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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종교 개혁의 알려지지 않은 진실에 대하여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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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1-05 조회수1,304 추천수4 신고

 

 

 소위 ’종교 개혁’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다른 교파의  교리의 상이점에 대하여는 포괄적이나
마 앞서 논술하였거니와, 이제 잠시 옛날로 돌아가 여러 교파가  생기게 된
경로를 더듬어 보는 것도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면모를 밝히는 데 한 도움
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뒤로  미루고, 이곳에서는 다만 교파 분
열의 발화점이라고 할 수 있는  16세기의 소위 종교개혁의 진상에  대하여,
누구나가 인정하는 역사적 사실만을 들어 극히 간략하게 약술한 다음, 순수
한 종교적 견지에서 이 사실을 될수록 공정하게 저울질해보려 합니다.

 종교 개혁 운동은 대사(大赦) 문제로 말미암은 루터의 등장에서 발단되었습
니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작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습니다.
열 네 살 때 마그데부르크에 입학하여 2년 후에는 다시 아이제나흐에 입학
하여 졸업하고, 열 여덟살에는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법학을
연구하고 스무 살에 벌써 학위를  받았습니다. 1505년 7월 2일  에르푸르트
교외에서 산보하면서 얼마 전에 결투 끝에 죽은 친구를 회상하면서 현세의
무상감을 절감하고 있을 무렵, 폭우가 쏟아지면서 벼락이 치는 바람에 옆에
있던 또 하나의 친구가 졸지에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황급한 루터는 성녀 안나를 부르며 이번에 목숨을 구해주면 수도원에 들어
가 수도생활을 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약 2주일 동안의 준비를 마친 루터는 같은 달 16일 밤 여러 친구
들과 고별 연회를 마치고, 다음  날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들어가 2년
동안의 수련을 쌓고 마침내 1507년에는 청빈, 정결(평생 독신), 순명(장상의
명령에 복종)의 삼대 서원을 하느님  대전에 바치고 수도 신부가 되었습니
다. 이듬해에는 비텐베르크 대학의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512년에는 신
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후로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히브리서, 디도서 등을 강의하였습니다.

 이 때 벌써 그는 "사람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지, 자신의 선행
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을 마음 속에 세우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세상의 공포할 기회가 왔습니다. 이른바 면죄부의 진
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미 말했듯이, 독일 국내의 대사령  선포를 맡은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도미니꼬회의 테첼을 자기 구역 동부 지방 대사령 반
포 선전 위원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루터는  당시 명성이 높던 설교가  테첼
신부가 임명된 것을 보고는 불 같은 시기와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테첼
이 비텐부르크 부근에 이르렀을 때, 루터는 이에 반항하여 95개조로  된 논
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습니다. 그 날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 모
든 성인들의 축일 전날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당시 신학자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할 때 쓰던 한 방법으로 관례
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테첼은 106조의 반박논문을 성당문에 붙이고 루터에게 대항하였습니
다. 그러나 이것을 비텐베르크 대학생들이 불살라 버렸습니다.

 루터는 여전히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선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테첼
측의 신학자들도 궐기하여 드디어 일대 논전이 벌어졌습니다.

 1518년 4월 하이텔베르크 수도원의 공개 토론회에서 루터는,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되었으므로 자유 의지란 없다고 주장하여,  옛 동지를
잃기도 하고 새 동지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루터가  처음부터 교황에게까지
반역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교황에게 충심으로 복종한다고 언
명하였습니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카예타누스 추기경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고 루터
의 그릇된 의견을 바로잡도록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독일인 밀티츨을 보내어 루터의 반성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태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습니다.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는 드디어 ’엑수
르제(Exsurge)’라는 교서를 내려,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밝혀 설명한 뒤 60
일 안으로 반성하기를 루터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같은해 12
월 10일, 교황의 교서를 사람들 앞에서 불살라 버림으로써, 이듬해 1월 3일
에 마침내 파문당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루터는 공공연히  교황을 배척하고
성세성사와 성체성사 외의 다른 성사는 파기하고, 자기의 ’삼대 원리’를 역
설하여 나갔습니다.

 루터의 삼대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되었으므로 자유가 없다.
   2.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받는 것이고 인간의 선행이나  고행 등으  
    로 되는 것은 아니다.
   3.신앙의 규범은 성서 뿐이다.

 1525년 6월 13일에는 하느님께 한 공식서원을 깨뜨리고 당돌하게도 수도자
의 몸으로 스물 여섯의 젊은 수녀 카테리나와의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습니
다.

 루터의 동지였던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보고 "비극같은 개혁운동은  희극(결
혼)으로 끝나버렸다"라고 조롱하였습니다. 루터주의는  불길처럼 퍼져 이제
분열은 아주 그 결정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 20년 동안  동지와 제자들
의 끊임없는 분쟁을 지켜보면서 1546년 6월 28일,어둠에 쌓인  가슴을 안고
별세하였습니다.

