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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에 관한 고찰 (퍼옴)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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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삼용 쪽지 캡슐 작성일2010-09-04 조회수543 추천수1 신고
[교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에 관한 고찰
 
작성자   주호식(jpatrick)  쪽지 번  호   190
 
작성일   2008-01-08 오후 11:08:20 조회수   604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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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에 관한 고찰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Lumen Gentium)1)을 중심으로
 
 
조규만 [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신부]
 
 
서 론
1. 교회란?
2. 교회 설립
3. 교회의 특성
4. 교회의 직무
5. 교회와 제 종교
6. 교회와 세상
결 론
 
 
서 론 
 
한스 큉(Hans Küng) 신부는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당연한 것을 질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질문에는 격변하는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위기를 느끼는 불안감이 감지된다. 오늘날 세계는 많이 변하였다. 과학은 놀랄 만큼 발전하였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현대인들은 한편으로는 희망을 지니며, 또 한편으로는 불안을 느끼고 있다.2) 이제민 신부는 󰡔교회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펴냈다. 저자는 교회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인격체이며 인간적이기 때문에 ‘교회는 누구인가?’ 또는 ‘누가 교회인가?’라고 질문할 수 있는 실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 오늘날 여전히 교회에 관한 많은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다. 교회는 이대로 좋은가?4) 도대체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누구인가? 교회는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립한 것인가?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어떤 관계인가? 교회의 직무와 사명은 과연 무엇인가? 교회와 타 종교와의 관계는? 그리고 세상에 대해 교회는 무엇인가?
 
일찍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바로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개최되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 개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격변하고 있는 현대 세계 안에서 교회의 상태를 보다 더 잘 알고,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함이다.”5) 그러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은 무엇보다도 세상에 대하여 교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또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문헌이다.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교회 헌장」과 그 공의회 정신을 이어받은 후속 문헌들을 바탕으로 교회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 답변을 시도하고자 한다.
 
 
1. 교회란?
 
‘교회’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와 어조를 지닌다. 게르만 언어권에서는 ‘Kirche’ ‘church’ ‘Kyrka’ ‘cerkov’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이 용어는 ‘Kyrike’(주님께 속하는)라는 비잔틴 희랍어형 용어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교회’란 ‘주님께 속하는 집’ ‘주님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로마 언어권에서는 ‘ecclesia’ ‘iglesia’ ‘eglise’ ‘chiesa’ 등의 단어들이 사용된다. 이 용어들은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희랍어  έκκλησία(ekklesia)와 관련된다. 이는 본래 έκκλησία τοῦ θεοῦ(하느님의 교회)의 줄임말이다. 즉 ‘하느님의 백성’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έκκλησία라는 말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사용되었던 희랍 용어이다. 일반 사회에서 έκκλησία는 전령관의 부름을 받고 모인 사람들의 모임, 또는 백성들의 집회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έκκλησία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은 ‘주님의’ 혹은 ‘야훼의’라는 수식어가 붙을 때이다. 즉 단순히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위하여 모이는 것이 아니라 누가 무슨 목적으로 모이게 하느냐가 중요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느님이 모으시고, 따라서 하느님의 공동체가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신약성서 έκκλησία란 용어는 히브리어 להָקָ (qahal)을 희랍어로 번역한 것이다. להָק 역시 소집된 모임을 뜻한다. 여기서도 하느님의 종말론적 공동체의 칭호인 להָק הוהי(qahal Yahweh)의 의미가 드러난다.6) 초대 교회는 έκκλησία라는 말을 이어받음으로써 의식적으로 자신들의 모임이 참하느님의 집회요 참하느님의 공동체이며, 자신들을 참종말의 하느님 백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헌장」을 통하여 교회의 정체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인류의 빛(Lumen Gentium)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 모인 이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며(마르 16,25 참조), 모든 사람을 교회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어 주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다”(1항).
 
「교회 헌장」의 정체성 이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1) 교회는 인류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성사이다. 성사(Sacramentum)란 희랍어 μυστήριον의 번역어로서 신비(Mysterium)와 상통한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 자신은 분명 신비이시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하느님의 형상이시다. 교회는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류의 빛이요,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목적과 목표를 지닌다. 그러므로 이 원성사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사이다.7) 2) 교회는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의 성사이다. 원성사이신 그리스도의 사명은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이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찼을 때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다.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기 위함이었다(갈라 4,4~5; 󰡔가톨릭교회 교리서󰡕, 422. 430. 432항 참조). 교회는 바로 이러한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불린 하느님 백성의 모임이요, 그리스도의 신비 공동체이다. 곧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의 표징이요 도구인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사인 것이다.8) 3) 교회는 전 인류의 일치의 성사이다. 죄는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떼어 놓을 뿐 아니라, 인간 상호 간의 불일치를 초래한다. 그러므로 죄를 극복하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의 화해만이 아니라, 인간 상호 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도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 인류의 일치 역시 교회의 사명과 깊이 관련된다(「교회 헌장」, 13항 참조).9)
 
이처럼 하느님과의 친교, 인간 상호 간의 친교와 일치를 위한 그리스도 안의 성사로서 교회가 자신을 이해하는 첫 번째 기준은 하느님이다.10) 사도 바오로를 비롯한 신약성서는 교회를 본질적으로 하느님이 불러 모은 백성 내지 집회로 이해하였다(로마 1,6; 8,28; 1고린 12, 24). 무엇보다 교회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를 지향하는 모임이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 상호 간의 친교와 일치 더 나아가 자연과의 친교를 지향한다.11) 이러한 목표로 이스라엘 신앙을 물려받은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인간의 특별한 친교와 일치를 드러내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용어를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구별하여 교회는 자신을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라고 스스로 일컫고 있다.12) 두 번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이다.13)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일은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규정해 주며 비그리스도교적인 것과의 혼동을 막아 주고 그 특수성을 식별케 한다. 아울러 그 우주적인 개방성과 범세계적인 책임도 이 고백에 근거한다.14) 교회는 자신의 존립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에 정초하면서,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신비체’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는 그 몸을 이루어 하나의 신비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바오로 서간에서부터 「교회 헌장」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나타난다(에페 1,10; 4,11~16; 「교회 헌장」, 7항 참조). 교회의 세 번째 기준은 성령이다.15) 성령 강림 때 교회는 민중 앞에 공적으로 드러났다. 성령은 교회를 거룩하게 하며, 온전한 진리에로 인도하시고, 교류와 봉사로 일치시키며 교계 제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은혜로 교회를 가르치고 지도하신다(「교회 헌장」, 4항 참조).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을 혼으로 하는 그리스도 신자 단체16), 성령의 성전으로도 이해되고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797항).
 
이와 같은 세 가지 기준에 의해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일치로 모인 백성”(4항)인 것이다.
 
 
2. 교회 설립
 
한스 큉은 ‘예수의 생애에는 교회 설립이 없다’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과연 누가 교회를 세웠는가를 질문하고 있다.17) 과연 누가 교회를 세웠는가? 두말할 나위 없이 교회의 설립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역사가들이나 종교 사회학자들은 예수를 그리스도교 종교의 창시자로 보고 있다. 다만 이 종교 운동 이후 조직된 교회의 설립자로 보는 것에 대한 여러 가지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반론은 ‘오늘날 거대한 조직체로서의 교회를 예수가 사전에 인식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그가 원한 공동체는 또 다른 모습이 아니냐?’ 하는 추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예수가 교회를 설립하였음을 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18)  
 
「교회 헌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교의 설립자이심을 언급한다. 성부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기 위하여 파견된 성자께서는 “성서에서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심으로써 당신 교회를 시작하셨다”(5항).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백성의 역사와 구약을 통하여 준비되고 있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이 생길 때부터 이미 예표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구약에서 오묘하게 준비되었고, 마지막 시대에 세워져 성령 강림으로 드러났으며, 세말에 영광스러이 완성될 것이다”(2항).
 
