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고통 뒤에 숨겨진 은총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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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숙자 | 작성일2010-04-21 | 조회수396 | 추천수1 | 신고 |
고통 뒤에 숨겨진 은총(?)
''고통 뒤에 숨겨진 은총'' 이라는 주제를 보는 순간, 여기에 숨은 비밀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정으로 고통의 쓴맛을 보고, 그것이 나를 살리는 최고의 보약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공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통은 내 인생, 가치관,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없이는 깨달음도 없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해석하면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에게 고통이 없다면 하느님의 존재를 완전히 잊을 뿐만 아니라, 겸허한 마음을 갖지 못해 인류는 훨씬 더 빨리 멸망했을 것입니다.
고통을 피해 가려고만 하고, 요리조리 빠져 나가기만 하고 약삭빠르게 살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온갖 이익만을 얻으며 육신의 편안함만을 구하는 사람들은 참된 인생이 무엇인지,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열리지 않습니다.
물론 고통 뒤에 숨겨진 은총이라는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얼마나 가슴을 후벼 파듯이 아파했으며, 얼마나 몸부림을 치고 잠을 못이루고 눈물을 흘렸으며, 얼마나 지옥 속에 사는 것처럼 뼈가 녹고 살이 타는 듯 괴로워했을까요?
또 얼마나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 만큼 침과 피가 마르고, 분노와 증오로 누군가를 저주하고 죽이고 싶어하며, 원망과 한탄을 하고 가슴이 옥죄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했을까요?
누구든지 몸서리치도록 괴로운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싫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고통을 싫어하여 피해 갈 수만 있으면 피해 가려고 하고, 거부할 수만 있으면 거부하려고 하고, 외면할 수만 있으면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세상에 태어난 이상 고통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이 고해(苦海:고통의 바다)'' 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세상이 온갖 고통으로 가득 차 있어서 살아가는 동안 거의 예외 없이 고통을 당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때로는 생각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 고통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고苦''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통에서 빠져 나가려 해도 나갈 수 없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는 것이 모두 고苦이며 어느 것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苦'' 라 합니다. 또 ''원중회고(:미운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 없는 고통)''나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 ''구부득고, 그리고 사랑하는 자와 헤어져야만 하는 ''애별리고''와 욕을 채울 수 없는 ''오온성고'', 이 네 가지 고苦는 우리 인생에 항상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왜 이런 고통이 생기는 것일까요? 이것은 대부분 무지나 집착 때문에 오는 것이기에, 그 근원을 캐 보면 모두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이기심에서 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혀 예기치 못한 사고나 사건, 선천적 장애(육체적, 정신적), 불치병과 같은 온갖 질병, 기아와 가난, 더 나아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대부분 자신의 부족한 인식에서 오는 것이지만) 의인이었던 욥처럼 엄청난 불행의 비극이 찾아와 보통 사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이 생기기도 합니다(욥기참조).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고통이 우리를 피해 가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고통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아듣거나 납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극과 불행은 사람이 착하냐 악하냐와 상관없이 일어납니다. 누군가 자동차로 과속이나 추월을 하다가 사고가 일어날 때 상대방이 착하냐 악하냐를 판단하고 피하고 안 피하고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암에 걸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통의 이유를 정확히 모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이미 일어난 고통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입니다.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누구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시간도 필요하고 감정도 가라앉아야 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진심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것이 왜 은총인지 숨어 있는 비밀을 풀어낼 수 있습니다.
인간은 너무나 불행하게도 실존적 위기나 자기 상실을 할 만큼 절망이나 고통이 없으면, 스스로 변화를 꾀하거나 달라지지 않습니다.
고통이 극한에 달했을 때 일반적인 가치인 돈, 물질, 권력, 명예, 자리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 비본질적인 것임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한 것이나 소유하려고 하는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새로운 인생으로 완전히 바뀔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믿고 있던 믿음이 다 허물어지고 의지했던 대상이 사라져 완전히 밑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바닥을 치고 올라가기만 하면 고통이 고통이 아니라 은총임을 절감하는 극적인 변화가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영모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셧습니다. "석가가 6년 동안의 결사적인 고행 없이 위없는 깨달음(완전한 깨달음)을 깨닫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이미 고난 속에 있는 이는 고난을 감사하게 받아들여 깨달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고난에서 좀 멀리 있는 이는 석가처럼 고난을 끌어 당겨서라도 고난을 겪어 내야 내 정신이 자랄 수 있다.
석가 못지않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전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값진 고난을 겪으면서도 생각할 줄 몰랐다.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참선이다. 내가 스스로 생각을 높여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참되게 사는 길이다." <다석 유영모 명상록>.
닫힌 상자 속으로 빛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고통 속에서 닫힌 마음을 열면 빛이 들어오고, 인생이 배움의 터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삶은 진정한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다루는 고통수러운 삶의 교훈들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성장과 발전의 디딤돌로 삼지 않는다면 삶은 헛될 뿐입니다.
고통이 아무런 깨달음을 줄 수 없다면 남에 대한 원망, 한과 상처, 증오심, 복수심, 분노만 남아 자신을 인생의 희생자로 만들어, 마치 총구를 자신에게로 향하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고통을 당할 때마다 나 자신을 죽일 것이냐, 아니면 중요한 교훈을 얻어 영적으로 성장 진화할 것이냐는 전적으로 내가 선택할 몫입니다.
누구도 내 고통을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고스란히 내가 짊어져야 할 몫이기 때문에 아무리 무거워도, 감당하기 힘들어도 내가 져야 합니다.
고통이 아무리 크고 짐이 무거워도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는 물음을 통해 의미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내 의식의 지평은 넓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고통은 고통이 아니고 그 짐은 짐이 아닌 것이 됩니다. 고통을 통해 내 의식의 세계가 확장된다면 그만큼 성숙해지고 영적 완성을 향해서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온 목적은 딱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영적 진화입니다.
진화는 반드시 고통을 동반합니다. 인간이 고통을 통해 진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통 뒤에 숨겨진 은총일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고통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최고의 은총(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동준』 세례자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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