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삼위일체에 관한 일문일답--박준양 교수 신부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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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0-08-15 | 조회수865 | 추천수0 | |
◆ 삼위일체에 관한 일문일답
박준양 서울대교구 사제로 로마 교황청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교의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로 그리스도론, 성령론, 교회론, 은총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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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Q :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서열이나 등급이 있는 건 아닌가요? 그중 성부께서 가장 높으신 분 아닐까요? 성자와 성령께서 모두 성부로부터 생겨나셨다고 하고, 또 예수께서는 분명히 성부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마르 14,36)라고 부르시는데요?
A : 사실 이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가장 많이 받는 질문들 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결론부터 분명히 말씀드리면, 세 위격들 사이에는 그 어떠한 ‘우열’이나 ‘등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각기 독립적이고 고유한 세 위격들로 구분되지만, 모두 동일한 한 분 하느님으로서 같은 본성(本性, natura), 같은 본질(本質, essentia), 같은 실체(實體, substantia)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 위격은 동일한 신원(身元)과 동일한 능력(能力)을 지니게 됩니다. 구분되는 것이 있다면, 다만 ‘관계’로서 구별될 뿐입니다. 이 ‘관계’ 때문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호칭의 순서가 생겨날 뿐입니다.
그런데 이 호칭의 순서는 ‘우열적 등급’이 아닌 바로 ‘사랑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 사랑 안에서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출생하셨다면, 그리고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하신다면, 거기에 의존적이거나 종속적인 관계로 인한 등급의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우리 인간사에서처럼 말입니다. 보통 자식이 아버지에게 종속적이라는 것은 출생 이후 혼자서는 생존할 수도 없고 나중에 독립적으로 성장할 때까지 모든 면에서 부모에게 의존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이유에서 비롯되는 것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의 내적 관계에 대해서는 이런 인간적인 생각을 적용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 위격들 간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기에 출생을 통하여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그 모든 것을, 그리고 발출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에게 그 모든 것을, 즉 동일한 본질과 신원과 능력을 전달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차이로서 남는 것은 오로지 출생시키신 분과 출생하신 분, 그리고 발출시키신 분과 발출하신 분의 근원에 관한 관계뿐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세 위격은 오직 관계성에 의해서만 실제적으로 구별된다고 하는 것이며, 이 관계적 구별에서는 ‘우열적 순위’가 아닌 ‘호칭의 순서’가 드러날 뿐입니다.
<2> Q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세 위격 중 어느 분께 드리는 기도가 가장 효과가 있나요?
A : 특별히 어느 한 위격에게 드리는 기도가 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 삶의 현장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더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기도를 바치면 됩니다.
한 위격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바치는 기도라 할지라도, 이는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각 위격은 그 위격적 특성에 따라서 개별 활동을 하시지만, 동시에 이는 세 위격의 공동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모든 계획과 활동은 세 위격의 공동 작업이나 이를 각 위격의 속성에 따라 그 위격에 해당하는 개별 활동으로 간주하는 것을 신학적 용어로 ‘귀속’(歸屬)이라고 합니다. 물론, 명시적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기도와 흠숭은 매우 필요한 것으로 권고해야 할 것입니다.
<3> Q : 구약 성경에서도 삼위일체에 관하여 말하는 구절을 발견할 수가 있나요?
A : 사실 지금처럼 위격적 개념으로 정립된 삼위일체론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러 교부들은 구약의 몇몇 대목들이 삼위일체 신비를 가리키거나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예를 들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키실 때 쓰이는 “우리”라는 복수형 표현(창세 1,26; 3,22; 11,7 참조), 아브라함과 사라를 방문한 세 사람 이야기(창세 18,1-15 참조),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주님의 삼중 축복(민수 6,22-27 참조), 세라핌의 “거룩하시도다” 삼회찬미(이사 6,2-3 참조) 등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를 믿고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이 대목들을 삼위일체 신비와 연결시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986년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 12항에서는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하는 대목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여기서 창조주께서 스스로에 대해 사용하신 복수형 동사 ‘만들자’는 말은, 어떤 의미로 벌써 성삼의 신비를 넌지시 비추고 인간의 창조에 성삼께서 임재하셨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신비를 이미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이 말씀을 읽을 때는 그 안에서 그 신비의 흔적을 인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약 시대에는 ‘위격’개념이 아직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구약 성경만을 근거로 해서 본격적인 삼위일체 신학을 전개하기는 어렵지만, ‘신구약 성경의 일관성’이란 원리에서 본다면 구약을 신약과 연결시켜 삼위일체론적인 전망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16항에 다음과 같이 잘 나와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영감을 주신 분이시고 그 저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신약이 구약에 숨어 있고 신약으로 구약이 드러나도록 지혜롭게 마련하셨다. 그러므로 비록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지만, 구약 성경은 복음 선포에 온전히 수용되고, 신약 안에서 그 완전한 의미를 얻고 드러내며, 다른 한편으로 신약을 밝히고 설명해준다.”
<4> Q : 전례나 생활 안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상기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요?
A : 가장 대표적으로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 차례 혹은 수십 차례에 걸쳐서 긋게 되는 ‘성호경’을 들 수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성호경을 통해서 그 모든 기도가 시작되고 끝나지 않습니까? 이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효과적인 신앙고백이며 기도인 것입니다.
또 꼭 기도가 아니더라도, 큰일을 당했을 때나 혹은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청할 때 우리는 습관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성호경을 긋게 됩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도 이런 장면들이 가끔 나오지 않습니까? 그리고 전례 안에서도 역시 성호경이 사용됩니다.
미사의 맨 첫 부분이 바로 성호경으로 시작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미사 중에 가장 명시적으로 삼위일체 신앙이 고백되는 부분은 바로 모든 감사기도(제1양식에서 제4양식까지)의 맨 마지막에 나오는 ‘마침 영광송’,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모든 영예와 영광을 영원히 받으소서” 하는 기도문입니다.
이는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거룩한 생명에 참여하여 그 내적인 나눔의 신비에 일치하게 되고, 따라서 유한한 우리의 존재가 전능하신 하느님께 끝없는 찬미와 영예와 영광을 드리게 됨을 뜻합니다.
<5> Q : 개신교에서도 삼위일체 신비를 믿고 있나요?
A : 개신교는 16세기의 이른바 ‘종교개혁’을 통하여 가톨릭교회로부터 갈라져 나갔지만, 이미 그보다 훨씬 이전에 형성된 삼위일체 교리를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믿고 고백합니다. 다만 개신교의 흐름과 전통 속에서 그 신학적 해석이나 전례적 실천에 있어서는 가톨릭과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개신교에서는 바로 앞에서 설명된 ‘성호경’을 거의 사용하지 않습니다.
<6> Q : 주일학교 초등부 교사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삼각자, 혹은 세 잎 클로버를 예로 드는 것은 어떤가요?
A : 이는 잘못된 예시적 설명입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세 위격은 동일한 신적 본성과 실체를 지니되 관계를 통해서만 실제적으로 구별됩니다.
그런데 위의 예시는 마치 세 위격들이 전체의 어느 일정 부분을 구성하는 것처럼 설명함으로써, 그 자체로는 완전하지 못한 한 부분일 뿐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출처>: 월간생활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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