이런 점에서 예수의 교회 설립은 세상 창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교회의 목표인 하느님 나라 선포, 교회의 초석이 될 열두 제자들의 선택, 성체성사 건립, 십자가에서 흘리신 당신의 피와 물의 사건과 관련된다. 물론 교회가 민중 앞에 공적으로 나타난 것은 성령 강림 사건이라 할 수 있다.
 
 
2.1. 교회 설립의 준비
 
2.1.1. 천지 창조 때 예표된 교회
 
교부들은 낙원, 노아의 방주, 시온 산, 계약의 궤, 장막, 하와, 사라,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라켈, 레베카, 이스라엘의 남은 자, 하느님 백성 등을 교회의 표상으로 보았다. 이러한 표상들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자체로는 교회와 다른 것으로서 단순한 표상 혹은 단순한 비유인 것들과, 교회와 실재적, 역사적 관련을 지닌 예형이다.19) 이러한 예형들은 교회를 예표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 이해에 도움을 준다.
 
교회를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과 일치, 하느님 안에서의 인류의 친교로 이해할 때, 의인화법을 통하여 하느님과 최초의 친교의 신비를 전해 주는 창세기의 창조론은 교회를 예표한다. 여기에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 자연과 인간의 친교, 인간과 인간 상호 간의 친교가 나타난다. 물론 창조에 나타난 친교는 초보적 단계에 머문다. 인간의 하느님과의 완전한 친교는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묶어지는 교회의 신비 안에서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완성은 초자연적인 것을 지향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실현될 것이다.20) 이런 맥락에서 쇤보른(Ch.Schönborn)은 “교회는 창조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21)고 말한다.
 
세상 창조에서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드러나며, 인간 구원을 위한 교회가 예시된다. 또한 교회가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인 만큼 교회는 창조 계획의 최종 목적이며 수단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창조 계획은 순례하는 교회 안에서 현실화되고, 완성된 교회 안에서 목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의 완성은 곧 교회의 완성이다(로마 8,20~21 참조).22)
 
한편 ‘교회가 세상이 생길 때부터 이미 예표되었다’는 말은 피조물 전체, 곧 ‘하늘과 땅’이 교회의 전형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피조물에 대한 이해는 교회의 이해를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23) 이러한 창조와 교회의 관계는 인류 가족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가족이 되도록 창조되었고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해 준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교회는 ‘세상’의 성사인 것이다.
 
2.1.2. 이스라엘 백성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역시 교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교회 헌장」은 교회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구약에서 오묘하게 준비되었다”(2항)고 밝히고 있다. 곧 ‘구약의 백성은 신약의 백성인 교회를 상징한다.’24)
 
구약의 역사 안에서 구원은 하느님의 선택에 있음을 보여 준다(로마 8,28~30 참조).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불러 모음’을 시작하신다. 하느님의 선택에는 하나의 약속이 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을 준다. 계약의 성취와 새로운 계약 체결에서 이 희망은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것에서 영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 확대된다. 마침내 하느님과의 친교를 목표로 한다. 이 계약에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임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약속과 신앙,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세 가지 요소가 교회의 개념을 잘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이 점을 사도 바오로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사도 바오로에게 아브라함의 진정한 후예는 신앙을 가지고 약속된 그리스도의 상속자가 된 그리스도 신자들이다. 즉 교회는 바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그리스도 안에 모인 위대한 백성이다(갈라 3,24~29 참조).25)
 
‘야훼의 백성’의 형성에는 과정이 있었다. 첫 단계는 출애굽 사건이다. 이 탈출은 죄악의 상태에서의 탈출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실마리가 되는 셈이다. 두 번째 단계는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이다. 이 계약은 아브라함과의 계약의 성취요 확대된 재계약이다. 하느님께서는 계약의 성취에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신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사건을 통하여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에 충실하지 못하였다. 불충실 때문에 벌을 받지만, 하느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은 취소되지 않는다. ‘남은 자’들이 충실성의 증인이 되어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존속하게 한다. 마침내 ‘남은 자’들 가운데 출현할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온 세상을 구원하게 될 것이다(이사 49,5~6 참조). 그리스도인들은 야훼의 충실한 종으로서 야훼의 말씀을 전하며, 학대와 고난을 무릅쓰고 마침내 불명예스러운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은 고난의 메시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다.26)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과 구약의 역사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와 성령 강림으로 새로운 백성이 태어나는 과정을 준비해 주고 있다.27)  
 
2.2. 예수의 교회 설립과 공포
 
2.2.1. 하느님 나라 선포
 
교회가 ‘마지막 시대에 세워졌다’는 「교회 헌장」의 표현은 ‘때가 찼을 때’라는 신약성서의 표현과 관련된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의 탄생을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라고 표현한다. ‘마지막’ 시대는 예수의 시대를 지시한다(마르 1,15; 히브 1,4 참조). 그러므로 예수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28)
 
교회와 하느님 나라는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거룩한 교회의 신비는 그 창립에서 드러난다. 주 예수님께서는[…]오래전부터 성서에서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심으로써(마르 1,15; 마태 4,17 참조) 당신 교회를 시작하셨던 것이다. 이 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활동과 현존 안에서 사람들에게 빛나기 시작한다.[…]예수님의 기적들 또한 그 나라가 이미 지상에 와 있음을 증명하여 준다. ‘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가 11,20; 마태 12,28 참조).[…]교회는 조금씩 자라나는 동안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분투하며, 온 힘을 다하여 자기 임금님과 영광스럽게 결합되기를 바라고 갈망한다”(「교회 헌장」, 5항).
 
일찍이 르와시(Alfred Loisy, 1857~1940)는 “예수가 선포한 것은 하느님 나라였는데 온 것은 교회였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정당하지 않다. 물론 교회 자체가 하느님 나라가 아니지만 하느님 나라 없이 교회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구원과 그 계획을 ‘하느님 나라’라는 용어로 집약하여 표현하였다. 복음사가들, 특히 공관복음사가는 이 점을 반영하여 100여 번 정도 이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29) 사실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말씀으로서만이 아니라 활동의 중심이었다. 예수의 기적적 활동은 바로 ‘하느님 나라’의 징표였다.30) 이 개념은 예수 이전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선포되었으며, 이스라엘이 수 세기 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아 왕국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31)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구원과 동시에 하느님의 영광을 의미하며,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주의를 드러낸다. 즉 하느님 나라는 인간의 통찰적 사고로 예견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정치적 유형의 투쟁으로 산출해 내거나, 인간의 윤리적, 종교적 형식의 도움으로 그 성과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철두철미 하느님의 일임을 드러낸다.32)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곳에 하느님 나라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도한다.33)
 
또한 신비로서 비유만으로 설명될 수밖에 없는 하느님 나라는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의 장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1고린 13,12). 교부들을 이를 ‘지복직관’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는 교회의 시작이며 기초이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간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순례하도록,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설립되었다. 즉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상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공동체인 것이다.34) 곧 하느님 나라는 교회의 목표이며 사명이다. 이러한 관계는 쇤보른이 기억하는, 토마섹(Tomasek) 추기경의 1985년 세계 주교 대의원회 임시 총회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 이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위해 고통을 받아 내야 한다. 바로 이 일이 전부이다.”35)
 
