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톨릭 신자가 알아야 할 개신교 근본주의의 종말론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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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1-06 | 조회수2,237 | 추천수4 | 신고 |
안녕하세요. 안젤로입니다.
앞에서 올린 글에 이어 루터라는 사람이 행한 행동과 말에 대해 자세히 알 아보려고 했습니다. 물론 루터라는 사람이 어떤 배후인물이 있었기에 가톨릭 에 대한 반역을 꾀할 수 있었는 지에 대해서도요.
그런데 김양숙 님께서 종말론에 대해 질문하셨기에 잠시 루터와 그의 배후 인물에 대한 역사적 고찰은 뒤로 하고 개신교에서 부르짖는 종말론 - 아마 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는 휴거 소동 - 에 대해 한번 자세히 알아보고 우리 의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종말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도 알아보도록 하겠 습니다.
먼저 개신교 근본주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하기로 약속드립니다.
여기서 간략히 개신교 근본주의에 이야기하면 현대 신학자들의 19세기의 새 로운 사상 - 다윈, 프로이드, 니체, 마르크스로 대표되는 무신론, 유물론 사 상 - 을 그리스도교에 도입하려는 시도에서 가톨릭은 그러한 시도 자체를 무 의미한 것으로 규정하고 제지했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개신교 내에 서는 이러한 현대적 사상과 그리스도교와의 절충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이러한 현대적 경향은 개신교 내에서 그에 대한 엄청난 반 발과 반동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고 이러한 그들의 반동 노선을 근본주의 (Fundamentalism)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란 이름은 1909년에서 1915년 사이에 몇 사람에 의해 씌어진 몇 권의 책자들에서 유래했으며, 이 책자들을 함께 묶어 ’진실 에 대한 증언(The fundamentals)’이라고 부릅니다.
이 근본주의파들은 현대파의 도전에 정면으로 맞서며 다음과 같은 입장을 철저히 고수했습니다 : 성서는 문자적으로 틀림이 없다는 점, 예수님의 동정 탄생, 예수님의 육신의 부활, 예수님 보속이 우리의 죄를 대신한다는 논리, 곧 다가올 예수님의 실제적 재림이 그것입니다.
미국에서 근본주의가 발생한 주 원인이 현대주의 신학에 반대하기 위한 것 이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다른 교파의 주장을 반대하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 후로도 계속 근본주의는 부정적 - 반대를 위한 반대 - 위치를 고수해 왔 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개신교 근본주의가 초교파적 성격의 교회라는 인식 이 퍼져 있어 일반적으로 근본주의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일 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와 그 비슷한 성격의 교회들은(무슨 무 슨 복음 교회라는 명칭의 개신교는 대부분 여기에 해당) 모두 개신교 근본주 의에 속하며 이들의 회합과 부흥회를 통한 세 불리기에 여타의 개신교도 불 안함을 느낀 나머지 점차 다른 개신교들도 근본주의화하는 경향에 있다고 보면 정확할 것입니다.
이제 근본주의에 대한 이야기에서 본론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흔히 보는 개신교 근본주의자, 그 특징으로는 - 만나는 이마다 당신 은 구원받았습니까? 혹은 이제 종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꺼 내는 개신교 신자는 백 퍼센트 개신교 근본주의자입니다. 사실 요즘은 개신 교 근본주의자들은 복음주의자라는 말로 대체해서 자신들을 부르는 모양입 니다. 아마도 근본주의자라는 말이 그들의 귀에도 좋지 않게 들리는 것 같습 니다.
또한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말은 당신은 구원받았습니 까? 하는 말이지만 - 이 물음에 대한 우리 가톨릭의 답변은 다음에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종말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양해바랍니다.
그보다 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귀에 생소하고 신비스럽게 들리는 단어는 우리 말로는 ’휴거’라고 하는 영어 단어 ’Rapture’입니다. 사실 사전을 찾아 보면 이 단어의 뜻이 ’희열, 환희’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옛 고어의 의미로 Rapture는 유괴나 납치를 말합니다.
이 단어를 가지고 우리나라에서는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이 휴거라는 말로 변형시켜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필자도 그들의 표현대로 밑의 글 가운 데 희열과 휴거는 같은 의미로 썼다는 것을 미리 말해둡니다.
