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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루터는 진정한 개혁자인가? (2)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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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1-05 조회수1,300 추천수4 신고

 

 

2. 개혁의 대상

 교회 개혁의 목표는 첫째로는 해이해진 기율을 진작시키거나, 둘째로는
교리의 파사현정(破邪顯正)에 있습니다.

 이제 여기에 대해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당신 가톨릭교회의 혁신 대상은 해이해진 기율이었지 결코 교리는 아니었
습니다. 이 두 가지는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율의 문란은 북유럽 일대
교회가 심했을 뿐이고 다른 지방까지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혁신
운운의 소리가 요란했지만 실상 혁신의 대상은 해이해진 기율, 그것 뿐이
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루터는 이 방면의 개혁을 단행하였습니까? 만일 루터가 성 베
네딕도나 성 프란치스코처럼  솔선수범하여 만대에 빛나는 성덕으로 일대
교화를 시켰더라면 루터의 위업은 교회 사상 한 금자탑이 되었을 것입니
다. 그러나 루터는 이 방면에의 혁신 의도는 전혀 없었고 또 능력도 없었
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그는 오히려 혁신의 대상이 될 존재였습니다.

 삼대서원을 한 신부와 수도자들이 그의 뒤를 따라 세속으로 뛰쳐 나간 행
위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루터는 교회의 우환을 물리치기는 커
녕 도리어 타는 불에 기름을 부었을 뿐입니다.

 루터가 개혁 대상으로 삼은 것은 천만 뜻밖에도 교리 부문있었습니다. 이
로 말미암아 교회와의 대립은 날카로워졌습니다. 서로 진리는 자기 편에
있고 오류는 상대측에 있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학술문제의 논쟁이라
면 구경이라도 하련만은,  그것은 바야흐로 구원을 좌우하는 지상 최후의
문제이므로, 우리는 당장 지정의(知情意) 전 능력을 총동원하여 양자 택일
이라는 기로에 서게 되었습니다.

 교리의 서로 다름에 대해서는 이미 말했으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만 카예타누스를 대표로 한 가톨릭의 주장을 저울의 오른쪽에 놓고, 루터를  
대표로 한 개혁자들의 주장을 저울의 왼쪽에 놓아 그 무게에 대한 판단은 보는
분들께 일임하도록 합니다.

     우 : 예수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선행도 요구된다.    
         예수의 가르치심 전부를 믿고 실천하여야 한다.

     좌 :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 인간의 행위로 구원되는 것은 아  
         니다.

 여기에는 우는 믿음과 행위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좌는 믿음만을 역설하고
행위에 대하여는 방임하는 주의입니다. 우에 비하여 좌가 ’넓은 길’입니다.
문제의 핵심에 들어가기도 전에 벌써 여기서 좌의 됨됨이가 드러납니다.

     우 : 우리가 믿고 실행하는 것은 벌써 16세기 동안 계속하여 온 것이  
         다. 그리스 정교나 러시아 정교 등 대부분의 이교도 우리와 같이   
         믿고 행하여 왔다. 개혁파의 설은 그리스도교 창설 1,500년 후에  
         생겨난 신설이다.

     좌 : 15세기 동안이 아니라 20세기 동안을 믿고 행하여 왔다 할지라  
         도 그것은 그릇된 믿음이요, 따라서 의미없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개혁하라는 것이다.

     우 : 만약 오류가 1,500년 동안이나 존속되어 왔다면, 이것은 분명 지  
        옥의 세력이 그리스도교를 유린한 사태이다. 예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고(마태  
        28, 20 참조),  지옥문이 교회를 제압하지 못하리라고 하셨고(마태  
        16,18 참조), 또 진리의 성령을 보내시어 영원히 교회에 머물러 계  
        시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요한 14,16 참조)
         그러면 예수께서 거짓말을 하셨다는 말인가.  또 생명인 진리를    
        잃어 버려 오류에 빠진 교회를 방관만 하시려고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셨단 말인가.

     좌 : 성서는 그렇게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은 성서에 배치되는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행위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 이른바 개혁이  
         다. 과연 당신들의 신앙과 행위란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   
         인가?

 여기서 문제는 성서로 옮아갑니다. 성서를 누가 바로 해석하는 가를 논쟁
합니다.

