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서의 세계 - 구약] 므두셀라는 과연 969년을 살았을까---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카테고리 | 성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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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유타한인성당 | 작성일2011-02-14 | 조회수537 | 추천수0 | |
므두셀라의 나이
성서의 어떤 표현이나 수치를 보면 의아한 생각과 함께 호기심이 발동될 때가 있다. 예컨대 969년을 살았다는 므두셀라의 예외적인 나이가 그렇다. 과연 그는 그렇게 오래 살았을까?
창세기 5장을 읽어 보면 므두셀라만이 그렇게 오래 산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나이는 다른 선조들, 즉 930년을 산 아담, 950년을 산 노아, 962년을 산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야렛과 비교하여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셋, 에노스, 케난도 900년 이상을 살았다. 다만 에녹은 예외로 365년을 살았다. 그러나 그에 대해 성서는 “그는 하느님과 함께 살다가 사라졌다. 하느님께서 데려가신 것이다.”(창세 5,24)고 이야기한다.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첫 조상들의 이 동화와 같은 나이는 홍수로 끝나는데 여기에 대한 설명이 있는가?
대체로 문자적이었던 옛 해석은 창세기에 엄밀하게 역사적인 성격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저 많은 나이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해석자들은 첫 인류의 우수한 생명력을 내세웠다. 수천 세기가 지난 지금, 가장 건강한 사람들이 130~140세까지도 산다면, 첫 세대의 가장 건강한 사람들은 800~900세에 이르렀으리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그 숫자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고 “연”(年)이라는 말을 다른 의미로 설명하려고 했다. 예컨대 그들은, 최초에는 지구의 공전이 몹시 빨라서 그만큼 한 해의 길이가 짧았다고 생각했다! 저 특이한 나이를 문자대로 설명하려는 가설은 참으로 많다. 그러나 합리적인 하나의 해결에 이르려는 모든 시도들은 기록된 사실이 실제라는 가설에 근거했다.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의심할 만한 용기와 동기가 없었으므로 가능성을 찾아낼 뿐이었다.
이미 암시했듯이, 새로운 해석학은 저자의 의도에서, 이른바 “문학 유형”에서 해결을 찾는다. 사실 많은 경우에, 사물을 제시하는 저자의 방법에서 저자의 의도를 찾아낼 수 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어떤 학설이, 얼핏 보기에 저자가 의도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선조들의 예외적인 나이를 창세기 앞부분의 “특별한” 장들(1-11)에서만 발견한다. 그런데 우리는 성서의 이 첫 장들에서 특별한 형태의 역사 편찬이 나타나고 있음을 이미 살펴보지 않았는가? 자유로운 묘사로 그리고 상징들을 통하여 제시되는 것은 오로지 역사적인 핵심이다. 그러니 선조들의 나이에서 상징적인 가치를 찾는다고 하여 이상할 것이 있겠는가? 이렇듯 과분한 나이는, 20세기의 시적 취향이 없는 사람들인 우리가 첫눈에 발견해 내는 것과 다른 의향을 통보할 수 없지 않겠는가?
상징적인 가치와 저자의 깊은 - 참된 - 의향을 탐구해 볼 때, 아담과 노아에 이르는 가계도(家系圖)에서뿐만 아니라, 약간은 줄어들었지만, 노아에서 아브라함에 이르는 가계도에서도 고령(高齡)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고대 바빌론의 문학에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긴 두 가지 가계도가 발견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열 명의 왕에 대한 첫 번째 명부는 45만 6000년간의 치세 기간을 담고 있고, 여덟 명의 왕에 대한 두 번째 명부는 24만 l000년간의 치세 기간을 담고 있다. 이 두 계보는 성서의 두 계보와 마찬가지로 세계 홍수로 단절된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에서 특별한 문학 유형과 숫자들의 고유한 의미를 살펴볼 필요는 성서에서보다도 더 클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해석학자들은 아직도 그러한 숫자들의 설재적인 의미에 관해 일치하지 못하고는 있지만 그 숫자들이 우리의 평가와 상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그 숫자들이 축복의 상정이라는 점은 불가능하지 않다. 더욱 있을 법한 것은 그러한 숫자들이 처음부터 끝에 이르는 가계도에 다리를 놓는 데 이바지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러한 연결을 위해 세대와 개개인들의 거대한 숫자를 탐구한다. 고대 근동 사람은 어쩌면 연대를 무수히 늘리는 데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성서의 숫자들을 따져 보면 아담에서 아브라함에 이르기까지는 1948년이다. 과학의 자료에 따르면 이 숫자는 요구되는 것에 비해 몹시 낮다. 그러나 창세기 5장의 새로운 해석에 있어서 숫자들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 이 기간을 계산하기는 불가능하다 해도, 계산할 수 없는 기간에 대한 지침은 있다.
그러나 다른 해석자들은 그러한 숫자들에 덜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 숫자들은 조상들(아담, 셋, 므두셀라 등)이 자신의 나이와 함께 아들, 손자, 증손자 그리고 모든 후손들의 나이를 포함하여 자신의 사망일을 계산한 햇수의 총계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의 몇몇 부족 가운데서 아직도 시행되는 그러한 나이 계산법이 이러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끝으로 어떤 이들은 마치 화가가 흘러내리는 수염과 하얀 머리털로 표현하는 것처럼, 우선 성서가 그러한 들어 높여진 나이로 하느님께로부터 축복받은 성조들의 존경할 만한 나이를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성서상의 많은 이름과 개념과 사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나이도 설형 문자로 된 문헌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우린 이미 45만 6000년간 다스린 열 명의 바빌론 왕과 24만 l000년간 다스린 여덟 명의 왕의 명부를 위에서 상기한 바 있다. 그러한 극히 높은 수치가 나오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확실치는 않지만 상당한 가능성이 있는 답이 있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중 명부의 자료와 베로소(기원전 3세기에 자기 나라의 역사를 그리스어로 기록한 바빌론의 사제, 역사가)가 보고한 자료를 비교해 보면, 그 명부의 각 왕은 평균 9사르(sar) 동안 통치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1사르는 60X60년, 즉 3600년에 해당되므로 9사르는 대략 30000년이 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이 단정하는 대로 1사르가 60X60년이 아니라 60X60일, 즉 3600일에 해당될 수도 있다면 9사르는 3만 2400일이 되고 이를 일년 365일로 나누면 대략 90년으로 정상적인 나이라 할 수 있는데, 베로소에 의하면 7~8사르, 즉 70년 남짓 통치한 다른 왕들에 비해 훨씬 많은 나이라 하겠다.
이제 성서로 돌아와 성조들의 이름과 나이에 관한 한, 바빌론의 저 명부와의 문학적인 상관 관계를 인정한다면, 성서 저자가 모든 것을 고려하여(성조들의 나이를 찬양하기 위하여) 사르라는 용어를 100으로 옮겨 7, 8, 9사르가 700, 800, 900년이 되게 했거나 아니면 옮기는 데 실수했다고 결론내리기 쉽다(감도받은 교의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는다). 보다 쉽게 말해서, 홍수 이전 성조들의 그 높은 수치는 10으로 나누어져야 하고.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살았다 하겠다. 이러한 이론은 의심의 여지없이 몹시 독창적이고, 또한 상당한 가능성이 있으며 수많은 학자들의 찬동을 얻고 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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