그럼 성서의 어디에도 없는 ’Rapture(희열,휴거)’란 말은 도대체 무엇이며 근 본주의자들은 어디서 이런 단어를 찾아내었을까요? 묵시록을 잠깐 읽어보거나 묵시록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근본주의자들의 해석을 들어보면 그 답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묵시록 가운데서도 가장 심한 이견을 보이는 곳은 20장입니다. 20장은 천년 왕국이 도래하여 사탄이 사슬에 묶이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천년 왕국이 지나고 모든 크리스천이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통치하게 될 시기가 되면(20,4), 사탄은 자기가 갇혔던 감옥에서 풀려나와 온 땅에 널려있는 나라 들, 곧 곡과 마곡을 찾아가 현혹시키고 그들을 불러모아 전쟁을 일으킬 것이 다(20, 7-8)
묵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 이란 구절을 해석할 때 가톨릭 교회는 지금부 터 인류 역사의 마지막 그 어느 때에 예수님이 오셔서 통치할 것이라고 보 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천년’ 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가톨릭 학 자들 가운데도 다양한 의견이 있으나, 그 중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이 가 장 유력합니다. 즉, 천년이라는 기간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의 모든 시간을 일컫는다는 것입니다.
묵시록 20장 5-6절에 나오는 ’첫째 부활’이란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상황임 을 보여줍니다. 20장 6절의 ’둘째 죽음’ 이란 크리스천 시대(천년)에 살면서도 세례를 거부 하는 사람들의 상태를 뜻합니다. 이러한 가톨릭의 해석은 몇몇 개신교파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공회나 그리스 정교)
이에 반해 근본주의자들은 묵시록 20장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믿기 때문 에 어느 땐가 예수님께서 이 지구에 오셔서 몇 천년간 왕으로 통치하실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어떻게 오셔서 통치하실 것인가를 놓고서는 자기 들끼리도 서로 견해가 다릅니다.
특히 ’천년 왕국주의’(Dispensational Premilennialism) -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천년 왕국 이전에 예수께서 오신다고 믿는 이들)란 매우 어색한 이름을 가진 어느 교파는 천년 왕국이 도래하면, 예수께서는 이 지상을 다스릴 기반 을 놓으시며 교회는 희열에 싸여 천상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천년 동안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며 유대인들이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워, 후에 천국 교회와 합해진 다고 믿고 있습니다. 천년 왕국주의자들은 대다수의 크리스천들이 믿는 사실 인,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며 또 교회는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하셨던 하 느님의 약속을 이어받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임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는 바는, 구약 성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셨던 약속은 반드시 유대인들 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희열 또는 휴거(Raptue)라는 글자는 성서 어디에도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근본주의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단 어 자체는 개신교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는 성경 학습서의 주석에 최초로 씌어졌습니다. 몇 년 동안 사람들이 이 학습서를 이용해 오는 동안, 몇몇 무 리들에 의해 그 단어는 실제로 느껴질 수 있는 곳 다음의 성서 구절에 부착 시켜 사용해 왔습니다. "다음으로는 그 때에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들리어 올라가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I데살 4, 17).
