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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대 <셈족>의 天國觀 - 3층우주 카테고리 |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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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삼용 쪽지 캡슐 작성일2010-11-11 조회수361 추천수0 신고

천국,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Ⅰ. 천국, 하늘나라, 하느님 나라

                                         - 이성우 신부

 

  천국(天國)에 대해서 일반 대중,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가. 하느님이 계신 곳, 영원한 삶, 부족함이 없는 풍요의 낙원, 선하고 바른 지상에서의 삶에 대한 결과로 얻어지는 곳, 가난과 고통, 착취, 박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장소 등등, 각자가 지닌 이미지와 표상은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하다. 예수의 가르침 중 핵심적인 주제 역시 하느님 나라, 즉 천국이다.

성서는 ‘하느님 나라''''와 ‘하늘 나라’를 구분없이 사용하는데, 사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을 직접 부르는 것조차 외경스럽게 여겼던 유다인들의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이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비유로 설명해주셨다.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 것은 우선 하느님 나라가 교회 역사 안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왔고,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1. 초대교회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초대교회는 하느님 나라가 머지 않아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느님 나라는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이 가졌던 가장 큰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일상적인 현실과 완전히 다른 종말론적 실재로 이해했다. 지금 현실과는 전혀 다른 삶, 세상 종말에 가능한 삶! 사람들은 현세적이지 않고 천상적인 어떤 나라를 기대했다. 현세가 끝나고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상들도 다양했다. 꽃이 만발한 정원, 결실이 풍성한 들판, 착한 목자의 초원, 평화와 사랑이 흘러넘치는 곳, 성인들의 거처, 영원한 빛, 낙원 등등.

  사람들의 관심은 그런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해야 도래하고, 어떻게 그 나라에 들어가느냐에 있었다. 당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우선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윤리-도덕적인 의미에서 잘 사는 것이었다. 죽은 후에 각자는 생전의 행업에 따라 심판을 받고 하느님 나라는 그 보상으로 주어진다고 믿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초대교회의 표상은 종말론적이고, 윤리적이며, 개인적인 특성을 지닌다.  

중세에 이르러, 동방교회(비잔틴 제국)에서는 제국과 교회가 하나라는 강한 의식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황제와 사제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공동 과제를 갖게 된다. 서방교회(라틴 교회)에서 누구보다도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상이 발전되었다. 그는 하느님 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했다. 그는 하느님의 통치를 모든 사물을 질서정연하게 섭리하시는 하느님의 뜻으로 이해했다. 모든 질서를 섭리하시는 이 뜻은 최고의 힘이며, 하느님은 그 힘으로 인간의 선한 뜻은 밀어주고, 악한 뜻은 심판하여 모든 것을 당신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정해진 목표에로 이끄신다고 아우구스티노는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그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천년왕국이 끝나는 종말에 등장한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는 영원한 평화와 정의로 충만할 것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최고의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하느님의 통치를 모든 것을 하나의 목표에로 이끄시는 그분의 뜻으로 이해했다. 그에 의하면 하느님은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하는 제1원동자이며, 동시에 마지막 목표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생명에로 부르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계획에 따른 마지막 목표에로 이끄신다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하느님 나라는 신학이라는 학문의 핵심주제에서 밀려났다. 단지 18세기 후반 철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거론되기 시작했고, 19세기 역사철학에서 하느님 나라는 많이 논의되는 주제가 된다. 윤리철학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는 칸트는 하느님 나라를 윤리적인 최종목적인 최고선이며, 교회는 그 최고선을 실현하는 윤리적 공동체로 보기도 했다. 역사철학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는 세계사의 종착점이며 의미이다. 그들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분열된 모든 것(주체와 객체,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신앙과 이성, 개인과 공동체)을 포괄하는 화해의 목표점으로서 인류역사의 발전을 밀어주는, 보이지 않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역사철학의 하느님 나라 이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마르크스주의가 지향하는 이상사회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인류 역사는 바야흐로 조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마지막 목적지에 도달했으며 그런 이상사회가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다는 사상이 19세기 말까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바뀐다. 진보적이고 현세지향적인 하느님 나라 이해는 성서신학으로 견지될 수 없음이 밝혀졌고,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은 서양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을 잠재웠으며, 신학에서는 하느님 나라를 종말론적 목적으로 보는 견해가 뒷전으로 밀려난다.