2.2.2. 열두 제자의 선택
 
하느님 백성을 새롭게 모으고자 했던 예수는 우선 열두 제자를 선택하였으며, 그들을 파견하였다(마르 3,14 참조).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셨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예수의 교회 설립의 성격을 찾아볼 수 있다. 제자단의 무리는 열두 제자에 국한되지 않는다.36) ‘제자단’은 당시의 랍비와 그의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와 함께’ ‘예수와 한공동체’를 이루고 ‘예수의 삶’을 나누고 ‘예수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운명 공동체’를 의미한다. 복음서는 이를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마르 8,34) 자들의 모임으로 표현한다.37) 이런 제자단에서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열두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제자단은 하느님 나라를 섬기는 일의 협력자요, 이스라엘을 모으는 일의 협력자이다. 즉 그들의 사명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새로운 생활 질서로 철저히 회개하고, 형제자매를 공동체로 불러 모으는 일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는 기도를 가르쳤다(루가 10,2 참조). 예수의 추종 공동체는 옛 하느님 백성 이외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이스라엘 대신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불러 모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의 관심사는 세말의 하느님 백성을 예표하자는 것, 이스라엘이 참으로 되어야 할 그것을 표출하는 징조가 되자는 것, 이스라엘의 세말 실존이 지금 이미 시작되게 하자는 것이다.38)
 
복음서에서 열두 제자 가운데 특별히 베드로는 교회의 초석으로 언급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해석상 많은 논란이 있지만,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제대로 인식하는 베드로의 신앙이 교회의 반석이 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수의 이러한 선언은 당신이 선택한 사도들에게 교회를 맡기실 의향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교회를 인도하고 다스릴 권한을 약속한 것이다. ‘열쇠를 준다’는 것은 권한을 준다는 것이며, ‘맺고 푼다’는 것은 랍비들이 사용하는 어투로서 권한을 강조한 것이다. 베드로에게 그 통치권이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39) 마태오 복음에만 나타나는 교회라는 단어에 관해서 많은 의견들이 있다. 그러나 마태오가 교회를 역사적 관점에서보다 신학적 관점에서 구상하였다는 것이 일반적 의견이다. 베드로의 그리스도론적 고백과 관련된 교회 설립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깊이 관련되지만 그리스도의 부활을 일회적인 사건으로 보지 않고 부활 이전 예수의 삶과도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 준다. 즉 교회는 단지 부활의 그리스도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예수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40)
 
2.2.3. 최후의 만찬
 
예수는 최후의 만찬에서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어지는 새 계약이다”(루가 22,20). 이 새로운 계약은 구약의 예언자들로부터 예언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저 새롭고 완전한 계약, 바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 말씀을 통하여 전하여질 더욱 완전한 계시의 준비와 표상이 된다. ‘그 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으리라.’[…]마침내 ‘선택된 민족, 왕의 사제들, 거룩한 겨레,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서……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1베드 2,9~10)”(「교회 헌장」, 9항).
 
식사는 그 자체로 인간의 행위와 인간관계의 원초적 현상으로서 하나의 공동체적 차원을 지닌다. 식사는 생명 공동체의 표현이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보존하며 부서진 공동체를 다시 일으키고 활력을 주는 수단이 된다.41) 그러나 예수의 성만찬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그 이상이다. 빵을 나누어 먹고 잔을 나누어 마시는 가운데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주님의 잔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이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이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1고린 10,16~17). 바로 성만찬에서 예수는 자기와 결합된 하나의 공동체를 원하였으며, 공동체는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와 결합되는 것이다.42) 천상에서의 하느님과 친교를 미리 맛보게 하며, 형제들 간에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을 이루게 하는 성체성사는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규정해 준다  (「교회 헌장」, 3항 참조). 쇤보른은 교회가 살아가는 힘을 얻고 또 자신의 모습을 쇄신하는 원천은 십자가의 제헌이며, 또한 이 원천은 성체성사 안에 현존한다고 해설한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교회 헌장」, 11항)이라는 공의회의 정신을 재차 강조한다.43)
 
2.2.4. 십자가 사건
 
성체성사로 예비된 교회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흘린 그리스도의 피’로서 탄생하였다. “신비 안에서 이미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나라 곧 교회는 하느님의 힘으로 세상에서 볼 수 있게 자라고 있다. 그 기원과 성장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상징되었고(요한 19,34 참조),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두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는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 할 것이다’(요한 12,32)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예고되었다.[…]십자가의 희생 제사가 제단에서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동시에 성찬의 빵을 나누는 성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1고린 10,17 참조) 신자들의 일치가 표현되고 실현된다. 모든 사람이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와 이렇게 일치되도록 불리었으며,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와 그리스도를 통하여 살며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있다”(「교회 헌장」, 3항).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은 하와가 잠든 아담의 옆구리에서 만들어졌듯이, ‘교회도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꿰뚫린 심장에서 태어났다’(5항 참조)고 표현한다. 일찍이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그리스도의 신비체」에서 십자가로부터 유래하는 교회를 언급한다. “최후로 예수께서 교회, 즉 신비체 전체를 당신의 것으로서 획득한 것도 십자가상에서였다. 세례의 물로써 신자가 이 신비체에 결합될 수 있는 것도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으로서 이미 완전히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44) 쇤보른은 교회의 기원이 십자가라는 사실이 교회의 존재, 교회의 길, 교회의 봉사자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십자가로부터 유래한 교회는 그 두 가지 흔적을 품고 있는데, 교회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치욕을 받는다는 것과 또 바로 그분에 의해 교회가 희망의 표징이라는 것이다.”45) 십자가로부터의 교회의 유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로 말미암아 비로소 성부의 뜻대로 전 인류의 머리가 되시고 그들을 자신 안에 모으는 교회가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46)
 
2.2.5. 성령 강림
 
성령과 교회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다. “마지막 시대에 세워져 성령 강림으로 드러났다”(「교회 헌장」, 2항). “오순절에 성령께서 교회를 끊임없이 거룩하게 하시도록 파견되셨다. 또 이렇게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성부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에페 2,18 참조). 이 성령께서는 바로 생명의 영, 곧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이시다(요한 4,14; 7,38~39 참조). 이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서는 죄로 죽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며 마침내는 그들의 죽은 육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시키실 것이다(로마 8,10~11 참조). 성령께서는 교회 안에 그리고 바로 성전인 신자들의 마음 안에 머무르시고(1고린 3,16; 6,19 참조), 그 안에서 기도하시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하여 주신다(갈라 4,6; 로마 8,15~16,26 참조). 교회를 온전한 진리로 인도하시고(요한 16,13 참조) 친교와 봉사로 일치시켜 주시며, 교계와 은사의 여러 가지 선물로 교회를 가르치시고, 이끄시며 당신의 열매로 꾸며 주신다(에페 4,11~12; 1고린 12,4; 갈라 5,22 참조). 복음의 힘으로 성령께서는 교회를 젊어지게 하시고 끊임없이 새롭게 하시며 자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도록 이끌어 주신다. 성령과 신부가 주 예수님께 ‘오소서’ 하고 말씀하신다(묵시 22, 17 참조)”(「교회 헌장」, 4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론의 특징의 하나는 성령의 현존과 활동을 강조한 점이다.47) 이는 초대 교회의 교회론을 반영한다. 초대 교회는 성령이 교회 안에 현존하는 사실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으며, 예수의 성령이 그들의 공동체를 다스리고 인도하며, 그들의 구원과 영원한 영광을 보증해 주시리라 믿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확인해 주셨고 그것을 보증하는 표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2고린 1,22). 더 나아가 ‘종말의 날’ 하느님 백성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48)
 
십자가에서 태어난 교회는 비로소 성령으로 말미암아 공적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다. 이로써 ‘교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성령 강림날 교회는 설교를 통하여 여러 민족들 사이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성령은 단지 교회를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내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교회의 ‘영혼’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09항; 797항 참조).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자신에게 위탁된 구원의 임무 수행 능력을 받고 하느님의 능력과 현존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사랑의 친교에 동참하는 것이지만 성령 안에서 그 친교에 동참하는 것이다(에페 2,18 참조). 그러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또한 ‘성령의 교회’인 것이다.
 
