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8,19-21
19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군중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20 그래서 누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을 뵈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만나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뒤 당신의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당시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단식과 극기로서 생활하고, 세례를 베풀며
메시아의 도래와 회개를 설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간 평가는, 예수님의 증언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니 미쳤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성사를 세우시기 위해 광야에 나가시어 세례자 요한의 방법을 겸손되이 선택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성모님은 어떤 마음이셨겠습니까?
아마도 세례자 요한에게 돌려졌던 부정적인 평가가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께로 돌려질까 마음 졸이셨을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상 사람들의 거짓된 평가를 근심하시는 성모성심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단을 구성하시어
당신께서 자라나신 땅을 떠나
온 이스라엘에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복음전도여행을 떠나시게 됩니다.
아드님을 떠나보낸 성모님의 마음.
그 마음을 무엇이 비할수 있겠습니까?
군대간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매일밤 촛불을 켜고 성모송과 묵주기도, 자녀를 위한 기도를 바칠 것입니다.
성모님의 마음이 바로 그 심정이셨을 것입니다.
복음전도여행을 떠난 아드님의 소식...
간간히 들리는 그 소식은
루카복음 사가에 의하면 <먹보요 술꾼, 세리와 창녀의 친구>라는 마음 아픈 빈정거림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는, <참가족>복음 이전에 <예수님과 베엘제불>이라는 단락을 삽입시켜 그 고통을 극대화합니다.
복음사가들은 성모님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 아드님이 드디어 고향땅에 돌아왔습니다.
어머님은 한달음에 주님의 (사촌)형제들과 달려갑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성모님처럼 목말라하고 그리워 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군중>들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 <군중>들이 참 야속해 보입니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 사가에 의하면 그 <군중>들은 참으로 고맙게도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고 전해줍니다.
즉, <군중>이 예수님과 어머님 사이를 중재하고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군중>들의 마음에 일침을 놓으십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에 의하면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군중>들에 의해 인간적인 부분으로 정향되어 있는 당신과 어머니의 관계를
예수님 주도권 안으로 정향시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과도하게 <예수님>과 <어머니>의 관계를
<어머니의 심정>의 시각으로만 정향하고 있지 않은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군중>과는 달랐습니다.
루가 복음 사가는 <군중의 시각에>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는 예수님의 직언으로 응답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혈연 관계로 이루어진 모자관계를 부정하였으니
성모님께 드리는 상경은 필요 없는 것이다
라고 해석해 버리는 과격함은 배척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모 마리아>를 베제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루카복음사가의 깊은 신학적 의도를 통찰치 못한 것에 기인합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의 말씀에 맞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이겠습니까?
루카 복음 사가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최초의 그리스도인으로 제시됩니다.
<참가족> 복음은 우리를 수태 고지에서 있었던 <성모 마리아>의 영육적 순명으로 자연스레 이끌어 줍니다.
다시 말해
이미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참가족>의 참된 범주 안에 속해계신 첫번째 인물로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라는 말씀은 <성모 마리아>를 배제하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성모 마리아>를 최고의 <참가족>으로 제시하시는 말씀으로 알아 들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이 복음서에 기인해 <마리아>께 상경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께 면박을 주었고,
<마리아>는 상처를 받았다 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처를 <성모님께 투영하는>인간적 어리석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본인이 그런 자이기에, 예수님도 성모님도 그렇게 바라보게 되는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성모 마리아>의 마음은
루카 복음서의 기록을 빌어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갓난아기의 옹알이를 알아듣는 것은 그 어머니 뿐입니다.
당신의 아드님의 말을 참다웁게 알아 들으신 분도 <성모 마리아> 한분 뿐이셨을 것입니다.
자녀의 모든 말이 그 어머니에게 기쁨이 되듯
주님의 이 말씀도 <성모 마리아>께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요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 제시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신 첫 그리스도인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께서는 육신적으로 뿐만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도 <참 어머니>라 칭해집니다.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그 아드님 예수님을 영육으로 뵙기를 기다리신 분이십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인간적 관계를 기초로한 <어머니>와의 관계를 초월하여
<성모 마리아>를 신앙적으로도 확장하여 <참 어머니로 제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오늘 가족들에게
참 아버지요, 참 어머니 였습니까?
참 자녀요 참된 형제였습니까?
가족도, 인간적인 관계에 한정되어서는
참된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중심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요한복음의 증언대로 <말씀이 사람이 되신분>이며
우리 가운데 사신 분이십니다.
온갓 인간적 어리석음을 넘어
오늘의 말씀에 대한 묵상을 선물합니다.
성모님을 예수님의 어머니, 교회가 의탁하고 있는 어머니, 신앙의 참된 표상의 어머니로 상경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만나게 되기를 간절히 기다렸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