     우 : 성서는 우리 교회에서 보관하여 온 것이다. 우리는 4세기에 여러  
        위경(僞經)을 물리치고 오늘날의  신약 성서를 엮었다. 정경(正經)  
        인 신약 성서를 엮은 우리가, 그것을 온 정성을 다하여 보관하여  
        온 우리가 그것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성서에서 모든 교리의 명문(明文)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성서  
        에 적히지 못한 하느님의 말씀도 많다.

         이를 교회에서는 성전(聖傳)이라 하여 진중(珍重)히 보관하여 오  
        고있다. 교회는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신자들을 교도하여 왔다. 실  
        상 교회가 성서보다 먼저 출현하였고,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는 성   
        서가 없었다. 그들은 교회의 산 가르침으로 배워왔다.

     좌 : 보관은 당신네가 해왔을 망정 해석은 우리가 올바로 한다. 또 초  
       대 교회에서 어떻게  해왔든 우리는 성서 하나만을 규범으로 삼는   
       다. 성서의 말씀만 따라간다.
 
 이렇게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서와 교회’를 겸하여 주장하고, 개신교에서는
’성서 하나만’을 주장합니다.

 이제 신구약 성서를 한자 한자 세심히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누구든지 다
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성서는 무슨 편 무슨 편 모두  몇 권으로 된 것이라는 언명이 없다
 는  사실.

  둘째, 성서 ’하나만’이 신앙의 규범이라는 분명한 말씀이 없다는 사실.

  셋째, 성서 ’하나만으로’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 신앙 지도를 받아왔다는  
 예증이 없다는 사실.

  넷째, 성서의 기술 형식이 오늘날의 법전처럼 내용의 성질에 따라 장, 절
 로 구분되어 있거나, 고정된 법률 용어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따라
 서 정신계의 심오하고 복잡한 문제의 해결을 성서 ’하나만’에서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마태 28,20),

 "너희의 말을 듣는 사람은 나의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배척하는 사람
 은 나를 배척하는 사람이며..."(루가 10,16)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마태 18,17)

 라는 말씀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 저울을 보고 그
무게를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성서를 누가 올바로 해석하는가를 보십시오.  성서의 말씀 중에도
이렇게 해석하면 이렇게 들어맞고 저렇게 해석하면 저렇게 들어맞는 구절
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해석에 있어서 의견이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해석을 하기 위한 요점은, 성서 기자가 그 말을 함으로써
무엇을 뜻하려고 했는지를 알아내는 데에 있습니다. 만일 불행히도 성서가
쓰여진 당시로 땅 속에 묻힌 채, 1520년을 지낸 후에 비로소 카예타누스와
루터가 이것을 꺼내어 이 구절은 이러니저러니하며 논쟁한다면, 우리는 저
자의 진의를 전혀 모르는 채 그들의 논쟁의 전말을 지켜 보아도 좋으련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는 위경과 정경이 뒤섞인 속에서 정경을 식별한 권위와, 그를 보관해 온
사실과, 1,50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실행하여 온 실적을 내 놓음에
반하여, 좌는 그저 "우리의 해석이 맞다"는 말만을 내놓습니다. 이제 또 독
자는 이 저울을 보고 무게를 비교하여 보십시오.

     우 : 우리의 해석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초대 교회의 교부들에게 받  
         은 것이다. 사실 교부들은  모두 이렇게 해석하였고 이렇게 가르  
         쳤다.
 
     좌 : 그래도 그런 해석은 다 오류다. 성서의  말씀은 그렇게 알아듣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해석이 진정한 것이다.

 초대 교부들의 해석이 바로 가톨릭교회의 해석임은 틀림없습니다. 교부들
의 저서와 성서 주석이 오늘날까지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식인으로서의 교부들의 권위는 어떠합니까. 도저히 개혁파에 비
교할 바가 아닙니다. 성 암브로시오와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 교부들의 철
학적, 신학적, 성서적으로 깊은 조예와, 그 유려한 필치는 오늘날도 오히려
절찬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학문적인 권위의 빛은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특히 초대 교회는 사
도 시대에 가까운 시대였으므로 성서 용어인 고전어의 맛을 더 깊이 볼 수
있었겠고, 성서 기자의 환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므로 성서의
진의 파악에 매우 유리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사도들의 문하생이거
나 이대 삼대 제자들이었으므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더 정확히 파악하였을
것입니다.