2.3. 교회의 완성
 
「교회 헌장」은 교회의 미래적 완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모두 그리고 부름 받아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덕을 얻게 되고, 만물이 새로워지는 시간이 올 때에(사도 3,21 참조) 비로소 천상 영광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48항).
 
그러므로 지금의 현존 교회는 그 완성의 날까지 세상과 싸우며 순례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았고, 여전히 순례 도상에 있다. 그러나 교회는 자신의 목적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목적에로 나아가고 있다(「교회 헌장」, 48항 참조).
 
쇤보른은 교회가 자신의 목적인 ‘천상의 영원한 고향’에로 방향을 정하는 것을 소홀히 하게 될 때 두 가지 위험을 겪게 된다고 경고한다. 첫째는 교회의 조직과 기구를 중요하게 다루고, ‘설립된’ 교회의 측면을 과대평가함으로써 교회가 은총의 장소임을 잊고 인간적인 소산으로만 취급된다. 따라서 교회에 많은 비탄과 한숨, 격분, 분노, 실망을 쏟아 낸다. 우리가 지상 순례의 여정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교회는 이 지상에서 이미 이상적이고 완성된 교회라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제도적인 교회의 모습만을 바라보고 강조하면서 이미 천상 고향의 모든 보화들을 비록 “질그릇”(2고린 4,7) 속이기는 하지만, 자신 안에 담고 있는 교회의 성사적 순례 모습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49) 
 
‘영원한 천상 고향’을 향하여 순례하는 지상 교회는 ‘천상 교회’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천상 교회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리스도께 딸린 모든 사람은 그분의 성령을 모시고 하나인 교회로 뭉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에페 4,16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평화 속에 잠든 형제들과 나그네들의 결합은 조금도 중단되지 않으며, 더욱이 교회의 변함없는 신앙에 따르면, 영신적 선익의 교류로 더욱 튼튼해진다. 천상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더 친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온 교회를 성덕으로 더욱더 튼튼하게 강화하고, 교회가 이 지상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를 존귀하게 만들며 교회의 더욱더 광범위한 건설에 여러 가지로 이바지하고 있다(1고린 12,12~27 참조). 왜냐하면 본향으로 받아들여져 주님과 함께 사는 이들은(2고린 5,8 참조) 주님을 통하여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께 전구하며,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1디모 2,5 참조) 모든 일에서 주님을 섬기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으로 채우며(골로 1,24 참조) 이 지상에서 쌓은 공로를 보여 드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형제적 배려로 우리의 연약함이 많은 도움을 받는다”(「교회 헌장」, 49항).
 
이와 같이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서로서로를 위해 주는 모든 이들의 일치로서 ‘성인의 통공’이라는 교회의 신앙은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에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로마 14,7 참조). 이와 같은 성인들의 통공으로서의 교회는 인류의 중심이며 세상의 심장이 된다.50)
 
 
3. 교회의 특성
 
그리스도 신앙은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특성을 단일성, 성성, 보편성, 사도 전래성으로 고백해 오고 있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를 믿나이다”(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참교회와 교회 사명의 본질적 특징을 드러내는 이 4가지는 성서의 메시지에 근거한 것이며, 이는 교회가 사랑의 신비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 4가지는 하느님에 의하여 교회에 주어진 특성일 뿐만 아니라 교회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과업이기도 하다. 또한 이 특성은 주님께서 세우신 참교회의 진위 여부의 기준이 된다. “우리는 신경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라고 고백한다.[…]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교회의 전파와 통치를 위임하셨으며(마태 28,18 이하 참조), 교회를 영원히 진리의 기둥과 터전으로 세우셨다(1디모 3,15 참조). 이 교회는 이 세상에 설립되고 조직된 사회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교회 헌장」, 8항).
 
3.1. 하나인 교회
 
교회가 하나인 것은 교회의 설립자가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교회헌장」은 교회의 설립자를 ‘성부, 성자, 성령’이신 삼위일체로 간주한다(「교회 헌장」, 2항 참조).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오고 삼위일체 하느님께로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 여정의 교회이다(48~50항 참조). 천주 성삼은 교회의 기원과 목적일 뿐 아니라 교회의 표본이다.51) “교회는 그 기원상 하나이다. ‘이 신비의 최고 표본과 최고 원리는 삼위의 일치, 곧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한 분이신 하느님의 일치이다.’ 교회는 그 설립자로 보아 하나이다. ‘강생하신 성자께서는 평화의 임금님으로서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시고 한 백성, 한 몸 안에서 모든 사람의 일치를 회복시키셨기 때문이다.’ 교회는 그 ‘영혼’으로 하나이다. ‘믿는 이들 안에 살아 계시는 성령께서는 온 교회를 가득 채우시고 다스리시어 신자들의 저 놀라운 친교를 이루시고 모든 이를 그리스도 안에서 깊이 결합시키시어, 교회 일치의 원리가 되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상 하나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13항).
 
교회, 즉 하느님 백성 안에는 다양한 민족들과 다양한 문화가 있다. 이 다양성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다양성과 그것을 받은 사람들의 다수성에서 비롯된다. 교회의 단일성은 이러한 다양성을 가로막지 않는다.52) “하느님의 백성은 여러 민족들 가운데에서 모인 것일 뿐 아니라 그 자체 안에서도 여러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하느님 백성의 지체들 사이에는 다양성이 있다. 직무에 따라 어떤 이들은 자기 형제들의 선익을 위하여 거룩한 봉사 직무를 수행하며, 신분과 생활양식에 따라 많은 이들은 수도 생활 속에서 더 좁은 길로 성덕을 추구하며 형제들을 자신의 모범으로 격려한다. 그러기에 또한 교회의 친교 안에는 고유한 전통을 지니는 개별 교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교회 헌장」, 13항).
 
또한 교회의 단일성은 교회의 일치성을 요청한다. 하나가 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간절한 소망이었다(요한 17,21~22 참조). 교회의 단일성의 내적 근거는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53)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만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에페 4,4~6).
 
교회의 일치는 하나의 믿음에서 발견할 수 있고, 이 믿음에 응답하는 외적 표징은 하나의 세례와 하나의 빵이다. 즉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일찍이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일치의 표징이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이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이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고린 10,16~17).
 
