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마태오복음 20장 1-16절)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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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두석 | 작성일2009-06-30 | 조회수3,651 | 추천수6 | 신고 |
아침부터 온종일 일한 사람과 오후 다섯 시쯤부터 겨우 한시간 일한 사람들 모두에게
노동시간에 관계없이 똑같은 품삯인 한 데나리온(하루 품삯)을 지불하는
포도밭 주인의 처사가 공평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 세상의 시각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에는 포도밭 주인(하느님 예표)은 선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맘대로 불공평하게 품삯을 주는 부당한 주인으로 보이기 때문에 하루 종일
일한 사람 입장에서는 억울함을 느끼게 됩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도 한시간 일한
사람과 같은 품삯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복음서에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비유들이 있는데, 이러한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시각으로 바라 볼 수 있도록 성령의 빛 비추심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의 시각과 하느님의 시각의 중요한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적어봅니다.
1.포도밭에서 온종일 고생한 사람이 불행한가? 아니면 시장바닥에서 누군가가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온종일 서서 기다린 사람이 불행한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서 일용할 양식 값조차 벌지
못하고 초조하게 불러줄 사람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시장바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구원을 갈망한 사람)이 비록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더라도 훨씬 더 고생했다
고 보시는 것입니다.
---->다행히 아침 일찍부터 부름을 받아서 기쁜 마음으로 포도밭에서 일한 사람은
오히려 행복한 사람이여야 함에도(불러주시는 하느님에 달려 있는 것이지 그 사람의 공로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님), 오히려 시기와 질투로 나중에 부름을 받은 사람에 대해 우월한 태도를 보이며 받기로 된 것(한 데나리온, 하느님 나라 예표))보다 더 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해대는 사람은 구원받음에 대한 감사함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심은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 중에 구원받을 공로를 세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게 불러주셔서 우리는 구원받고 감사함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바로 아들의 태도이며 이러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공동으로 상속받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품꾼의 태도를 지녀서 항상 보상을 생각하며 행위를 억지로 지어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구원의 감사함이 아닌 노역자의 수고스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봉사는 하느님께 열납되지 못합니다.
믿는 이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감사함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지 않고
앞으로 얻게 될 보상을 생각하며 지게질 하듯이 노역으로 수고하는 자는 아직 구원의 문턱을 넘지 못한 것입니다.(그래서 주님께서는 복음서에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모두 주님 안에 불러들이셔서 짐(죄짐을 의미함)을 내려놓고 편히 쉬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 안에 평화와 안식, 기쁨이 없다면 아직까지 우리의 신앙이 주님 안에 자리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앙으로 봉사하는 이에게는 봉사함이 노역이 아니라 다만 기쁨일 뿐입니다.)
2.하루 온종일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면, 한시간 일한 사람에게는 십분의 일 또는 팔분의 일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세상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와 같은 의문을 갖게되지만 하느님의 시각에서는 이미 위에서 설명드린대로, 포도밭에서 일하게 된 것이 오히려 시장바닥에서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것이므로 그 자체로 감사한 것이지 남과 비교하며 따지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그사람도 시장바닥에서 마음 졸이며 혹시라도 누가 안불러주나 기다리느라고 오히려 고생을 더 많이 한 것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영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똑 같은 한 데나리온, 즉 온전한 그리스도(영원한 생명, 하느님 나라)를 주는 것이지 누구에게는 반쪽짜리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우리의 연옥교리의 근거가 바로 온전한 구원을 위해 누구나 하느님이 원하시는 분량의 성화에 이르러야만 구원의 종착지인 영화(주님 재림시에 믿는 이가 받게 되는 불멸의 영화로운 몸)에 이르게 된다는 것임)
---->우리가 구원에 대해 잘못 이해하면 행위나 공로로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오해하는데, 구원은 우리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지 공로로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임.
다만, 구속(세례) 후에 성령의 상존은총으로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우리는 성화의 좁은 오솔길을 걷게 되는 것임. 이는 우리의 순종도 중요하지만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것이므로 구원은 순전히 하느님의 은총에 달린 것임.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 그 많은 전교사역을 하셨음에도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서신서에서 말씀하시는 것임.