  ㆍ 시대의 흐름에 따른 천국관

   ① 고대 셈족의 천국관

고대 근동 지역에 살았던 셈족은 이스라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내세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우주를 3층 구조로 이루어진 거대한 집이라 여겼다. 신들이 사는 천국인 최상층과, 인간이 사는 땅인 중간층, 열등한 신과 죽은 자들이 사는 지하 최하층이다. 천국의 신과 지하의 신들은 지상에 사는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들과 교류를 할 수 있다. 이들에게서 죽음은 3층 구조의 우주 안에서 자신이 사는 위치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들은 지하에서 먼저 간 조상들을 만나 함께 지낸다고 생각했다. 지하에도 등급에 따라 좋고 나쁜 자리가 있어 그 자리 배정은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그리고 후손들이 자신의 무덤에서 얼마나 제사를 잘 지내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으며, 조상들은 그 대신에 후손들에게 축복을 내리고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겼다.

참고문헌 : <천국의 역사>ⅠㆍⅡ, 콜린 맥다넬ㆍ베른하르트 랑 지음, 고진옥 옮김, 동연출판사.

  ② 유다인의 천국관(1세기경)

예수 시대 유다인들은 세 부류의 각기 다른 내세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에세네파이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사두가이들은 육체가 멸할 때 영혼도 함께 멸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삶을 부정하며 영혼도 이 세상에서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반면에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었다. 그들은 새 이스라엘 건설을 꿈꾸면서 율법을 잘 지킨 신실한 자만이 죽은 후에 이 재건사업에 참여할 수 있고, 이교도 지배 하에서는 이룰 수 없었던 정결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으로 여긴 것이다. 에세네파는 육체가 죽은 뒤에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했으며 영원한 휴식을 갈망했다.

  ③ 교부시대의 천국관

대표적인 것이 이레네오와 아우구스티노의 천국관이다. 이레네오는 천국을 영화로운 물질세계가 회복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 땅 위에 이루어질 천국은 인류의 번성과 축복이 약속된 물질 세계이자, 그리스도가 통치하게 될 메시아 왕국이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에 반해 금욕적인 면이 강하다. 그에 의하면, 천국은 완전한 영의 세계이며, 육체를 갖지 않는 영혼들이 휴식을 취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는 곳이다. 하느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그리고 다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라고 주장하는 그의 내세관은 천 년이 넘도록 후대 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④ 중세의 천국관

성서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과 같은 영원한 도시,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곳, 그리스도와 사랑의 결합을 이룰 수 있는 곳, 중세 사람들은 이 세 가지 사상을 바탕으로 새롭고 독특한 천국관을 형성핸갔다. 이들 중 두 번째 사상의 주축을 이루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천국관을 체계적으로 연구 정리하여 그리스도교 신학의 모델을 이루었다. 그는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보다 좀더 완전하게 하느님을 볼 수 있고 더 많이 축복을 받는다고 하였다. 개인이 세상에서 쌓은 덕의 양에 따라 천국에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결정된다는 것, 즉 영적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영혼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모두 완벽한 행복을 체험하게 된다고 한다.

  ⑤ 르네상스 시대의 천국관

  이 시대의 신학자와 예술가들은 자신의 천국관에 인간적인 특성을 도입하기 위해 천국을 양면적인 모습으로 그렸다. 한 장소에서는 하느님의 장엄한 현존이 부각되도록 했고,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그들 나름대로 피조물로서 독립된 위엄을 지키며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구현했다. 이전에는 단순히 신을 위해서 봉사하던 천사들도 이제는 연인들을 위해 세레나데를 부르고, 꽃면류관도 씌워주며 천국에 온 것을 환영하는 포옹도 해준다. 중세에 비교해서 엄격성이나 고정성, 계급성과 같은 특성들은 사라졌다.

  ⑥ 종교개혁 시대의 천국관

  루터와 캘빈, 가톨릭 내에서의 개혁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폴티, 프랑스아 드 살 등, 이런 이들의 천국관 중에 공통점만 모아본다면 이렇다. 천국은 하느님을 위한 장소이며, 성도들의 영원한 삶은 하느님 중심으로 그분을 찬미하는 영원한 예배 의식에 몰두해 있거나 혼자 명상을 하기도 하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세속적인 행동이란 있을 수 없다. 천국은 하느님의 계시와 예배의 중심지이며, 거룩한 인물들과 경건한 대화를 나누는 종교적인 장소인 것이다.