 이제 루터주의가 이처럼 북유럽 일대를 휩쓴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중세의 기독교 세계관은 인문주의(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세속화되어 버렸습
니다. 그 여파가 교황청의 문턱을 넘어들자 교황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바
없지 않았고, 특히 북유럽 일대의 주교좌에는 악폐가 거듭 쌓이기에 이르렀
습니다. 주교 선정에 있어서도 직접 간접의 속권 간섭으로 부적임자도 많이
섞이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성직의 엄숙성을 망각하고 속인으로 자처하는  자도 있고보니,
그 사목 성직에 충실할리 없었고, 따라서 다른 신부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이
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십일조 헌금과 성례식 사례비로 겨우 살아나감으
로써 성직자로서의 체면 유지도 못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천박한  자들도
있어서 결국에는 민중의 경멸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에 따라 트리덴
티노 공의회에서는 슬기로운 대책을 세웠으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여러 수도원 중에는 신자들의 헌금과 국왕이나 부호들의 보조가 모여져 부
유하게 되자, 수도 정신이 이완된 곳도 여기저기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쇠약과  로마법의 채용으로 지방 제후들의  세력이
강대하여짐에 따라, 그들은 교회까지 자기들의 세력권 내에  넣으려는 음흉
한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습니다. 또 대부분의 제후들은 막대한 부채에 시달
리던 차였으므로 자연히 교회 및 수도회의 재산에 침을 흘리게  되었고, 국
민은 무거운 세금에 눌려 허덕이던 세상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몹기 어려운 상태에서 서민충에는  경박한 인문주의의 선전 책
자들이 유포되어 민심은 나날이 해이해지고  악화되어 드디어는 교회를 등
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세태가 이러하니 혁신의 기운은 이미  익었으나 교리
를 의심하거나 가톨릭 교회와의 절연이란 꿈도 꾸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길 기도,  묵주의 기도와 같은 근행(勤行)
도 널리 보급되어 신앙 생활에 엄숙 경건한 면도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16세기는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이냐시오, 요한  데 데오,
베드로 카니시오, 파스칼, 필립보 네리, 예로니모  에밀리아노, 테레사, 베드
로 알칸다라, 가롤로 보로메오, 십자가의  요한,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알로
이시오 곤자가 등,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위대한 성인 성녀들이 많이  나온
세기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형세가 급박한 이 때, 대사 선전원 중에는 탈선적인 언동으로 대중
의 반감을 산 자가 적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을 기회로 루터는 드디어 횃불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추종자들
은 각계각층이 망라되었습니다. 수도원을  뛰쳐나가는 수도자가 있는가  하
면, 루터를 따라 결혼하는 성직자들도 많았습니다.  물론 그들은 성직의 엄
숙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자들입니다. 루터는  독일 내에서 가장 많은 독
자를 가진 저술가인 동시에, 웅변으로 그 명성이 높았던 만큼 식자층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독일 연방 제후들 중에서 종교적 동기라기 보다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동
기에서 그를 지지하고 비호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쯤되면  대중은 으례
그를 추종하게 되는 법입니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에 불평이 있는 사람들, 어려운 선행은 필요  없고 믿기
만 하면 구원된다는 달콤한 선전에 비상한 매력을 느낀 무리들,  교의야 어
찌되었건 독일인들의 기독교를 창설해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충동에 날뛰던
자들,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던 교회의 혁신이 이제 곧 이루어진다는 속단으
로 경거망동하던 자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습니다. 이처럼 여러 해  동안의
혼란 상태를 겪은 뒤 드디어 커다란 분열은 결정적으로 형성되고 말았습니
다. 그러나 그 원인은 종교적이라기보다 정치적 경제적인 것이었습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종교 개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종교 개혁의 종교적 요소가 현대적 견지에서 과대 평과되어 왔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독일 제후들이 루터주의를 강행시킨 데 있어서 그들의 이해 관계를 발견
 하지 못하였더라면 루터는 분명 신비주의의  한 지도자에 불과하였을 것이
 다" (Britanica Encycl., V.23, p.4-11)

 프로테스탄트 사학자 찰스 리어도 "루터의 반역 동기는 원인(遠因)이든 근
인(近因)이든 모두 심령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아주 속세적인 것이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종교 개혁에 부수되는 종교적 변화라는 것은 간과하여도 무
방하다. 실상 종교 개혁의 목적은 종교적 개혁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Cambridge Modern History, V. I., p.653)

 이것은 하느님을 섬기고 구원을 목적으로 삼는  개신교 형제들이 거듭 숙
고해야 할 말들입니다.

 로마 교황에 대한 루터의 반역을 통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권위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적 견지에서는 혹시 그럴 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
을 정신 수양의 방편으로 삼는 견지에서가 아니고 순수한 신앙적 견지에서,
오로지 하느님 공경과 구원을 목표로 삼는 그리스도교적 견지에서 이 사실
을 공정 무사하게 저울질하여, 개혁자의 자격과 개혁의 대상과 개혁의 결과
에 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

   1.개혁자의 자격
   2.개혁의 대상
   3.개혁의 결과




다음에 이어집니다...










위의 글은 제임스 C. 기본스 추기경의  불후의 名著 ’The  Faith of Our
Fathers(교부들의 신앙)’에서 일부 발췌한 것임을 말해둡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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