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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무엇을 보고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2) - 이기주의자들에게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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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1-11 조회수1,205 추천수4 신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상칠언(架上七言) - 세 번째 말씀

 

 

 

 

    - 이기주의자에게 -

 

 

 

 

 십자가의 진정한 뜻을 알아들어야 하는 세 번째의 무리들은 이기주의자들입니

다.여기서 말하는 이기주의자들이란 구원을 개인적인 문제로만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구원을 특정한 부류에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종교를 자기 만족을 채워주는 극히 이기주의적인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종교가 인간을 죄악에서 구원하고 부활시켜준다는 것은 일종의 기만이요

환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종교는 인간을 고독한 존재로 만든다고 생각합

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난관에  처하면 "왜 하느님은 나에게 이런 불행을 주

시는가?" 하고 질문합니다. 그리고 죄를 범한 다음에는 "내 죄가 다른 사람에게

무슨 해독을 끼친단 말인가?"하고 덤벼듭니다.

 

 이기주의자들이 갈바리오에 그들의 대표로 좌도를 보낸 것입니다. 그 좌도는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양심을 아파하는 우도의 통회의 울부짖음을 들었습

니다. 그러나 그 우도의 참회도 좌도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육체적

으로는 하느님과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는 그분과 함께 있지 못하

는 수가 있습니다. 그 가장 좋은 예가 여기 좌도의 경우입니다. 좌도는 바로

옆에서 하느님과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정신은 너무나도 멀리 있었습니다. 그는

극히 이기적인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 자신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시오!"

 (루가 23,39)

 

이렇게 외친 그는 인류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칼 마르크스보다  

훨씬 오래 전에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 때 영혼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종교!  재판정에서 정의

롭지 못한 판결을 하면서 하느님께 매달리는 종교!  배가 고프고 몸이 아플 때

’유토피아’를 얘기하는 종교!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두 강도와 그리고 무산계급

에 속한 사람이었던 나자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용서를 이야기

하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 자신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시오!"

 

이 외침은 얼마나 현대적인 표현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전 인류의 구원

이 아니고 특정게급의 구원입니다. 공산주의자는 오로지 노동계급만을 보고서

"당신 자신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시오!" 라고 하지 않습니까?

 

 국수주의자들은 국가만을 위해서 "당신 자신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시오!" 라고  

말하고, 민족주의자들은 자기 민족만을 위해서 "당신 자신도 구하고 우리도 구

하시오!"라고 할 것이며, 부자들은 부자계급만을 위해서 "당신 자신도 구하고

우리도 구하시오!"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구원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제자들을 보낸 이방인의 구원에 대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더구나 십자가 밑에서 아들의 죽음 때문에 심장이 찢어지는 주님의 사랑하는 성

모님에 대해서도 한 마디 말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들 세계의 구원만을 내세우는 극단의 이기주의적인 태도였습니다.

만일 좌도에게 구원을 주셨다면 그 구원은 무슨 구원이겠습니까? 그것이 영원한

삶을 위한 영혼의 구원이었을까요? 그들이 원하는 구원은 불의한 강도에게 복을

주는 구원, 그 강도를 십자가에서 풀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종교가

특정한 계급에게, 그것도 물질적이고 극히 현세적인 구원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종교는 극히 이기주의적인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예수

님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좌도의 자기 중심주의적인 구원의 요청에 대해서는

아무런 응답도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밑에서 애통해하는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제자 요한에게 간접적인 답변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

수님은 그들에게 ’마리아’ 또는 ’요한’ 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들에게 개별적인 이름을 부르셨다면 그들은 개별적인 존재로

밖에는 머무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모든 계급을 초

월하시고자 했습니다.