3.2. 거룩한 교회
 
“교회의 신비를 거룩한 공의회가 제시하는 대로, 교회는 흠 없이 거룩하다고 믿어진다.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홀로 거룩하시다’고 칭송받으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의 신부로 삼아 사랑하시고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으며(에페 5,25~26 참조), 교회를 당신과 결합시켜 당신 몸이 되게 하시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령의 선물로 가득 채워 주셨기 때문이다”(「교회 헌장」, 39항). ‘거룩하다’라는 말은 우선 인간의 거룩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함이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기에 교회가 거룩한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은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행사하시는 성화의 힘 때문이다. 교회는 인간들로 구성된 교회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교회이다. 그래서 죄가 많은 동시에 거룩한 공동체이다.54) 
 
사실 현실의 교회는 죄 많은 교회이다. 역사상 교회의 잘못된 결정의 배후에는 개인적 실수와 과오가 있었다. 죄 없고 순결하고 거룩한 신자들만 교회 안에 남기를 바랐겠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러므로 교회사는 참으로 인간적인 역사일 뿐 아니라 죄악의 역사다. 초기 교회 공동체도 다르지 않았다(갈라 5,19~21; 로마 13,13~14 참조).55)  그러므로 거룩한 교회에 대한 고백은 거룩하신 하느님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 교회의 거룩함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넘어 그 구성원의 거룩함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하나의 소명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데살 4,3; 에페 1,4 참조). 한 사도의 말씀대로, 교회 안에서 모든 이는 교계에 소속된 사람이든 교계의 사목을 받는 사람이든 다 거룩함으로 부름 받고 있다”(「교회 헌장」, 39항). 교회는 또한 성덕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것이다.
 
3.3. 교회의 보편성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불린다. 그러므로 언제나 하나이고 유일한 이 백성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온 세상에 퍼져 나가, 처음에 인간 본성을 하나로 만드시고 흩어진 당신 자녀들을 마침내 하나로 모으고자 하신 하느님 뜻의 계획을(요한 11,52 참조) 성취시켜야 한다.[…]하느님 백성의 이 보편적 일치는 세계 평화를 예시하고 증진하므로 모든 사람이 이 일치로 부름 받고 있다. 가톨릭 신자이든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신자이든 모든 사람이 다 여러모로 이 일치에 소속되거나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부른다”(「교회 헌장」, 13항).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면 교회는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베푸심은 선택적인 것일 수 없다.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기 때문이다(1디모 2, 4 참조). 교회의 보편성은 이러한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부응한 사명에 기인한다. “보편 교회를 지역 교회들의 통합체로 인정한다든가 또는 서로 다른 지역 교회들의 연합체같이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교회는 그 소명과 사명에 있어서 보편적인 것이다”(「현대의 복음 선교」, 62항). 무엇보다 교회의 보편성은 이 세상에 하느님의 거룩함이 널리 퍼져 작용하고 있다는 데 근거를 둔다. 교회의 보편성은 결코 단순하게 공간적 외연으로 평가될 수 있는 지리학적 개념도 아니며, 수적 양만으로 측정될 수 있는 통계학 개념도 아니다. 또한 단일한 문화를 이루는 사회적 개념도 아니며, 시간적 연속성으로 계산되는 역사학적 개념도 아니다.56) 즉 교회의 보편성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느님의 백성을 돋보이게 꾸며 주는 이 보편성은 바로 주님의 선물이다”(「교회 헌장」, 13항). 󰡔가톨릭교회 교리서󰡕 역시 교회의 보편성의 두 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첫째, 교회는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이다(830항). 둘째,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전 인류에게 파견하셨기 때문이다(831항).
 
교회의 이러한 보편성은 필연적으로 기원상 하나의 교회, 즉 ‘가톨릭교회’와 관련된다. “개별 교회는 여러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서 ‘사랑으로 가장 탁월한’ 로마 교회와 일치함으로써 온전히 보편된 교회가 된다. ‘모든 교회가, 곧 모든 신자가 이 교회와 일치해야 하는데, 그것은 더욱 앞선 이 교회의 기원 때문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834항). 따라서 교회의 보편성을 위하여 로마 교회와의 일치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한스 큉은 보편성을 위한 교회 일치에 관하여 세 가지 점을 제안한다. 1) 교회들의 일치와 그리스도교회의 완전한 보편성 회복을 위해서는 개별 교회들의 역사적 기원과 역사적 상호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2) ‘가톨릭’이 아닌 교회들은, 직‧간접으로 그들이 유래한 ‘가톨릭’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가톨릭’과 화해하지 않으면, 교회의 필요한 단일성도, 보편성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3) ‘가톨릭’이라는 교회는, 직‧간접으로 자기에게서 유래한 교회들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그들과 화해하지 않으면, 교회의 필요한 단일성도, 보편성도 실현하지 못할 것이다.57)
 
교회의 보편성은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면서도 또 한편으로 교회가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할 사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사랑에 항구하지 못하여 교회의 품 안에 ‘몸’으로만 머물러 있고, ‘마음’으로는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교회 헌장」, 14항 참조). 또한 비록 완전치는 못하나 가톨릭교회와 어느 정도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도 있고(「교회 헌장」, 15항 참조), 아직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도록 부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교회 헌장」, 16항 참조).
 
3.4. 사도 전래성
 
그리스도교 신앙은 사도로부터 고백되고 전승되어 온 사도적 신앙이다. 교회는 직접적 영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을 통하여 주님의 메시지를 듣는다. 사도들을 거치지 않고서 주님의 부활 신앙에 이르는 길은 없다. 이와 같은 사도들의 증언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설교하고 믿고 행동하는 교회의 규범이다.58)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듯이,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만이 참교회로 인정된다. 그 후 오늘날까지 사도 전래성은 교회의 정통성의 한 가지 기준이 되고 있다.59)
 
사도 전래성의 의미는 외양의 차원에서 매우 다름에도, 오늘날 교회가 사도들의 교회와 같다는 것이다. 교회가 오랜 역사 안에서 온갖 우여곡절과 변화를 겪었음에도, 언제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사도로부터 우리 시대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는 뜻이다. 참으로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이기 위해서는 사도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도들 위에 세웠기 때문이다.60) 가톨릭 신앙인들은 ‘가톨릭교회’야말로 사도적인 교회임을 고백한다. “우리는 신경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라고 고백한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교회의 사목을 맡기셨고(요한 21,17 참조),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교회의 전파와 통치를 위임하셨으며(마태 28,18 이하 참조), 교회를 영원히 진리의 기둥과 터전으로 세우셨다(1디모 3,15 참조). 이 교회는 이 세상에서 설립되고 조직된 사회로서 베드로의 후계자와 그와 친교를 이루는 주교들이 다스리고 있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재한다”(「교회 헌장」, 8항).
 
교회의 사도성 역시 주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이지만, 아울러 교회가 수행해야 할 과업이며 소명이다. “성자께서 성부에게서 파견되신 것처럼 성자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며(요한 20,21 참조) 말씀하셨다.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라는 그리스도의 이 장엄한 명령을 교회는 사도들에게서 받았으며, 땅 끝에 이르기까지 이 명령을 이행하여야 한다(사도 1,8 참조)”(「교회 헌장」, 17항). 이를 위하여 사도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이어 가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것이 곧 주교직이다. “실제로, 사도들은 봉사 직무에서 다양한 협조자들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자기 사후에도 지속되도록, 자신의 직접 협력자들에게, 일종의 유언 형식으로, 자기들이 시작한 일을 완성하고 견고하게 할 임무를 맡겼으며, 성령께서 하느님의 교회를 사목하도록 그들을 세우신 바로 그 온 무리를 보살피라고 부탁하였다(사도 20,28 참조). 이렇게 사도들은 이러한 후계자들을 세웠으며,[…]전통이 증언하는 대로, 처음부터 이어 내려오는 계승을 통하여 주교직에 세워져, 사도의 씨앗에서 나온 포도 가지를 간직하고 있는 이들의 임무가 으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교회 헌장」, 20항). 
 
