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산책] 내 방식보다 중요한 메시아의 방식---박상대 신부님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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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0-12-21 | 조회수409 | 추천수0 | |
[복음산책] 내 방식보다 중요한 메시아의 방식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루가 3,19- 20) 그 이유는 요한이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가 이복동생 필 립보(마르 6,17)의 아내 헤로디아를 처로 맞아들인 일과 그 밖의 잘못 을 들어 자기를 책망했기 때문이다. 성서는 헤로디아가 필립보의 아내 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여부를 밝히기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헤 로데 대왕의 아내 10명에서 태어난 자식들과 3세들에 의한 족보가 상당 히 복잡하기 때문이다. 헤로데의 족보야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세 례자 요한의 활동이 감금과 함께 막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세례자 요한의 활동이 종결됨과 동시에 메시아 예수의 활동이 시작되었 다. 물론 예수님의 세례는 그 직전에 있었던 일로 보아야 한다. 루가복 음에 의하면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 예수님은 40일간의 광야 대피정 을 하였다. 그리고는 본격적인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셨다. 우선 고 향 나자렛에서 이미 구약에 예언된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셨 다. 이 은총의 해는 단식과 기도로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던 선구자 의 시대와는 달리 이미 도래한 메시아의 현존을 축하하는 잔치와 구원 의 시대를 말한다. 메시아 시대의 잔치와 구원은 첫째, 마귀 들린 사람 들과 갖가지 병과 불편함으로 고통 받던 수많은 병자들이 성해지고, 죽 은 사람까지 생명을 되찾는 기쁘고 놀라운 일로 드러나며, 둘째, 어부 들과 세리를 불러 제자로 삼고, 이들에게 하늘나라와 참된 행복을 가르 치는 복음으로 충만 된다.(루가 4,1-7,17) 메시아의 시대는 안식일의 주인, 즉 율법을 내린 주인으로 군림하는 예수님 스스로가 아버지로 모 시는 창조주이시며 유일한 하느님의 권위로 보장된다.(이사 45,6-25; 제1독서 참조) 세례자 요한은 이 모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들었을 것이다. 그는 시커 먼 벽에 촘촘한 창살과 어둡고 칙칙한 공간, 사해 동쪽 마캐루스 요새 의 감옥에 갇혀있다.(플라비우스, 유대고사 18,116-119) 자신의 무한 한 가능성과 자유, 자기 삶의 모든 것을 광야에 쏟아 부은 사람, 오직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태어난 사람, 세례자 요한이 이제 감옥에 갇 힌 신세가 된 것이다. 아무도 그를 구해주지 않고, 하늘나라가 도래한 표징도 보이질 않는다. 그러나 감옥은 광야에서만큼 생각하기에 좋은 곳이다. 감옥은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꿈꾸며, 질문을 던지고 의문 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메시아를 위한 선구자로서 그 길을 닦고 밝히 며,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베풀던 일이 다 무엇인가? 감옥이라는 거동 의 제한을 받는 공간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시켜 예수께 반 신반의(半信半疑)의 질문을 던진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 까?”(3절) 우리는 선구자의 의심과 의문을 충분히 이해한다. 우리 또 한 삶의 기로에서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또 선택한 일을 수행하는 과 정에서 얼마나 많은 의문을 던지며 의심을 품는가? 이것일까, 아니면 저것일까 하는 갈등 말이다. 세례자 요한만큼 그 제자들도 의심과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오시기 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3절) 이 질문은 우선 세례자 요한의 질문 이었고, 동시에 그 제자들의 질문이며,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의 질문이 며, 오늘날 현대인의 질문이기도 하다. 질문이 이렀다면 대답은 통상 “맞다-아니다”라는 둘 중 하나다. 루가복음은 예수께서 대답을 내리 시기 전에, 단 한 구절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을 보도한다.(21 절) 루가의 세심한 배려이긴 하지만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도 하다. 이 런 기적들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미 보아왔던 것 이니 말이다. 아무튼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 게 가서 알려라.”(22절)는 것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 복하다.”(23절)는 것이다. 결국 갈등과 의심은 사물을 보는 관점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세례 자 요한은 분명히 메시아를 위한 자신의 선구자적 역할을 다했다. 그 덕에 메시아 또한 이 땅에 도래했다. 그런데 갈등과 의심이 웬 말인 가? 그것은 세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전체가 다른 관점에서의 메시아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구약 이 예언한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은, 은에서 쇠똥을 걸러 내고, 나쁜 자들을 발바닥에 재처럼 모조리 짓밟아’(말라 3,2.3.21), ‘새로운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 는’(이사 59,15-66,24) 그런 메시아를 고대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지상 예수의 제자들이 처음에 가졌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 나 예수님은 메시아의 모든 예언과 징표가 당신 자신 안에서 서서히 성 취됨을 보고 계시는 것이다. 단지 예수께서 선택한 방법이 다를 뿐이 다. 결국 모든 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 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 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내 방식이 아니라 메시아의 방식이요, 하느님의 방식이다. 이스라엘과 세상의 모 든 백성은 바로 메시아의 방식대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것임을 알아 야 하는 것이다. ◆ 박상대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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