 

 예컨대 ’어머니’라고 불렀더라면 ’마리아’는 그분의 어머니밖에 더 다른 어머

니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이라고 불렀더라면 그는 제베대오의

아들밖에 다른 이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부인’이라

했고 요한을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부인, 보십시오. 부인의 아들입니다."라고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보시오, 당신

의 어머니시오."(요한 19, 26-2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어떤 특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님을 일러주십니다. 사람들은

모든 인간의 인척관계 속에서 종교의 의미가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은 당신의 종교는 이기적인 것이 아니며 어떤 개인이나 일당 또는 특수계급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영원히 증명하시고자 마리아와 요한을 모자지간으로 맺어

주셨습니다. 그분의 복음은 전 인류를 한 가족으로 묶어놓을 수 있다는 뜻입니

다. 마리아는 더 이상 예수님의 어머니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아

담이었듯이 마리아는 새로운 하와로서 구원의 사명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혈육의 관계가 아닌 영적인 관계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시오, (이들이) 내 어머니며 내 형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야말로 내게는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입니다.(마르 3, 34-35)

 

 

예수님은 인간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마리아는 육체적으로 그의

어머니였지만 이제는 "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요한 1, 13)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리아를 전 인류의 어머니로 하기 위해서 ’부인’이라고 부르

셨습니다.  

 

’부인’은 만인의 어머니가 될 소명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는

제베대오의 아들이었던 ’요한’은 새 어머니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십자

가 아래 마리아의 영혼에서 태어난 최초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베드

로가 그 두 번째이겠고 안드레아가 세 번째, 야고보는 네 번째, 그리고 오늘 우

리는 몇 백만번째로 태어난 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가정과 새로운 사회관계를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만드신 새로

운 사회관계야말로 이 세상의 경제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그분의 나라를 찾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런 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루가 12, 31)

 

 

종교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한 나라의 정부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닌 것

처럼, 또 어떤 학문이 개인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종교도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의 사회성은 어떤 도덕적 집단이나 국가, 혹은

인종에 제한된 그런 부분적인 사회성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초월하는 사해동포

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시는 새 사회관계는 영적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그는 "요한, 나

의 어머니를 부탁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고, 마리아에게도 "마리아! 당

신이 나를 돌보았듯이 요한을 돌보아주십시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한의 사이를 아주 자연스럽게 모자관계로 맺어주셨습니다.

 

 종교는 책임의 공동분배를 요구합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길렀습니

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아들을 받아들여 그를 사랑하고 길러야 했습니다. 요한

도 제베대오의 아들로서 아들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리아의 아

들로서 새로운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길 어떠한 짓도 하

지 않고 새로운 차원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마리아는 이제 다른 책임을 지게 됩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성령강림날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돌보듯이 초대교회를 돌보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요한도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들은 ’아들’이란 말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는 예수승천 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얼마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는지 보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으니,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세상은 그분을 알

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1 요한 3, 1)

 

 

 그리스도에게는 종족의 차이나 계급의 차이, 인종의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를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완

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관계를 통해 그분은 인간의

문제, 그리고 사회정의를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노예제도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인류가 모두 하

느님의 자녀가 되어 평등하다는 원칙을 알 때까지는 노예제도가 결코 근절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린이 진료소에 대한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직접

어린이가 되심으로써 모든 어린이가 귀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민주주의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

에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미 빌라도에게 18세기에

있을 독립선언문의 내용인 모든 권리와 자유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선

언하셨습니다.

 

 주님은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스스

로 목수일을 하심으로써 노동의 존엄성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손아랫사람들에게 친절하라는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친히

수건을 준비해서 당신 제자의 발을 씻어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서 크게 되

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 가운데

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 43-44)

 

 

그리스도께서 맺어주신 새로운 인간관계의 본보기는 노예였던 오네시모의 사건

입니다. 그는 주인인 필레몬에게서 도망쳤습니다. 그러고는 자기를 그리스도교

로 개종시켜준 바울로를 찾아갔습니다.