 
4. 교회의 직무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19~20)는 사명을 받았다. 교회는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직능과 권한을 필요로 한다.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러한 직능과 직권을 크게 예언직, 사제직, 왕직으로 구분한다. 또는 교도직, 성화직, 사목직으로도 표현한다. 「교회 헌장」은 이를 가르치는 임무(25항), 거룩하게 하는 임무(26항), 다스리는 임무(27항)로 표현한다.
 
초대 교회 공동체 안에는 이러한 직무를 담당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도, 예언자, 교사, 부제 등이다.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 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그 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입니다”(1고린 12,28). 또한 초대 교회에는 지도자 역할을 한 사람들 가운데 뚜렷한 공식적 명칭이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수고하는 사람’ ‘지도하는 사람’ ‘훈계하는 사람’(1데살 5,12 이하 참조), 또는 ‘동료’(골로 4,7; 필레 1,2), ‘주님의 일꾼’(1디모 4,6), ‘공동체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사람들’ ‘염려와 수고를 같이 하는 사람들’(필립 2,30)로 불렸던 자들이다.61)
 
이 삼중 직무에는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 모두가 참여한다. 교회 구성원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이기 때문이다(1고린 12,27 참조). “세례 받은 사람들은 새로 남과 성령의 도유를 통하여 신령한 집과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통하여 신령한 제사를 바치며 그들을 어두운 데에서 당신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불러 주신 분의 능력을 선포한다(1베드 2,4~10 참조).[…]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 직무 또는 교계 사제직은,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각기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교회 헌장」, 10항). 공의회 정신을 이어받은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은 “몸 전체의 사명에 참여하지 않는 지체는 하나도 없다”(2항)고 진술한다.
 
4.1. 가르치는 임무
 
예수는 진리 자체이실 뿐만 아니라(요한 14,6), 진리의 전달자요, 교사이시며 동시에 가르침 자체이시다. 예수가 참으로 진리의 교사라는 점은 복음사가들에게서 뚜렷이 강조되고 있다.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10; 요한 7,40 참조). 그러므로 하느님 백성의 교도직, 또는 예언직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다.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부터 가르치는 직무를 맡았던 사도, 예언자, 교사, 부제, 원로, 감독들이 있었다.62) 이 직무에 모든 하느님의 백성이 참여한다고 밝힌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은 또한 그리스도의 예언자직에도 참여한다.[…]성령께 도유를 받는 신자 전체는(1요한 2,20.27 참조)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주교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를 보일 때에, 온 백성의 초자연적 신앙 감각의 중개로 이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교회 헌장」, 12항).
 
4.2. 거룩하게 하는 임무
 
예수가 ‘대사제’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은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히브 7,24~26). 그리스도 이후 사제직은 그리스도의 삶의 희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1베드 2,5). 그러므로 거룩하게 하는 임무로서 그리스도교의 사제직은 그리스도의 삶의 희생을 재현하고 지속적으로 현재화시키는 것이다. 이를 재현하고 지속적으로 현재화시키는 것은 성체성사의 거행이다. 그러므로 사제직은 필연적으로 성체성사와 관련을 지닌다.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의 희생 제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신적 희생 제물을 하느님께 바치며, 자기 자신을 그 제물과 함께 봉헌한다. 이렇게 봉헌에서나 영성체에서나, 똑같지 않고 저마다 다르게, 모든 신자는 전례 행위 안에서 자기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거룩한 모임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신 신자들은 이 지존한 성사로 적절히 드러나고 놀랍게 이루어지는 하느님 백성의 일치를 구체적 방법으로 보여 준다”(「교회 헌장」, 11항).
 
4.3. 다스리는 임무
 
예수는 인간들로 하여금 하느님께 이르게 하는 ‘길’(요한 14,6)이실 뿐 아니라, 양 떼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요한 10,11~18)이시다. 무엇보다도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아, 즉 ‘왕’(마태 2,2~10; 27,37 참조)이시다.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을 비추시는 ‘빛’이시며, 당신의 백성을 평화의 길로 이끄시는 ‘왕’이시다(루가 1,78~79; 이사 9,1~6 참조).63) 예수의 왕권은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봉사하는 데 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예수의 메시아 직분에서 유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왕직, 사목직은 본질적으로 봉사직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큰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이러한 임무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따라야 할 하나의 길이시다.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집’에 이르는 길이시며 각 사람에게 도달하는 길이시다. 그리스도에게서 사람에게 이르는 이 길에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각 인간과 일치시키시는 이 길에서 교회를 멈추게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의 이 길은 인간의 현세적 복지와 영원한 복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서 반드시 따라 걸어야 하는 첫째가는 길이다”(「인간의 구원자」, 13~14항).
 
4.4. 보편 사제직과 구별되는 직무 사제직64)
 
이러한 교회의 삼중 직무에 모든 하느님 백성이 참여한다는 것이 교회의 입장이다. 이는 초대 교회부터 시작된 이해이다. 이를 보편 사제직, 또는 일반 사제직, 공동 사제직이라 일컫는다. 사제란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만한 신령한 제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리도록 선택된 사람’(1베드 2,4~10; 묵시 1,6; 5,10; 20,6 참조)이다. 이와 같은 넓은 의미에서 사제직에는 평신도들의 일반 사제직과 성직자들의 직무 사제직의 구별이 없다. 그러나 종교 개혁 이후 에제키엘 예언서 34장의 ‘목자’라는 개념이 직무 사제직과 연결되면서 구별이 첨예화되었다. 「교회 헌장」은 이 구별을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른”(10항) 것이라고, “봉헌에서나 영성체에서나, 똑같지 않고 저마다 다르게”(11항) 참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구별은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에 더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2항).
 
사제란 “신자들 가운데에서 성품에 오른” 자이다.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으로 교회를 사목하도록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다”(「교회 헌장」, 11항). 이 헌장은 사제를 다시 주교(18~27항), 신부(28항), 부제(29항)로 구분한다. 사제란 성품성사의 힘으로 복음을 전하고, 신도들을 사목하고,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며, 성체의 제사라는 성무를 집행하는 자, 그리스도를 대행하고,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고, 신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사와 결합시키며, 그리스도의 제사를 미사 성제로 재현하며 적응시키는 자, 회개하는 신도와 병든 신도들을 화해와 위안의 직무로 돕는 자, 신도들의 요청과 기도를 하느님께 중재하며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가르치는 자, 주의 법을 묵상하고 읽은 것을 믿고, 믿은 것을 가르치며,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는 자이다(28항 참조). 
 
그러나 직무 사제직은 평신도에 대해서 특권을 누리는 직무가 아니다. 그가 수행하는 기능에서 평신도와 차이를 드러낼 뿐이다. 직무 사제직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룩한 힘 때문에 사제적 백성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전체 하느님 백성의 이름으로 희생 제사를 봉헌하는 것이다. 직무 사제의 본질은 복음 선포와 성사 수여에 있다.65) 이에 대하여 평신도들은 “자신의 왕다운 사제직의 힘으로 성찬의 봉헌에 참여하며, 여러 가지 성사를 받고 기도하고 감사를 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극기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제직을 수행한다”(「교회 헌장」, 10항).
 
