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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간략하게 알아본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현황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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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1-16 조회수969 추천수3 신고

 

 


 아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먼저 눈 여겨 볼 것은 왜란 당시 침략의 선봉이었던 왜군들

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의 대표적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으므로 추후 소개하겠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



1)1592년 4월 일본의 불교 신자 풍신수길은 15만7천여  명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 출정(出征)을 계기로 일본 국내에 크게 퍼진 천주교를 없애고자 했다. 선봉장으로 천주교 신자들만으로 편성된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흑천장정(黑田長政  구로다 나가마사)를 비롯하여 오도순현(五島純玄 고지마 쥰겐),  천초종원(天草種元 야마쿠사 다네모토)등 5만여 명이었다. 1593년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인 전교회장(후

간 에이온)과 함께 소서행장이 머물고 있던 경상도 웅천성에 왔다. 왜군 신자들을 돌봐  주었으나 별로 전교 활동을 못하고 1595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2)임란 7년 후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4만여 명 중에 장기(長崎)지방 근처에서 7천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후 덕천막부(德川幕府)의  금교정책은 1611년부터 1720년까지 1백여년 계속되었다. 조선인 신자 7천명도 모두 순교하였다.

3)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인질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데리고 갔는데,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아담 살 신부와 사귀게 된다. 세자가 북경에 있는 동안 조선인 2~3명이 세례 받았
다고 한다.

4)우리나라 실학(實學)운동의 선구자는 지봉 이수광(1563~1628)이다. 특히 마태오 리

치 신부가 지은 책 [천주실의]등을 보고 새로운 실학을 일으켰다. 이 서적이 전승되어

그 후 8대손에 이르러 천주교를 믿는 운동이 이어 나고 후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5)이수광의 실학 운동이 이어 오는 중에 1백여 년 지나 천주교 연구 운동이 한강 유역

광주에서 남인 학자 이익과 그  문인들 사이에 일어났다. 특히 천주실의를 애독하면서 [천주는 곧 유가의 상제(上帝)와 같다]고했다. 1760년 경에 이익의 제자 안정복을 비

롯하여 선비들 사이에 천주교 서적을 서학(西學:서양에서 들어온 학문, 天學:천주를 믿

는 학문)이라 하여 크게 읽혀졌다.

6)이익과 안정복 사이에 논의되던 천주교는 마침내 믿는 신앙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거의가 남인파 학자들로 권철신, 임신 형제, 이벽과 정약전.약종.약용[1762~1836년,

다산(茶山), 요한] 삼형제 등이다. 이들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천

주교 교리연구 강학회를 열고 신앙 운동을 일으켰다.

7)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한 당시 27세 이승훈은 부친이 동지사로 북경 가는 편

에 따라가 그곳 천주당에 갔다. 이벽의 부탁대로 거기서 40여일 머무는 동안 필담(筆

談)으로 교리를 배우고, 귀국 길에 1784년 2월 그라몽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조선인 선비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 명례동[명동] 김범

우의 집에서 이벽을 중심으로 이승훈, 정약전 삼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조선 교회를 창립하였다.

8)1784년 겨울부터 김범우의 집에서 주일(主日)행사를 거듭한 것이 관헌에 발각되어

모였던 신자들이 모두 잡히게 되었다. 김범우는 태형을 받은 후 귀양살이에서 죽었다.

첫 번째 순교자이다. 이후 1887년 5월30일 한.불 수호 조약[1886. 6. 4]이 비준될 때

까지 1백 3년 동안 공적(公的)박해를 받게 된다.

9)1789년 신해년에 조상 제사 문제로 박해를 받았다. 이것이 그 후 1백년 동안 거듭되

는 박해의 표면적 이유가 된다.

10)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들어옴으로써 조선교회 창설 11년만에 성직자가 있게

된다. 전국 신자 수는 4천여 명이 되었다. 그 후 1800년에는 전국에 1만여 명의 신자가  생겼다.

11)1801년 신유년 주문모 신부와 이승훈을 위시하여 이가환, 권철신, 정약전 삼형제 등 남인파 학자들이 모두 처형되거나 귀양감으로써 대박해가 일어났다.

12)1831년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성직자 없이 30년 동안 조선 교회가 크게 발전한 것

에 감동되어, 북경 교구에서 독립된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를 임명하였다. 이는 조

선 교회 창립 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이때 프랑스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하

게 되고 교우 수는 6,640명이었다.

13)1839년 기해년 현종 때 두 번째 대박해가 일어났다. 2백70여 명이 순교했다.

14)1846년 병오년 조선 교회 첫 성직자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했다. 그 후 1849년 25대

왕 철종[은언군의 부인인 송 마리아의 손자]이 즉위하면서부터 1863년까지 천주교는 보

호를 받고 발전하게 된다.

15)1866년 병인년부터 대원군의 쇄국 정책으로 박해는 1871년까지 연쇄적으로 계속되어

1만여 명이 순교.[1868년 일본은 구미 각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근대화로서 명치유신

이라는 정치 개혁을 할 때다]

16)1887년 한.불 수교 조약이 발효되었는데 "양국인이 서로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고, 1만 2천여 명의 신자가 늘어났다. 이때부터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유롭게 전교하고, 개신교도 종교 자

유를 가지게 되었다.

17)1892년 명동 대성당이 세워진다. 1896년 대원군의 부인 민씨[고종의 어머니]가 마리

아로 세례를 받고 1898년 선종 했다.

18)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행사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왔으며, 수

많은 순교자들 중에 103위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19)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례로 제44차 세계 성체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였다.


 

 

 



 *한국 천주교 현황(1995년 1월 1일 현재)
 
 *신자 수 : 3백 33만 8천 9백 18명
           (전체 인구 4천 4백 45만 3천명의 7.51%)
 *교구 수 : 15개 (본당 수 : 9백 75개)
 *해외 교포 신자 수 : 10만 8백명 (미국 70,320명)
 *교포 본당 수 : 112개 (50개 국가)
 *교포 집회 . 연락소 : 73개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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