 그때 바울로는 그에게 편지를 적어주면서 필레몬에게로 돌아가라고 권유했습

니다. 그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옥중에서 얻은 나의 자식 오네시모에 관하여 그대에게 부탁합니다. 그가 전에

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자였지만 지금은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쓸모있는 자가 되

었습니다.(필레 1, 10-11)  

 

 

오네시모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고 이제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

울로는 외쳤습니다.

 

 이제는 유대인도 없고 헬라인도 없으며, 노예도 없고 자유인도 없으며, 남성이

랄 것도 여성이랄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갈라 3, 28)

 

 

 그의 말에 의하면 인종의 차별도 없고 계급의 차이도 없으며, 남녀 성의 차별

은 더더욱 없습니다.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전쟁을 하려고 했을 때, 두 나라의 대포를 녹여 그리스도

의 상을 만들어 양국의 국경선이 있는 안데스 산맥에 세우고 ’안데스의 그리스도’

라고 이름 붙이자고 제안한 사람은 한 여성이었습니다.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발 밑에서 두 나라가 체결한 이 평화조약이 깨어지는

   것보다 이 산들이 먼저 깨어지리라.

 

 

 그런데 이 조약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라는 구절을 읽고 있습니

다. 이 말은 당신들의 이익을 사랑하듯이 다른 사람의 이익도 사랑하라는 뜻입

니다. 우리는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의 이익이 새로운 관계로 묶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결코 우리 개인의 특수성을 희생하면서까지 공동체

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이기주의적인 정신이 있는 한 사회에 대한

불만은 해소될 수 없습니다. 사회의 모든 계층이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계층간의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국가가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

한다면 결국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진정 십

자가상의 세 번째 말씀을 알아듣는다면, 경제적인 평등한 분배가 사람들을 형제

롤  만들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갖게 됨으로서 경제적인 평

등한 분배의 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형제가 될 때

에만 경제적인 평등이 가능합니다.

 

 성서에 나타나는 방탕아는 재산이 분배되면 평화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새로 맺게 되자 비로소 재산

분배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건의 공동분배는 우리가 개인적인 것의 공동분배를 시작하기 전에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개인의 이기주의는 계층의 이기심에 의해서 바로잡힐

수가 없습니다. 이기심은 곧 정신 이상의 현상입니다.

 정신 병원을 두고 이렇게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날개를 갖고 날아 다니는 제멋대로의 세계가 바로

이곳이다. 여기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우물 속에 가두어두는 곳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야 무엇을 어떻게 생

각하든지 전연 관여하지 않는 세계이다."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게 되면 자신을 증오하게 됩니다. 그들은 제멋대

로 행동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서 증오를 합니다. 또 자기의 길을 스스로

막아버리고 방황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화목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

과도 화목할 수 없습니다.   

 

 진보적인 학교에 다니는 한 젊은이가 "나는 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하는

가?" 하고 물었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습니다. 자기표현에만 골몰하는 이러한

나이에 자기환멸을 느끼게 된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다마스커스 도상에서 증오와 분노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울

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 돋친 막대기에다 발길질해봐

야 너만 다칠 뿐이다 (사도 26, 14)    

 

주님은 수레의 예리한 못에다 발길질을 하여 자신을 다치게 하는 소의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교훈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나에게 반역하는 것

은 너 자신을 반역하는 것이다. 그것은 너 자신의 멸망이다."

 

  세상 사람들과 세상의 국가와 제도들은 하느님 아버지 아래에서 모든 사람들

이 형제라는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다른 질서를 찾기 때문에 그들 스스로를 파

괴하고 있습니다. 계급의식이 형제의식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세상은 불행할 뿐

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귀한 자유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라면 그것

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기주의자들에게 주시는 십자가의 교훈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다른 사람들

을 위해서 사는 법을 배워라. 그것이 바로 너희가 사는 길이다."

 

 종교는 바로 이와 같은 새로운 인간 관계를 맺어줍니다. 우리는 조국이라는 모

태로부터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또한 그리스도가 직접 세운

교회라는 모태로부터 영적으로 태어났습니다.