 
5. 교회와 제 종교
 
5.1. 다종교 상황
 
현대 세계는 철학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다원주의가 보편화된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문화적 다원주의, 사회적 다원주의, 정치적 다원주의 등이 그렇다.66)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다종교 상황 속에서 어느 특정 종교만이 자기의 절대성이나 우월성을 주장하기 어렵다. 이러한 다종교 현상 속에서 한 종교가 타종교에 대하여 취할 수 있었던 입장은 여러 가지이다. 어떤 종교도 참된 것일 수 없다는 무신론적 입장, 자신의 종교만이 참되며 다른 종교는 거짓이라는 절대주의적 입장, 모든 종교가 동일하게 참되다고 보는 상대적 입장, 모든 종교가 하나의 참된 종교의 진리에 참여하고 있다는 포괄주의적 입장이다. 이러한 다원주의적 종교 상황 속에서 어떻게 교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며 다른 종교와 대화를 진척시킬 수 있느냐는 중요 과제를 안고 있다. 가톨릭교회는 과거의 절대주의적 입장에서 전환하여 포괄주의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67)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교회 헌장」, 16항). 이러한 교회 정신은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선언」에서 더욱 진전을 보인다.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힌두교, 불교를 비롯한 타종교]에서 발견되는 옳고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양식과 행동 방식뿐 아니라 그 계율과 교리도 진심으로 존중한다. 그것이 비록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고 가르치는 것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더라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진리의 빛을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2항).
 
5.2. 타종교와의 대화
 
가톨릭교회는 더 나아가 타종교와의 만남과 대화의 필요성도 긍정하고 있다. “교회는 지혜와 사랑으로 다른 종교의 신봉자들과 대화하고 협력하면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생활을 증언하는 한편, 다른 종교인들의 정신적 도덕적 자산과 사회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증진하도록 모든 자녀에게 권고한다”(「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선언」, 2항). 따라서 종교 간의 대화는 상대방을 제압한다든지 서로 완전한 합의에 이르거나 어떤 우주적, 보편적 종교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원칙68)을 포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회의 고유한 정체성을 보존해야만 하는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69) 다원화된 종교 상황 속에서 종교 간 대화는 교회가 교회 밖을 넘어서 하느님의 구원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고 있다. 이는 교회의 보편적 사명에 상응하는 일이다.
 
5.3. 상대주의의 위험성 인식
 
이러한 대화의 원칙은 하나의 이론으로서 제시될 뿐, 실제적으로는 대화의 동등성을 주장하며 타종교에 대한 상대주의적 입장으로 혼합주의 내지 절충주의, 또는 평행주의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실제로 가톨릭 신자들 간에 이러한 혼동을 발견한다. 이 종교도 좋고 저 종교도 좋은 것이 아니냐는 종교무차별주의의 풍조가 눈에 띄기도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유일한 계시의 완성자요, 인류 구원의 유일한 중재자라는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상실한 위험성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선언」은 타종교의 진리를 인정하고, 대화를 시도하면서도 교회가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사명을 상기시키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또 끊임없이 선포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요한 14,6) 그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풍요로운 종교 생활을 한다”(2항). 더 나아가 최근 교황청 교리성의 회칙 「주님이신 예수님」70)은 교회의 정체성과 더불어 상대주의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으로 대변될 수 있는 진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절대성과 완전성, 상대화될 수 없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 혹은 고유성,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성서의 특성, 영원하신 말씀과 나자렛 예수의 인격적 일치성,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적 보편성과 유일성, 교회의 보편적 구원의 중재성, 하느님 나라와 그리스도 나라와 교회의 불가분리성, 가톨릭교회 안에 있는 하나의 그리스도교회의 실재성 등이다(4항 참조). 그리고 종교다원주의로부터 유래하는 위험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교회의 변함없는 선교 사명인 복음 선포는 오늘날, 실제적으로뿐 아니라 원칙적으로도 종교다원주의의 정당화를 모색하는 상대주의 이론들 때문에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러한 이론들은 계시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철학적, 신학적 성격을 띤 어떤 전제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러한 것들 가운데 몇 가지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진리는, 비록 그리스도교 계시라 하더라도, 파악이 불가능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신념, 어떤 사람에게는 진리인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것에 따라 진리 자체에 대하여 갖는 상대주의적 태도들, 서양의 논리적 사고방식과 동양의 상징적 사고방식을 근본적인 대립 관계로 설정하는 일, 이성을 이해의 유일한 원천으로 여김으로써, ‘눈길을 높이 올려 존재의 근원을 명상하는 데로 나아갈 능력을 상실하는’ 주관주의, 역사 안에 존재하는 결정적이며 종말론적인 사건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서 겪는 어려움, 역사 안에 하느님께서 단순히 출현하신 것으로 축소시켜 버린, 영원한 말씀의 역사적 강생에 대한 형이상학적 차원의 결여, 신학적 연구에서, 그리스도교 진리와 맺는 양립성, 체계적 연관성, 일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다양한 맥락에서 무비판적으로 이념을 취하는 사람들의 절충주의, 마지막으로, 성전과 교도권을 도외시하고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경향이다”(4항).
 
분명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이 여전히 보존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타종교에 대한 이해와 배려나, 타종교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타종교와의 대화란 정체성 없이 가능하지 않다. 정체성 없이 타종교와 타문화에 대한 존경과 가치 긍정도 가능하지 않다. 필경 대화에 있어서 “참된 만남의 장소란 나와 상대방과 무관한 어떤 변증법적인 중립적 영역이 아니라 나 자신이 되면서도 또 상대방도 공유하고 있는 자기”71)일 것이다.
 
 
6. 교회와 세상
 
6.1. 세상을 향해 개방된 교회
 
‘세상’이란 폭넓은 개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에 의하면, 세상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말씀의 빛과 당신의 은총의 능력이 교회 제도를 통하여 도달되도록 시도하시는 온갖 실재와 그 현실이다(3항 참조). 한때 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72)는 입장을 보인 적이 있다. 이 문구는 오랫동안 교회 밖의 세상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식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지리학적 이유와 더불어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종교에 대한 인식으로 이러한 입장을 수정하게 되었다. 1953년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정식에서 교회를 ‘가톨릭교회’로만 규정한 레오나르도 휘니(Leonardo Feeney) 신부가 교황청으로부터 엄격주의자로 단정되어 파문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의 세상에 대한 이해가 변화하였음을 보여 준다. 배타적 의미의 “교회 밖의 구원이 없음”의 공식이 긍정적 의미의 “교회 내에 구원이 있음”의 공식을 위하여 포기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73) “교회 밖에는 구원 없음”이라는 정식은 “누가 구원될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누가 구원에 봉사할 책임을 지녔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다.74)
사실 한때 세상은 ‘세속’이란 단어로 교회 밖을 의미하였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상은 선민과 구별되는 이방인이 속한 영역을 뜻하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에게 세상은 경계선을 넘어선 비그리스도인들이 속한 것을 뭉뚱그려 지시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하느님에 의해 소집된 모임이라고 하면, 세상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교회의 설립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만이 그 대상이 아니었다. 이방인들에게도 개방되어 있었다(마태 8, 11~12; 루가 13,28~29 참조). ‘하느님 나라’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모든 민족이 그 대상에서 배제되지 않는다. 예수에게 이방인에 대한 개방성이 없었다고 한다면, 훗날 이방인 선교란 엄두조차 내지 못할 일이었을 것이다.75)
 
「교회 헌장」은 유다인과 이슬람교도들은 물론 무신론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의 구원이 개방되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구원 계획은 창조주를 알아 모시는 사람들을 다 포함하며, 그 가운데에는 특히 모슬렘도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며,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심판하실 자비로우시고 유일하신 하느님을 우리와 함께 흠숭하고 있다. 어둠과 그림자 속에서 미지의 신을 찾고 있는 저 사람들에게서도 하느님께서는 결코 멀리 계시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고(사도 17,25~28 참조), 구세주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1디모 2,4 참조).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다”(16항).
 