  ⑦ 근ㆍ현대의 천국관

  종교개혁 시대의 하느님 중심적인 엄격한 천국관은 점차 인간 중심적인 내세관으로 발전한다. 또한 물질적인 풍요와 인간적인 사랑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인간 중심적인 천국관은 절정에 달한다. 신학자, 대중 작가들은 천국을 성도들이 자신의 친척이나 친구들을 만나는 사회적인 공동체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천국에 대한 개념 논쟁은 점차 사라지는 추세이다. 하느님의 개념이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에 천국에 대해서도 공통된 하나의 개념을 만들어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천국은 확실하게 이거다라고 말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라는 사실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2.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천국 즉 ‘하느님 나라’(Kingdom of God)에 대한 표상이 역사 안에서 어떻게 변천해왔는지 간단히 살펴본 바로 우리는 공통되는 특징 세 가지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하느님 나라는 ‘종말론적인’ 실재라는 사고이며, 둘째,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의 통치와 다른 통치라는 것과, 셋째,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윤리-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 특징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기에 앞서, ‘나라 또는 ’왕국‘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정리해보는 것이 좋겠다. 예수께서는 매우 자주 ’하느님 나라‘, ’하늘나라‘에 대해서 비유로 이야기하셨지만, 이 ’나라‘ 또는 ’왕국‘이라는 표현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 쉬운 것 같다.

  말은 항상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외적, 육체적, 가시적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내적, 영적, 비가시적 차원이다. 문제는 이 두가지 차원이 ‘말’ 그 자체로는 구분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모든 종교적인 언어는 우선 외적으로 오해될 수 있는 위험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누구든지 위로부터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고 하시자, 니고데모는 예수께 이렇게 반문한다 :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요한 3,4). 이렇게 내적이고 영적인 말을 외적으로 파악하면 종교의 언어는 불가능하고 우스꽝스러운 말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언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라’ 혹은 ‘왕국’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귀에 아주 익숙한 용어다. 그러나 이 용어를 외적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었고, 그 당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이 용어를 외적으로 파악한 듯하다(요한 18,33-38; 루가 23,1-4; 마르 15,1-15 참조).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학수고대하던 ‘하느님의 통치’를 예수는 ‘하느님 나라’로 표현했고, 모든 내적인 언어의 운명이 그렇듯, 이 용어도 어떤 외적인 형태, 제도와 체제를 갖춘 하나의 가시적인 ‘나라’로 오해되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즉시 묻고 싶어한다. 하느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느님 나라는 어떤 형태의 나라입니까? 어느 곳입니까? 언제 옵니까? 그러나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하느님 나라는 이것이다”라고 규정하지 않았고, 것, 알 수 없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는 어떤 것을 통해서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하느님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다”라고 비유로 설명하신다. 왜 그러셨을까? 그것은 사람들이 모르는 미지의 것은 비유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을 볼 수 없는 장님에게 빛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님이 알고 있는 어떤 무엇, 빛과 유사한 무엇에 비유하는 길뿐이다. 국화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장미를 알려주는 길은 ‘장미는 국화와 비슷하다’는 식으로 설명해야 하는 것처럼.나라는 직접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 없고 들어가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아는 어떤 상징을 빌어서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여기서 “들어간다”는 말도 어느 특정구역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의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상징적 표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 미지의 것을 설명하는 방법들이 비유, 신화, 우화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유나 상징은 안내 표지판에 불과하다. 이 정표에 있는 화살표는 그 자체가 목적지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신갈 분기점에 있는 부산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고 그 이정표가 바로 부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부산에 갈 수 없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비유로 설명하실 때 예수는 누구나 알고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한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질서와 동일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소재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 실제로 어떤 농부가 땅에 씨를 뿌려 놓기만 하고 저절로 자라도록 태평하게 낮잠을 자며(마르 4,26-29 참조),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도록 그대로 놔두겠는가?(마태 13,24-30 참조). 그리고 어떤 목자가 아흔아홉 마리 양은 방치해놓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나서겠는가?(루가 15,1-7). 비유는 바로 사람들이 모르는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을 수 없다. 그렇게 묻는다면 너무 무리한 질문이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는 무엇과 같습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 ‘나라’는 볼 수 있고 확인 가능한 어떤 제도와 법, 체제를 갖춘 외적인 ‘나라’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나라’도 아니고, 어느 특정한 ‘곳’에 세워질 왕국도 아니며, 시간을 의미하는 어느 특정한 ‘연도’에 도래할 통치 체제도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사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루가 17,21).