3.온종일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만 주신 하느님이 덜 주신 것이 있는가?
----->하느님은 약속하신 한 데나리온(하느님 나라)을 주심으로써 말씀 그대로 신실하심을 보여주셨음에도 아직까지 세상적 시기와 질투및 비교 경쟁 보상심리 아래에서 남보다 더 받기를 원하는 그 사람의 심령에 주님께서 성령과 함께 임하시지 못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스스로의 생명을 내어 주시어 우리 죄인을 위한 구원을 베푸셨는데, 받기로 약정된 한 데나리온을 받았음에도 다른 사람보다 더 받아야된다는 그러한 탐욕은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된다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아직까지 죄악된 자아가 부서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설령 천국에 들어가도 그보다 나은 것을 원하게 되는 탐욕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 입성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연옥을 거쳐서 아마 꼴찌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본 비유에서 등장인물과 내용이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묵상해 보았습니다.
1)포도밭 주인: 하느님
2)한 데나리온 : 그리스도/영원한 생명/하느님 나라
3)포도밭 일꾼들 :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4)하루 종일 일한 일꾼 : 오래된 믿는 이들로서 전례적인 신자이면서 사랑이 없는 사람들,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여 남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적 행위에 집착하는 사람들. 스스로를 남보다 우월하게 보면서, 죽어서 천당에 가면 남들보다 상급을 크게 받는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첫째가 꼴지됨)
5)한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 받은 일꾼 :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을 받기도 하면서 곤고한 삶을 살다가 늦게서야 주님을 만나, 구원의 감사함과 기쁨으로 주님 안에서 안식하며 평화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 구원받은 감사함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봉사하게 되는 사람들(꼴찌가 첫째됨)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풍성하게 내렸다 라는 성경말씀이 있는 것임
6)다섯차례(아침일찍, 오전9시, 열두시, 세시. 다섯시)에 걸쳐 일꾼을 부르는 포도밭 주인
: 다섯은 책임의 숫자입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불러야 될 사람들은 모두 책임지고 부르신다는 영적인 의미로 다섯 차례에 걸쳐서 부르시는 것으로 비유에 나오는 것입니다.
7)일꾼을 부르는 주인 : 우리가 자원해서 일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주인이 불러줘야만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불러주시는 하느님께 달린 것이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추신:
1.루카복음에 보시면 유사한 비유가 나오는데, 바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루카복음 15장)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등장하는 "맏아들"이 바로 "온종일 일한 일꾼"과 같은 입장이고,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바로 "방탕한 작은 아들"과 같은 입장인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방탕한 생활을 한 작은 아들이 엄청난 고생을 한 것(죽었다 살아 돌아온 것)으로 보십니다.
반면에 맏아들은 동생이 창녀들과 놀아나며 재산을 탕진하며 재미를 본것으로 생각합니다. 창녀와 놀아나며 재산을 탕진하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는 불쌍한 것이며 실제로도 그러한 짓을 하는 사람의 심령에는 비참함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심정에 긍휼이 가득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원하시려 십자가를 지신 것이지요.
2.위 글에 한 데나리온을 그리스도(구원,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 것에 대해
참고가 되도록 교리서 내용을 인용합니다.
교리서에서 이야기 하듯이 하느님 나라, 그리스도, 구원, 영원한 생명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장소라기 보다는 상태인데, 믿는 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충만해져서, 믿는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 안에 순종하게 되어 하느님과 다른 뜻을 갖지 않게 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상태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기에 우리의 인식이나 언어문자로 표현해낼 길이 없다 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천국이란 도달하는 장소라기 보다 변화되는 상태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가 충만하여 그리스도화되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순종하며 사랑 그 자체가 되는 상태인 것이지요.
이상은 나눔 차원에서 묵상한 내용을 올려 보았습니다.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제가 쓴 글의 내용이 잘못된 것임을 미리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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