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묻고답하기

제목 과연 성서만으로 족한가?(가톨릭의 정통성과 개신교의 비정통성)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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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1-04 조회수1,656 추천수5 신고

 
 과연 "성서"만으로 족한가?

 
 예수께서는 한 줄의 성서도 친히 쓰지 않으셨고, 또 제자들에게 성서를
쓰라고 명하신 적도 없습니다. (물론 사도 요한에게 묵시록을 쓰라고 하신
것은 예외) 또 당시에 이미 있던 성서(구약성서)를 배포하라고 하신 바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을 여러 곳으로 파견하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고,
제자들은 이 가르침을 그대로 받들고 실천했습니다.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시오."
  (마르코 복음 16장 15절)

 "여러분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것이요,"
  (루가 복음 10장 16절)

 주님의 12사도와 72제자와 초대 교회 신자들 가운데 여덟 사람만이 성서를
기록하였습니다.

 네 복음서와 서간 등은 모두 어느 개인이나  어떤 교회에 보내어진 것입니
다. 즉, 그것들은 교회 내의 어떤 긴급한  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한 집필
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내의 어떤 폐습을 바로잡을 목적 또는 신자들의 행동규
범을 세워 줄 목적으로 하는 주교의 교서(敎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성서를 전파하였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고 제자들은 떠
나가서 사방에 복음을 선포하였는데,(물론 입으로..)  주님께서 함께 일하시
며 표징들이 따르게 하심으로써 말씀을 굳건히  뒷받침하셨다." (마르코 복
음 16장 20절)라고 하였을 뿐입니다. 구약시대에든  신약시대에든 신자들은
모름지기 교회의 산 권위의 지도를 받도록 마련되었고, 결코 성서의 자유해
석으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16세기 이른바 종교혁명까지는 세상이 생긴 이래 죽은 법률조문만으로 백
성을 다스렸다는 사실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국민에 대한 국법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성서와 동일시 할 수 있습
니다,

 국민이 국법해석자의 판결에 복종하여야 하듯이 신자도 성직자의 성서해석
에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서가 유일한 지도자"라는 말들을 하는 사람을 가끔 봅니다. 과연
그렇다면 큰 돈을 써서 굉장한 예배당과 주일학교를  세울 필요는 대체 어
디있으며, 성서만 있으면 그만이라던 목사의 설교를 들을 필요나  어린이들
에게 교회 교육이 왜 필요하고, 또 주일에 예배당에 갈 필요는 어디 있겠습
니까?

 바로 여기에 성서 만능 주창자들의 모순이 있습니다. 정말  "성서만 있으면
족하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설교와 교리 교육을 중지해야 옳을 것입니다.

 나는 이제 개신교 형제들에게 성서가 결코 만능이  아닌 이유를 밝혀 보려
합니다.

 만약 한 목사가 성서 한 권을 주며 말하기를 " 이 책을  받으시오. 당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 책만 있으면 됩니다"라고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나 책을
펴면 큰 의혹이 먼저 생길 것입니다. 즉, 이 성서에 기록된 사실이 과연 계
시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또 성서가 주님의 말씀 전부
인지 아닌지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성서는 본래 이런 아름다운 단행본으로 되어 있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  세
기 동안 여러 단편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었으며, 또 위경이 성서 행세를 하
기도 했으므로 신자들은 그 진위를 분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즉 당시 유행
하던 성 베드로 복음, 성 야고보 복음, 성 마티아  복음 등은 모두 가짜 성
서였습니다. 드디어 가톨릭교회는 교도권을 발동했던 것이지요. 397년 카르
타고 제3, 제4 공의회에서 똑똑히 정경과 위경을 판정하여 세상에 공포하였
습니다.

 개신교 신학자인 R. Barclaius 같은 이는 이 사실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는 Canon, 즉 정경은 몇 권의 책으로 된 것으로서 그보다 더 많지도 않
고 적지도 않다는 것은 성서 자체로는 증명되지 않으므로, 여기에 대해서는
성령의 사적감도(私的感導)나 그렇지 않으면 로마 가톨릭을 신임하는 수 밖
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톨릭을 신임하지 않는 개신교 종파 중에서는 성서  중 어느 부분이 순정
한 주님의 말씀인지에 대하여 서로 논쟁합니다. 유럽의 어느 교파는 성  마
르코와 성 루가는 사도가 아니므로 그 복음서는 진짜가 아니라고  하며, 루
터는 성 야고보의 편지를 ’허수아비의 편지’라고 불러 모욕하고 삭제하였습
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한국  개신교 신약성서에는 루터가 없애버렸
던 야고보서가 들어 있습니다.)