  3. 결코 미룰 수 없는 초대

  하느님 나라는 ‘이 다음에 언젠가’(미래) 도래할 하느님이 통치하실 왕국이라는 사상은 ‘지금 여기’는 아니고 항상 다른 곳, 다른 때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가 ‘세상종말’(인류 역사의 끝으로 이해된)에, 미래의 어느 때인가 도래할 왕국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은 아주 편해진다. 우리는 지금 삶의 결정을 내리지 않고 내일로 미룰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을 내일로 유보하는 것보다 더 안일한 것은 없다. 그래서 예수는 삶을 내일로 미루는 사람은 불행하다고(마태 24,45-51; 루가 12,41-46 참조), 어리석으니(마태 25,1-13 참조) 늘 “깨어 있으라”(마르 13,33-37)고 당부하신다.

  왜 우리는 삶을 늘 내일로 미루는가? 그것은 우리가 지금 당장은 살기 싫어서이다. 지금은 다른 할 일, 충족시키고 싶은 욕망이 있다. 우리에게는 삶을 내일로 미룰 핑계와 이유가 우리에게는 더 중요하게 보인다. 우리는 아직 많은 것들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이 다음에 언젠가 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다”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우리는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다. 해야 할 일이 많고, 이루어야 할 꿈도 많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할 일‘이 있어서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못하고, ’할 일없는 이들‘, 거리에서 방황하는 이들, 거지, 방랑자들만이 하느님나라에 들어간다(루가 14,15-24 참조).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잔치’에 즐겨 비유하셨다. ‘잔치’는 삶을 즐기는 것을 상징한다. 할 일이 많은 사람, 일에 쫓기고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휴식과 즐김이 포함된 인간답게 사는 생활을 미래로 연기한다. 지금은 쉴 새 없이 일하고 은퇴한 다음 쉬고 즐기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항상 미래를 생각하고 언제나 즐김을 미룬다. 언젠가 모든 조건이 갖추어지면 삶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유에서 하느님은 지금 여기서 삶을 즐기자고 초대하신다. 이 초대는 매일 매순간 온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니 안 되고, 일이 끝나면(은퇴) 인간답게 살아보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즐김과 행복과 축복을 미래로 유보함으로써 하느님의 초대를 거절한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오묘함을 즐기라고 하느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인간과의 만남을 즐기라고 초대하신다. 이 초대는 언제나 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을 볼 시간이 없다. 우리는 늘 바쁘다고 변명한다. 삶이 우리를 환희로 초대하는데 우리는 거절하면서 ‘인생은 고통스럽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인물, 신분이 높은 사람, ‘중요한’(?) 직책을 맡은 사람, 소위 주요 인사들은 할 일이 많아 너무 바쁘기 때문에 삶의 초대를 거절한다. 그 대신 할 일 없는 사람들은 초대를 거절한다. 그 대신 할 일 없는 사람들은 초대에 응하고 하느님과 삶이라는 잔치를 즐긴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하는 지상 과제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건설’해야 할 어떤 ‘과업’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무엇’이고, 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초대’이다. 우리는 그런 초대에 응할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을 열기만 하면 된다. 놀랍고 충격적이지만 꼭 보아야 한다. 왜 바쁜 사람은 삶을 놓치고 ‘한량’은 삶을 즐길 수 있나? 할 일 없는 사람은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순간에 산다. 그들에게는 내일이 없다. 그래서 오늘을 살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있지 않고 미래에 도래할 것이라는 소위 종말론적 유보는 그에 대한 예수의 비유와는 걸맞지 않는 발상이 아닌가.

