠스카 잔치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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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교회는 빵과 포도주로 표시되는 예수님과 공동유대를 갖는 생활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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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사람들의 희생적인 봉사와 사랑 가운데 살아 계신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무수한 사람들이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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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 죽음보다 강한 사랑, 정의구현에 대한 희망은 사람이추구하는 원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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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정적인 답은 종말에 가서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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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답을 앞당겨 현실화하였으며 교회의 전례와 표징을 통하여 인간이 동경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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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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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죽음의 세계와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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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이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요, 사도 바오로의 외침이다. 얼어붙은 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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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어 깨우는 봄의 소리일 수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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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이란 글자 그대로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좀 더 엄밀한 뜻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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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점인 부활은 봄의 노래나 꾸며낸 환상이 아니다. 더욱이 고대동방 종교에 정해진 신화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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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하느님만이 우주의 주인, 모든 생명과 죽음의 유일한 본체이심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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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자연과 역사의 신앙 속에서도 약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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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이 일제의 속국이 되어 수탈을 당했던 것처럼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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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결사적으로 파라오의 폭정과 탄압을 벗어나 홍해 바다를 건너 자유와 해방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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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시대의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려다가 잡혀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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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믿는 신자들은 육체의 죽음이란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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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계를 위한 부단한 탈출과 여정, 이것이 바로 부활이다. 우리는 지금 죽음의 세계속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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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과 불의, 이기주의, 권력, 금력, 학력 등의 노예가 된 상태이다. 이제 부활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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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고 죽음에서 일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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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의 권고(에페 5, 6-20참조)처럼 허황된 이론에 속지 말고 선과 진실과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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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세계로 탈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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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신자들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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