 정경/위경 판정의 난공사는 이제 끝나 주님의 말씀만을 실은 성서가 세상
에 나타났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번역인지 그릇된 번역인지를 또 누가 판단할 수 있
겠습니까? 성서의 원어인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에 정통한 자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입니다. 성서 원어 정통자가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됩
니까?

 그러므로 성서를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려거든 유일한 성서보존자인 가
톨릭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는 길 밖에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만약 올
바로 번역된 성서를 가졌다 칩시다.

그렇다 해도 그 성서만이 영혼 구원의 지도자 구실을 하지는 못합니다.  그
해석은 반드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주께서 기쁘게 받아들일 진정한 지도자의 특징은,

   1.그 가르침을 모든 사람이 쉽게 받을 수 있어야 하고,
   2.어려운 성서를 명료하고도 쉽게 해석하여야 하고,
   3.신앙과 도덕의 모든 사항에 관한 우리의 의문에 충분히 해답할 수 있
    어야 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성전(聖傳)과 초대 교부들의 공공적(公共的) 신앙에 준거하여
성서를 해석합니다.

 한 성서 해석이 있다고 합시다. 신앙상 도덕상 문제가 될만한 사항이  아니
면 그를 불문에 붙여 버릴 수도 있겠지만, 만일 그것이 신앙상 도덕상 어떤
논쟁의 초점이 될 때에는 가톨릭교회는 단호히 흑백을 가려냅니다.

 이 글을 읽는 이는,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서를 가볍게 보고 성서 읽기를 반
대한다는 속단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가톨릭교회가 성서를 가볍게 본다는 등의 말은 천부당 만부당한 중상 모략
입니다.

 우리의 자모이신 가톨릭교회를 가르켜 성서를  경시하는 교회라고 하는 비
방은 마치 성모 마리아를, 그 가슴에 안은 ’아기 예수를 눌러 죽이는 여자’
라고 소송을 제기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가톨릭 교회는 15세기
동안 유일한 성서의 수호자였습니다. 만일 가톨릭교회가 참으로 성서를 경시
하였다면 1500년을 흘러오는 동안 성서란 존재는 벌써 소실의 깊은 못에 빠
져 버렸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수많은 문예 대작이 오늘날 얼마나 많이 소멸되었습니까? 그러나
성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15세기 동안 전쟁 혁명  등 온갖 치명적 위
험의 소용돌이에서 시달렸었지만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온전히 살아 있습
니다.

 저 기막힌 치명적 위험에서 시달리는 성서를 몸바쳐 지킨 가톨릭교회의 공
적은 그야말로 천추 불멸의 그것입니다. 만일 가톨릭교회가 성서를  보호하
지 않았더라면 ’이스라엘 왕조 실록’ (열왕 14,19)의 존재를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처럼 신약성서의 존재도 뭇사람들은 모르고 말았을 것입니다.

 문명의 이기가 다 갖추어진 현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성서 보관에 힘쓴 역
대 교회의 기막힌 노고의 정도를 상상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성서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박학한 수도자들이 한 자 한 자 손으로 써간 노고와 또 이 귀
중한 사본 보관을 위한 그 후계자들의 고충이 과연 어떠했겠습니까?

 가톨릭교회가 성서를 영구히 전하기 위해  어떠한 기막힌 노력을 하였는지
그 사실을 간단히 적어 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정경은 4세기에 정
리 편성된 것입니다. 당시의 교황 다마수스는 성서 전부를 라틴어로 완역하
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라틴어는 당시 로마와 이탈리아의 국어일 뿐  아니라
서구 여러 문명국간의 국제어였습니다. 이  번역의 중대 사업을 맡은  이는
당시 저명한 히브리어 학자였던  성 예로니모(St.Jeronimus)였습니다. 번역
이 완성되자 모든 크리스찬 세계에 이를 배포하였습니다.