 이제 개혁파의 진용을 보면 루터, 멜란히톤(Melanchthon, 1497-1560),
칼슈타트(Karlstadt, 1480-1541), 요나스(Jonas, 1493-1555), 암스도르프
(Amsdorf, 1483-1565)등입니다. 그들은 바로 종교 개혁의 선봉으로 활약하
여 분열을 결정짓기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들 중 대학교수나 강사 등으로
정작 지식인으로서의 명성을 가졌던 사람은 루터와 멜란히톤 뿐이었습니
다. 그나마 그들도 도저히 암브로시오나 아우구스티누스에 비할 바는 아니
었습니다.

 그들은 성서가 기록된 뒤 15세기의 사람들입니다.

 반면, 교부들은 모두 지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칠 뿐 아니라 학덕이 뛰어난
성인들로서 천추 만대의 사표입니다. 교부들 가운데는 순교자도 많습니다.

 그들의 전기를 읽고 신앙의 용기를 얻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앞서 말한 개혁자들 중에는 유감이지만 높은 덕을 갖춘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양심은 벌써 판단을 내렸을 것입니다. 이제 교리에 대한 양자의
태도를 관찰하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문자 그대로 그 믿는 바와 행하는 바가 일치합니다. 가
톨릭교회의 일치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그야말로 시공을 초월한 일치입니다.


 각자의 개성이 자유로운 인간사회에서, 이런  놀라운 일치의 사실은 그 배
후에 확고 부동한 객관적 근거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라
는 격언의 실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개신교는 교리에 대하여 일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불일치는 개혁파
자신이 빛어낸 것입니다. 처음에 루터의 개혁 운동을  찬성하던 에라스무
스는 루터의 ’신앙만으로 의화된다."라는 설과 그의 자유 의지 부정을 반대
하여 자유 의지를 고조(高調)하였습니다.
 
 칼슈타트는 성체성사에 예수께서 실재하신다는 것을 부인하였으며, 성서
해석에 있어서도 루터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는 마침내 루터의 맹렬한 반
대에 부딪쳐 남부 독일로 가버렸습니다.
 
 칼슈타트파 중에서 뮌처(Munzer) 등은 직접 계시를 주장하며 루터를 공
격하다가 광신자들이라는 비난과 공격을 당하였습니다.

 츠빙글리는 성체성사에 대하여 "이것은 내 몸이다"를 "이것은 내 몸을
뜻한다"라고 해석하여 상징설을 주장하였고, 루터는 글자 그대로라고 하여
공존설을 고집하였습니다.
 
 칼빈(Calvin, 1509-1563)은 "주 예수께서 몸으로 임하시는 것이 아니고 영
(靈)으로 임하신다"라고 딴소리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개신교측의 歷史家 워커 교수의 기록에 의한 것임을 말해둡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너희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너희끼리나 일
치하여라" (Mouret. ref.34)하며 조소하였습니다. 이 불일치는 개혁파의 거
두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의 후계자들 사이에
줄곧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계시 진리요 계명인 교리에 대한 보존 준수의 성의(誠
意)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수천만의 신도를 잃는 것보다 교리의 온전한 보존을 더 중하
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이설이 생길 때마다 언제든지 그 추종자들을 파문
축출하여 양적인 희생을 감수하였습니다. 교리의 일단을 양보하지 않음으
로써 한 국가와 한 민족이 자기 품에서 떠나갈 망정 태산의 반석처럼 요지
부동 의연합니다. 그리스 정교, 영국 성공회의 분리 사실(史實)을 보십시오.

 만약 영국왕 헨리8세의 이혼을 교황이 허락하기만 했었다면 영국은 그대로
가톨릭 국가였을 것이며, 영국 내의 가톨릭 신자들은 저 참혹한 탄압을 받
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가톨릭 교회처럼 교리에 엄격한 교회는 없습니다.

 이미 말했듯이 루터 자신이 성서에 대한 첨삭 또는 위역을 감행하였습니
다. 한 나라 한 민족은 커녕 자신의 지지자인 헤센 백작 한 사람을 잃을까
봐 팔 남매나 낳은 본처와의 이혼을 허락한 자가 바로 루터와 멜란히톤이
아니었습니까.

 오늘날에도 그의 제자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점에만 합의되면 그만이고 교
리의 상이(相異)에는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마태 7,15-20) 참조. 사실(史實)의 공
정한 저울을 누가 속일 수 있겠습니까.

 루터는 개혁해야 할, 또 개혁할 만한 방면에는 손도 못 대고, 개혁할 수 없
는 계시 진리에 감히 손댔다가 드디어 파문을 당하였습니다.