  4. 부자와 하느님 나라

  위에서 살펴본 하느님 나라의 비유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 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 10,25)는 예수의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부자가 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나? 왜 하느님과 맘몬(돈, 명예, 권력)을 동시에 섬길 수 없나?(마태 6,4; 루가16,13). 부자나 여러 가지 ‘일’에 바쁜 사람이 삶의 진수를 놓치는 이유는 무엇이고, ‘가난한 사람’이나 할 일 없이 서성이는 사람이 삶이라는 잔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부자라고 해서 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 물질, 재산을 축적하느라고 삶을 낭비한 사람에게 있다. 돈이나 재물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재물이 삶의 모든 것을 가능케 해준다고 여겨 재물에 집착하거나 축재하는 일에 생각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외적으로 가난한 사람도 ‘부자’일 수 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부자’란 무의미한 일에 바쁜 사람, 사소한 일에 바쁜 사람, 외적인 일에 분주한 사람, 재산축적에 바쁜 사람,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바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고, 잃어버린 사람이다. 온갖 ‘일’에 마음과 영혼을 빼앗긴 사람, 내면의 자기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쓰지 않는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얻는다 해도 자기 자신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루가 9,25).

  부자를 재물,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해 가장 소중한 “외동딸”을 악마에게 팔아넘기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동화가 있다. 여기서 “외동딸”은 그 사람의 영혼을 상징한다. 부자는 돈과 재물, 명예를 얻기 위해 가장 값진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고 내팽개친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시나 예술은 무의미하고, 종교도 의미없고, 하느님도 의미없다. 사랑은 더욱 무의미하다. 그런 것들은 시간 낭비요 돈 낭비다. “사랑이, 기도가 밥 먹여 줍니까?” 그런 것들은 돈이 안된다. 그런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사랑, 우정, 자기 영혼이 아니라, 돈이나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것들이다. 맘몬(돈, 명예, 권력)을 섬기는 사람은 사랑을 쓸모없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사람과 관련된 것이고, 돈을 추구하는 마음은 물질과 관련을 맺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간보다는 “일”이나 물건이 더 중요하다. 어떤 일 때문에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청을 거절하거나, 물건을 손상했다고 사람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재물과 사랑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재물,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영혼, 우정, 사랑, 인간을 볼 수 없으며, 바로 그렇게 때문에 하느님의 초대에 응할 수 없다. 그는 신경써야 할 일이 많아서 늘 바쁘고 자신을 위한 시간이 없다. 하느님의 초대는 다양하다. 그것은 외적인 눈, ‘부자’의 눈에 돈도 안 되도, 쓸모 없으며, 이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눈에 ‘비실용적인 것’, ‘쓸모없는 것’, ‘돈이 안되는 것’,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는 삶’이 하느님의 초대다. 하느님의 초대는 비실용적이다. 시, 기도, 우정, 사랑, 아름다움, 예술은 비실용적이다. 사랑을 해서 돈이 쏟아진다면, 세상에서 성공한다면, 명예와 권력을 얻는다면, 모든 사람은 사랑할 것이다. 세상의 잣대로 잰다면 하느님의 초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우리가 아직 ‘계산적인 사고’에 물들지 않았을 때, 우리는 우정과 사랑 때문에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거나 바다의 파도를 보고 감동하기도 한다. 떨어지는 단풍잎을 보고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한다. 친구의 슬픈 마음을 달래주느라 저녁 내내 함께 고심하기도 한다. 사랑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도 없다. 음악에 취해 아무것도 못할 때도 있다. 시를 읽느라고 약속조차 잊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 ‘계산적인’, ‘실용적인’ 생각을 갖게 되면, 그런 모든 것이 어렸을 때, 현실을 몰랐을 때 가졌던 비실용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백해무익한 몽상적 낭만이라고 여기게 된다. 어른은 계산적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계산적이지 않다. 계산적인 사람은 사랑조차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현명함이라고 여긴다.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사랑이고,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따라가는 것이 현명한 것인데, 계산적인 사람은 사랑을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사랑에 자신을 내맡길 수 없다. 손해볼까봐, 근본적으로는 자신을 잃을까봐 우리는 사랑을 두려워한다.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마르 10,15 병행구).

  다시 말해서 하느님 나라(하느님 왕국, 다스림, 통치)는 외적인 형태로 확인할 수 있는 다스림이 아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형태의 통치체제나 제도와 하느님 나라를 동일시할 수 없다. 그리고 하느님의 다스림이 지금 우리에게는 유보되어 있고 ‘세상 종말’ - 인류의 대환란이라는 의미에서의 - 에 가서야 드러나리라는 소위 종말론적 유보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비유에 걸맞지 않다. 마지막으로 ‘계산적인’ 생각을 지닌 ‘어른 부자’의 눈에는 하느님의 진리가 감추어져 있고 ‘철부지들’(어린아이)의 눈에는 보인다(마태 11,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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