 6,7세기의 유럽 여러 나라의 국어는 라틴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따라서 성
서도 점차 각국 말로 번역 출간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8세기에  영
국 성 베다는 당시 영국의 언어인 색슨어 성서를 발간하였습니다. 이  양반
은 요한 복음의 마지막 구절구술을 마치고 별세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 애런델(Arundel)은 1394년  리차드 2세의 왕비 앤의
장례조사 중 특히 왕비가 4복음서를 열심히 읽었음을 칭송하였습니다. 토마
스 모어(Thomas More, 헨리8세의 수상, 그 후 순교함)는 위클리프(Wicliff,
가톨릭 신부, 후에 이탈하여 반역을 일으킨  자, 성서를 영역한 자) 이전에
영역 성서가 벌써 있었고 "독실한 신자들은  경건하고 열성적으로 그 성서
를 읽었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15세기에 이르러 영국에서 성서읽기를 부분적으로 제한한 일이 있었으나,
당시 위클리프와 그 일당이 그 신약성서에다 괴이한 유설을 함부로 첨가하
며, 또 그들이 전통에 어긋난 해석을 선전하므로 그 해독을 막기 위한 일시
적 조치였습니다.

 말 한 마디가 더하거나 덜하거나 다른 말로 바뀜에 따라 신앙교리에 중대
한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허가 없이 개신교에서
번역한 성서읽기를 금하고 있습니다.

 목자의 양심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오역성서가 신자들에게 해독을 끼칠까 두려워, 충분히 주시 감
독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권리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하느님의  말씀
인 성서 존중에 대한 태도를 밝히는 좋은 예입니다.

 활자인쇄술은 15세기에 발명되었고 이른바 종교개혁의  소동은 그 백년 후
에나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개신교 신자들 중에는 인쇄술 발명 이래 최초
의 간행 성서는 루터역 성서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이가 오늘날에도 가끔 있
습니다. 이는 역사 지식의 결여에서 오는  그릇된 견해입니다. 실상 루터의
성서번역 이전에 유럽 대륙에는  이미 각국어 번역  성서가 많이 출판되어
있었습니다. 영역 성서 출판을 비롯하여 독일어역 22판, 스페인어역 1판, 불
어역 4판, 이탈리아어역 21판, 네덜란드어역 5판, 보헤미아어역  4판이 간행
되어 있었습니다.

 근대 영역 가톨릭 성서 서론에서 교황 비오6세의 서한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신자들에게 성서를 경건하고 열심히 읽기를 간곡히 당부한 편지입니
다. 교황의 교서는 교회에에서 가장 권위있는 글입니다. 또 미국에서 발간
된 헤이덕 출판의 가톨릭 성서 서문을 보면, 모든 교우들에게 완전히 번역
된 성서를 읽을 것을 간곡히 권하는 미국 주교들의 교서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 모든 역사적 사실을 읽는 이가 진실로 편견이 없다면,  가톨릭교회가 성
서읽기를 반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열심히 읽기를 장려하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넘어온 한 신사가 "얼마전 내가 처음으로 서울 명동성당 구내서점
에 들렀을 때 책꽂이에 성서가 많이 꽂혀져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지금까
지 나는 가톨릭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성서를  못읽게 하는 줄로만 알았었
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후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지만, 지금도 많은 개
신교 교역자들 중에는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성서를 못읽게 한다
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무지인지 악의인지 알  수 없습
니다.

 
 필자는 이제 필자의 신앙생활 중 가톨릭 신학생들의  엄격한 성서 규정 엄
수 훈련을 바라본 경험을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아니, 이는 전세계 전세계
가톨릭 신학교 신학생들의 공통 경험일  것입니다. 즉, 신학생들이 예과(豫
科) 시절에는 매일 성서를 낭독하였고  철학과와 신학과 재학 중에는 성서
가 그 중요 교과과정중 하나입니다. 과외에도 매일 신약성서 1장을  무릎꿇
고 배독한 뒤 경건한 태도로 그 구절에 입을 맞춥니다. 또 매일 식사때에도
한담은 금지되고 정숙히 성서 낭독을 듣는 것이 규례입니다. 그들은 언제든
지 신약성서 한 권은 늘 지니고 있습니다.


 신학생들은 이렇게 언제나 성서에 숙달되었으므로, 성서 몇 구절만  들으면
벌써 그것이 어느 부분 몇 장 몇 절임을 정확히 지적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성서를 읽을 때에는 만에 하나라도 근신과 경건이 부족할까 늘 두려워합니다.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에게는 매일 한 시간의 성서 근독의무가 있습니다. 성
직자의 성서 매일 근독 의무 수행의 엄격한 규율은 가톨릭 교회에서만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성직자에게 성서 근독이 필요하고 유익하다면 평신도에게도 또한 유익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결코 성서를 읽지 못하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 말씀이 모든 이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위의 글은 제임스 C. 기본스 추기경의  불후의 명저 ’The  Faith of Our
Fathers(교부들의 신앙)’에서 발췌한 것임을 말해둡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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