이 성서 구절 역시 문자적으로 해석되었으며, 공중에서 주님과 함께 구름 위에서의 희망은 한없이 기쁘고 감격적이며 황홀한 것으로 고대되어졌습니 다.(Webster 사전에서 희열이란, ’지나친 감정으로 도취되는 경험이나 상태 ’라고 정의를 내립니다.) 데살로니카 전서 4장 17절을 묵시록 20장과 연결시 켜, 이 근본주의자들은 천년 왕국의 시작에 하느님의 교회가 공중에 들어 올 려져(휴거) 예수님과 대면하게 되리라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실제로 그 마지막 날에 우리가 공중에서 예수님과 남나 도록 에정하셨는지는 모르나, 그 휴거(희열)주의자들의 데살로니카 전서 4장 17절에 대한 해석은 바오로 사도가 ’공중에서’라는 말을 사용한 의도를 파악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물리나 천문학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그 당시의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은 지구 바로 위에 떠서 지구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지구와 태양의 위치 관계에 있어서 ’위와 아래’ 가 없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영적 존재들은 지구 위 공중에 돌아다니며 살고 있다고 믿 었습니다. 예를 들어 에페소서 저자는 "우리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원수들은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의 악신들과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과 ’위’의 악령 들입니다"(에페 6, 12 강조점 추가) 라고 썼습니다. 그러므로 뽑힌 자가 주님 을 공중에서 만난다고 이야기하는 바오로의 뜻은, 마지막 날 하느님께서 모 든 악의 힘을 꺾으시며 악령들의 영토였던 ’공중(The air)’을 완전히 정복하 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오로가 중요시하는 것은, 마지막 날 하느님의 승리, 바로 그것에 있으며 그 승리하는 ’장소(Where)’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바오로 사도가 오늘날 살아 있어 영혼이 정말 공중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해도 그분의 가르침의 근본 요소는 변함이 없을 것 이며, 단지 그 가르침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어휘를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종말론에 대한 휴거(희열)주의자들이 갖는 태도에 대해 지금껏 논의되어진 것들이 과연 주님과 하루하루 함께 걸어가는 우리 생애에 어떤 중요성이 있 기는 한 것인가? 하고 독자들은 물음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은, 종말론에 대한 가톨릭의 견해나 천년 왕국주의자들의 견해 중 어느 것을 받 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견해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종말에의 하느님 계획은 결국 실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톨릭의 견해는 단순한 학문적인 경지를 넘어서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휴거(희열)주의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를 둘러싼 - 크리스 천이든 아니든 - 사람들과 과도하게 피동적인 관계로 되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느긋하게 앉아서 "세상은 분명히 망할 것이다. 그러니 싸울 필요가 있는가? 예수님께서 곧 오셔서 저 죄인들의 마땅한 죄 갚음을 하실터인데" 하고 팔짱을 끼고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마치 즐거운 일이나 기다리는 것처럼 타인들에게 곧 들이닥 칠 재앙을 경고하는 데에 ’교회의 사명’ 전부를 바치는, 몇몇 근본주의자들 의 태도를 종합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코 예수님의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를 받아들이기 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다가올 재앙에 대해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또 한 예수님은 악마와의 전쟁에서 물러나 앉아 그의 아버지인 하느님이 그를 위해 대신 싸워 주시기를 바라실 분도 아닙니다. 그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지금부터 앉아서 내 아버지가 천사들을 보내시어 내 적들을 무찌르게 하는 것을 구경해야겠다" 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악마의 면전으로 바로 걸어가셔서 악마와 싸우시고 그리고 물리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루신 일, 즉 죄를 사랑으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 은 사명을 게속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은 결코 휴거나 희열(Rapture)을 느끼게 하지는 않을 것이나 - 예수 님과 함께 이러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 혼신을 기울여 사는 삶으로 보건데 - 분명히 즐거운 것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전쟁터에서 물러나와, 우리를 위해 전쟁에서 싸워 주시기를 하 느님께만 바란다면 결코 크리스천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한 우리 인생 여정의 마지막 순간에만 지나치게 기댄다면 -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천국의 희열 - 우리 삶의 여정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시간에 올 하느님의 최후 승리를 기다리는 한편, 현세의 삶 에서도 실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신은 휴거(Rapture)에 이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라는 근본주의자들
의 질문에 대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적절한 대답은
"주님의 일을 하기에 너무 바빠 많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답해주
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종말에 대해 우리가 알고자 할수록 더욱 더 우리가 알게 되 는 것은 우리의 무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아들도 모르고 천사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 하느님만이 아시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견해에 구애되지 않고 성서의 말씀대로 영원 토록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1고린 15,28) 되실 것입니다.
얼마 전 제주도에 계신 수녀님 한 분으로부터 필자에게 온 글을 소개하며 제 글을 마치겠습니다.
......
그분과 함께 우리는 모든 파도와 역경, 고난, 그리고
죽음까지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우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
새해에도 우리의 삶의 의미는
오직 하느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우리가 해야 할 오직 한 가지는 주님을 믿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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