 파문 당한 개혁파들은 소위 ’개신교’를 세웠습니다. 초대의 자연스러운 교
회로 돌아간다는 취지에서였습니다.

 정작 초대 교부들에게로 돌아갔더라면 저런 탈선 행위는 하지 않았을 것입
니다. 이미 흥분이 그 도를 넘어 앞뒤를가리지 못하는 무모한 용기만이 남
아있을 때였습니다. 또 교부들에게 돌아가면 이미 개혁의 모순이 드러날 것
이므로 내친 걸음에 서툰 무기인 성서 하나만을 뽑아들게 되었을 것입니
다. 그리하여 성서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교회를 설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 개신교에 부자연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
다. 우선 ’성서 유일  규범주의’와 ’성서의 자유  해석주의’가 정상을 잃은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칠 줄 모른는 분열상이 이를 증명합니다.

 성서 유일 규범주의가 낳은 부자연은 퍽 많습니다. 예수와 사도들은 언제
나 건전하고도 정상적인 걸음을 걸으셨습니다.

 가르침에는 앞뒤 순서가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먼저 가르쳐야 할 가
장 중요한 과제는 주 예수는 구세주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
시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이 중요 과제와 모순되는
구약의 율법 준수 사상의 배격이었습니다.

 복음 사가들과 서간의 저자들은 기회를 엿보고 환경을 살펴 이것을 가르치
기에 온 힘을 다 쏟았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성모를 공경하라거나, 성인
들도 공경하라는 성서상의 명문이 없다고하여 이를 반대하는데, 기본적인
중요 과제를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던 성서저자들이 대체 어느 겨를에, 아마
그 때 아직 살아계셨을 성모에 대한 추모 공경을 역설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아직 탄생하지도 않은 성인들을 공경하라고 가르칠 수 있었겠습니까.

 또 성상(聖像) 제작을 권고했을 리가 있었겠습니까. 중요한 것을 먼저 가
르치고 부차적인 것은 천천히 가르치는 것이 당연한 순서일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도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6, 12-13)

 라고 하시어, 부차적인 문제는 뒷날로  미루셨습니다.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진행 순서입니까.

 국가 원수는 원수대로 존경하고 그의 친척이나 측근자에게는 원수의 권위
를 조금도 손상하지 않고도 다 각각 그에 상응한 경의로 대우하는 것이 당
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부모나 위인의 초상 앞에, 국기 앞에 경의
를 표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이 아니겠습니까. 엄숙한 예식에는
예복을 입고 참례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신이시므로 예배
형식은 필요치 않다고 주장한다면 입으로 소리내어 그 분을 찬미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웃어른을 만날 때 마음 속으로만 경의를 지니고 아무 표정도 인사도 없이
그 앞에 뻣뻣이 나서기만 하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흠숭하는
자로서 어찌 천사들과 성인 성녀 등 천상 가족에게 덤덤할 수 있겠습니까.
인식과 의욕이 있으면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연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자연을 역행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각자의 협력 행위 없이도 구원되어  영복을 얻게 된다
는 설은 성덕 방면에 대한 인간 활동의 길을 막는 부자연스런 말이 아니겠
습니까.

 묘목을 심어 놓으면 점점 자라 가지가 뻗고 꽃이 피고  열매 맺고 하는 것
이 자연의 현상입니다.  주께서 친히 심으신  겨자씨는 부자연하게 그대로
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성장합니다. 국가에든 단체에든, 자기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방책을 세울 권리가 있습니다. 이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
강령을 지켜나가면서 그때그때  규칙을 제정하여 건전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곧 발전 도상의 자연 이치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가톨릭교회는 계시하신 진리와  계명을 지켜나가면서 세계 전교의 건강한
걸음을 내딛던 중, 시대의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의식과 제도, 법규 등을
제정하였습니다. 가톨릭 신자에게는 자기 기질에 맞든 안 맞든 이 권위에
의해 제정된 것들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여러 가지 교칙을 지키기가 괴롭고 귀찮으니까
철폐해 버리고 좀 자연스럽게 공부할 자유를 달라고 요구한다면, 이 학생
의 요구대로 모든 교칙을 폐기해 버리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믿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주장이 과연 자연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자연입니까.


 현명한 여러분들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의 글은 제임스 C. 기본스 추기경의  불후의 名著 ’The  Faith of Our
Fathers(교부들의 신앙)’에서 일부 발췌한 것임을 말해둡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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