 

 인간이 어떤 제도를 만들 때에는 한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듯이 종교도 한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한 개인이 태양을 소유할 수 없듯이 한 개인이

개인의 종교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만일 당신 개인의 종교가 당신을 하느님께

연결시켜준다고 한다면 우리 사이의 공동의 아버지는 없어지고 맙니다. 다시 말

해서 너와 나를 연결시켜주는 하느님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음악회에 참석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가수들이 제멋대로 노래를 부르고, 지휘자

로부터 지휘봉을 빼앗고 자기의 곡만을 휘파람으로 불어댄다면 그것이 올바른

합창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종교문제에 대해서는 왜 개인주의를 주장합니까? 종교의 지휘자는

하느님이신데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는 종교가 참종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러므로 누구라도 "내가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종교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종교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그분의 진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

문에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문제는 나의 문제이지 다른 아무와도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물에 파문을 일으키지 않고 돌을 던질 수 없듯이 나의 개인 행동이 사회와 무

관할 수는 없습니다.

 

 도덕은 본질적으로 세 가지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 나의 양

심과의 관계, 나 자신과 나의 이웃과의 관계, 나 자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어떠한 잘못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

속 깊이 들여다봅시다. 그것에 저항하는 폭력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양심은

그것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도덕적인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나와 내 양심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나 자신을 거스르는 반역행위입

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가장할 수 있지만 마음 속에 도사린 좌절감과 도덕적

인 양심의 가책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둘째, 타인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끊고 인간관계

를 단절시키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와 같이 개별적인 생각으로 살아갈 때에 전쟁

이 터지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이 공급하는 사랑이라는 연료로 가장 잘 달리는 하

느님이 만드신 자동차라고 한다면, 개인주의는 미움이라는 연료로 자동차를 움

직이려는 행위이며, 마침내 그 자동차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온갖 종류의 다툼, 불목, 전쟁, 알력, 투쟁은 모두가 그릇된 ’독립선언’에서 나

옵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독립, 동료들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데서 모든 문

제가 야기됩니다.

 

 개신교인과 가톨릭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서로 다른 궤도에서

문제를 제기한다면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똑같이 서로가 서로를 옹호하는

자세가 없다면 결코 평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톨릭교 밖에서는 성모님에 대한 이해가 퍽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서 우리에게 어머니로 주신 성모님의 위치를 우리는 옳게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의 공동 피조물이요 하느님의 똑같은 자녀들이며 그리스도의 같은 형제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성모 마리아의 자녀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리아의 자녀로서 딕슨이 읊조렸듯이 다음과 같이 마리아께 우리의 시를 읊어

야 하겠습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랑스러운 여인이여,

 

 나에게 기도하는 법을 일러주십시오.

 

 하느님도 당신 어린 아들이었으니

 

 그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일러주십시오.

 

 당신은 그를 당신 무릎 위에 사뿐히 앉히셨습니까?

 

 당신은 그에게 노래를 불러주셨습니까?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하듯

 

 당신은 밤에 그의 손을 잡았습니까?

 

 당신은 그에게 세상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까?

 

 오! 그리고 그는 울었습니까?

 

 내가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면

 

 그는 싫어할까요?

 

 그리고 천사의 나래는 소리를 내나요?

 

 내가 낮은 소리로 말해도 그는 들을까요?

 

 그는 지금 나를 아실까요?

 

 말해주십시오, 당신은 그것을 압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랑스러운 여인이여!

 

 기도하는 법을 일러주십시오.

 

 하느님이 당신의 어린 아들이었으니

 

 당신은 그것을 아실 테지요.

 

 

 

 

 

 

 

 

 

 

 

 

 

 

 

 참고로 위의 글은 미국이 낳은 저명한 설교가 풀턴 쉰 대주교님의 저서

 

’Seven Words to the Cross’ 中에서 발췌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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