교황 바오로 6세의 회칙 「현대의 복음 선교」는 소위 미신이라고 부르는 민간 신앙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민간 신앙은 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신앙은 신앙을 위해서라면 헌신과 영웅적 희생도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성, 섭리, 사랑, 현존 등 하느님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예리한 감수성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는 보기 드문 인내심,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십자가의 의의, 해탈, 귀의심, 신심 등 내적 자세도 볼 수 있다.[…]선도만 잘된다면 이 대중적 신앙심은 오늘의 일반 대중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하느님과의 참된 상봉을 이루게 해 줄 것이다”(48항).
 
이와 같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새로운 이해는 교회의 본질을 수정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보편 구원 의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세상에 대한 개방성에 대한 재인식이요, 하느님과 세상의 친교와 일치를 목표와 사명으로 하는 교회 본질에 대한 재인식이다.
 
6.2. 세상을 위해 선택된 ‘대조사회’로서의 교회
 
새로운 이해와 더불어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계획은 이스라엘 선택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구원이 먼저 이스라엘에게 선포된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도 이스라엘을 활동의 대상으로 삼았다(요한 1,31; 마태 10,6.23; 5,24). 그러나 이스라엘만으로 국한되지 않았다. 구원으로서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의인만이 아니라 죄인들에게까지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해 선포된다(마태 21,31 참조).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도 예수 그리스도가 열두 사도를 선택함으로써 출발한다. 옛 이스라엘을 완성하는 새 이스라엘 교회는 새로운 기준을 내세운다. 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에는 유다인, 그리스인, 그 밖의 이방인들도 세례를 통하여 참여하게 된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소집은 세상의 모든 민족으로 확대된다.76) 
 
로핑크(G.Lohfink)는 ‘대조사회’로서의 교회를 주장하면서, 교회가 세상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한다.77) 이 구별은 혈연이나 민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골로 3,11 참조). 엄밀하게 세례에 기인하는 것만도 아니다. “교회의 품 안에 ‘몸’으로만 머물러 있고 ‘마음’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도”(「교회 헌장」, 14항 참조)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면서도 교회의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는 ‘대조사회’는 선택의 의미를 숙고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선택은 인간의 어떤 공적이나 가치로 얻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철두철미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기인한다. 물론 선택됨은 선택된 자의 특전을 의미한다. 그러나 특전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하느님의 선택은 항상 타자를 위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그 특전만큼이나 거기에 부합하여 살아갈 실천을 요구한다.78) 하느님의 선택은 교회로 하여금‘교회 안에는 구원이 있다’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보여 줄 만큼 구별되는 대조사회로서의 정체성을 요구한다. 그 정체성은 그 누구보다도 삶 전체를, 그리고 죽음마저도 전적으로 타자를 위해 바쳤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궁극성은 여기에 있다. 또한 대조사회로서의 교회의 정체성 역시 여기에 있다. 위타적 존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다(마태 8,22; 9,9; 마르 8,34 참조). 세상을 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을 믿는 일이다. 세상의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적 의지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소집된 교회는 대조사회로서의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백성’일 수 있고, 전적으로 타자를 위해 사셨던 위타적 존재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일 수 있으며, 세상을 위한 징표요, 성사일 수 있다.79)
 
 
결 론
 
격변하고 있는 현대 세계 안에서 교회의 상태를 잘 알고,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써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담고 있는 「교회 헌장」 등의 문헌을 통하여 교회 자신의 정체성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교회는 자신을,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불린 모임으로 이해한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근거와 기준으로 출발한다. 즉 교회는 하느님으로부터 불린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주인은 성직자도 아니요, 평신도도 아니다. 바로 삼위일체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빠지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지라도 데모 모임이거나 사교 모임에 불과할 뿐이지 교회는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불린 모임으로서 이 교회는 구약에서 준비되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되고, 성령 강림으로 공적으로 드러났다. 이 모임은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 교회의 사명은 하느님과의 친교와 일치에서 완성된다. 이러한 일치는 인간들의 일치와 친교, 더 나아가 자연과 인간의 친교와 일치를 요청한다.80) 즉 피조물 모두가 참여해야 하는 보편성을 지닌다(로마 8,  20~21 참조). 그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모든 것’(1고린 15,28 참조)이 되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만민의 구원을 위한 정상적인 방법이요, 기관이며, 길이기 때문에 그 사명은 보편적일 수밖에 없다.81) 이러한 보편적 사명 때문에 선택된 교회는 하나이어야 하고 거룩해야 하는 ‘대조사회’를 이룩해야 한다. 이러한 사명과 목적 때문에 교회는 그에 필요한 직무와 권한을 받았다.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며, 다스리는 임무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가르치고, 모두가 다스릴 수는 없다(1고린 12,29~30 참조). 그러나 이 임무에는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기는 하지만’(「교회 헌장」, 10항 참조) 교회 구성원 모두가 참여한다(「교회 헌장」, 11~12항; 「인간의 구원자」, 14항 참조). 
 
오늘날 교회는 설립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수행하기에 많은 어려움과 대면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저마다 진리를 주장하는 다원주의 종교 상황이다. 여기서 타종교와의 만남과 대화가 요청된다. 교회에로 불린 것은 세상의 구원을 위해 불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정체성을 잃고서는 대화도 가능하지 않고, 타종교와 타문화에 대한 존경과 가치 긍정도 가능하지 않다. 또한 정체성 없이 세상의 빛과 소금, 즉 세상의 ‘성사’도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으로 선택된 사람들이다. 하느님께로부터 선택된 자로서의 특권이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선택은 선택된 자의 특전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러했으며, 그리고 열두 제자들, 사도 바오로가 그러했다. 새로운 백성으로 하느님께 부름 받은 모임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교회 안에 구원이 있음’을 삶으로써 보여 주는 ‘대조사회’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만 세상을 위한 위타적 공동체가 될 수 있다.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흥정된 의인 10명은 소돔과 고모라의 구원을 위한 존재였다. 바로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한 존재가 아니겠는가?
 
교회에 대한 많은 질문에 답하고자 하였다. 아직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교회 이대로 좋은가?’ 이 질문에 답은 자명하다. 현실 교회가 나름대로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을 제시한 공의회의 정신을 부단히 추구하고자 계속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 한국 교회는.
 
본 고에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이 사목적 차원에서 친교 공동체로서 교회를 다루었다는 특징을 충분히 다루지 못했다. 또한 헌장이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으로서 성직자, 평신도, 수도자를 언급하였지만, 신부와 부제에 대해서는 극히 미미하게 취급하였다. 또 주교직을 중심으로 교계 제도를 장황하게 언급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평신도를 부각시켰다. 이런 점에서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서도 성찰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교회의 모범이요 전형이신 마리아와 교회의 관계를 언급조차 하지 못했다. 논문 분량의 한계라는 핑계와 필자의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변명을 대신한다. 아울러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많은 연구를 기대한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홈페이지 신학강좌 자료실(신학과 사상 50호)에 있는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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