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젠 정말 논쟁의 끝입니다.. | 카테고리 | 성경 | ||
---|---|---|---|---|
이전글 | 논쟁의 끝. |39| | |||
다음글 | 탈출기 9,6의 우리말 번역 | |||
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10-08-23 | 조회수399 | 추천수2 | 신고 |
오 세민님의 논쟁거리를 요약하면 첫째로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반박하시다.’이고, 둘째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문전 박대하셨다.’라고 요약이 됩니다. 복음서를 살펴보면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여지는 있습니다. 그러나 님의 이 두 논쟁거리는 아래와 같이 이해를 하면 논쟁 소지를 근원적으로 해소할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아래의 ‘논쟁 해소 근거’를 읽기 전에 이삼용 님이 게시한 이성훈 신부님의 강론 내용과 소순태님의 여러 댓글, 그리고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신 어머님 사랑’에 대해서 한번 묵상하신 후 소생의 답변을 읽어 보시면 많은 이해를 하리라 사료되니 참조해 주십시오, 1.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반박하시다. 가. 복음 : 루카 11:27-28 나. 내용 :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 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다. 논쟁 이유 1]마리아가 첫 순명이후에도 계속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셨다면 '오히려'라는 표현을 쓰실 수 없을 것이다. 2]마르코 복음서에도 보면 친척들이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해서 붙잡으러 오는 장면이 있다. 라. 논쟁 해소 근거 1]루카[11: 27-28]복음의 ‘참 행복’의 소제목은 그 말 자체로 참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는 말은 원론적인 ‘참 행복’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불손하다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사가가 기록한 내용으로 봐서 예수님은 이미 구세주로 의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기적을 보여주지만, 일부 사람들은 마귀의 힘으로 한다느니 하면서 예수님을 모욕하고 예수님의 권능을 부인하려는 상황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어떤 여인이 소리 높여 예수님께 따지려는 뜻의 내용으로도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론적으로 ‘참 행복’의 개념을 이야기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2]가령 ‘오히려’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만 봐도 성모님께서 평소에도 인간적인 실수를 하는 등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도 생각됩니다. 이 말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그 여인에게 성모님은 순종 그 자체이시며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분이 없다는 것을 강조 하신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그렇게 큰 소리로 따져보자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너 보다는 이미 순종 그 자체이신 나의 어머님만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라는 내용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이미’성모님의 순종을 알고 계시기에 ‘오히려’라는 표현은 ‘그 여인’의 '오만'보다는 ‘성모님’의 '참 행복'을 강조한 것이라 판단됩니다. 2.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문전 박대하셨다. 가. 복음 : 마르코 3:20-35 나. 내용 :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다. 논쟁 이유 1]성모님도 예수님 친척들[형제들]처럼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다. 2]성모님께서도 베드로처럼 인간적인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다. 라. 논쟁 해소 근거 1]성모님만큼 예수님의 혈육에 대해서 아시는 분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혈육으로 탄생하셨습니까? 성령으로 나신 분이십니다. 말이 친척이지 어디 혈육을 나눈 친척이 있습니까? 그리고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그 심정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그리 없을 겁니다. 그게 인간의 약점입니다. 당대의 지식인인 율법학자도 예수님의 권능을 부정하는 판에 그 친척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모님은 어머니로서 확인이 필요했기에 그곳에 가셨습니다. 이것이 모정 아닙니까! 그리고 확인했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 이야기를 성모님도 분명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둘레에는 많은 군중이 앉아있었고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라는 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구세주’임을 부정하는 말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메시아’인 당신의 혈육을 들추어 냄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부정하려는 불손한 의도도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본을 이야기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당신이 아무리 메시아라고 하지만 뻔한 가족 관계가 있는데 그러느냐?’에 대한 반문입니다. 당신 어머님과 형제들이 보러 왔다란 말에 하느님의 뜻을 지키는 사람만이 내 형제요 누님이요 어머님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더더구나 나의 어머님은 내가 확신하는 나의 뜻을 잘 지키는 성모님 그 사람임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만약에 이 말이 성모님도 예수님 친척들[형제들]처럼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섰거나, 성모님도 베드로처럼 인간적인 실수를 저질렀기에 문전 박대한 말이라고 상상해 봅시다. 일찍이 성모님은 나자렛에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고백하신 분이십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그가 시키는 모든 일을 하여라.’라고 우리에게 한결같은 그분 사랑을 일러도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옛날 예루살렘의 축제 기간에 어린 예수를 사흗날에 찾아내고는 꾸지람을 하신 분이십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만약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분명 그냥 내버려 두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 자리에서 분명 호되게 꾸지람을 하셨거나 집으로 끌고 왔을 것입니다. 3]성모님은 아들 예수의 설교 장소에 분명 계셨고 그 장소에서 예수님께서 설교를 중단하시고 성모님과 친척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았고 이런 논쟁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은 나자렛에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순종하여 믿었고, 예루살렘의 축제 기간에,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아들 예수님의 신원을 확인하였던 분이십니다. 더더구나 이 설교의 장소에서 아들 예수가 만인의 구세주임을 확인하였을 것이라고 확신대는 대목입니다.[이성훈 신부님의 강론에서 '방상복'신부님의 댓글을 보면 - '내 아들이 드디어 한소식 했구나! 내 아들이 드디어 깨우쳤구나! 내 아들이 땅의 血緣 관계를 떠나 드디어 아빠 하느님과의 영적인 관계에 들어섰구나!'하시며 그 날 그 집 대문앞에서 덩실 더덩실 춤을 한껏 추셨을 같습니다.- 와 같이 성모님의 기쁨의 춤자락이 아스라히 떠오릅니다.] 4]우리는 성모님에 관한 믿을 교리, 즉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를 믿는 신앙인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의 ‘동정 잉태’를 통하여 ‘천주의 어머니’성모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이 성모님이 ‘하늘에 불러 올리신 분’이라는 것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성모님이 인간적인 실수[잘못]을 범했다고는 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비교하는 것도 난센스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동정 마리아로 부터의 탄생을 믿는다면, 이 성모님의 ‘믿을 교리’를 떠나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에 ‘죄’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꾸지람한 것을 성모님께는 ‘문전 박대’로 확대 적용하는 것은 큰 오류라고 판단됩니다. 3. 결론 오세민 님이 제시하신 논쟁거리는 ‘참 행복’과 ‘예수님의 참 가족’에 관한 사항입니다. 소생은 이 내용을 복음사가들이 이야기 한 대로 ‘참 행복’과 ‘참 가족’에 대한 명쾌한 정의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참’을 ‘거짓’으로 대비해서 복음사가가 요약한 내용으로 저는 보고 있으며, 이것을 액면 그대로 결론을 내리면 큰 오류를 범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숨겨진 복음 사가의 주장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 됩시다. 예수님은 성모님을 마지막 유언을 내리시는 장소에 분명히 초대하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에 관한 믿을 4대 교의를 떠나서는 참된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모님께 대한 수많은 논쟁거리가 있을 수는 있으나, 오랜 기간 여러 장소에서 무수히 논의된 이 내용들이 교황청에서부터 4대 교의로 선포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믿을 교리를 믿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신비의 하느님 존재를 믿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어려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시된 '믿을 교리'를 확실히 믿는 가운데 참 신앙으로 다가가리라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해 육화되어 인간으로 직접 오신 분이십니다. 그 하느님이 선택하신 성모 마리아에 관한 그 많은 논쟁, 이 ‘믿을 교리’로 이젠 종지부를 찍도록 합시다. 아멘 ^^+ |
||||
태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