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간략하게 알아본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현황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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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1-16 | 조회수971 | 추천수3 | 신고 |
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의 대표적 가톨릭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으므로 추후 소개하겠습니다.
이 출정(出征)을 계기로 일본 국내에 크게 퍼진 천주교를 없애고자 했다. 선봉장으로 천주교 신자들만으로 편성된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흑천장정(黑田長政 구로다 나가마사)를 비롯하여 오도순현(五島純玄 고지마 쥰겐), 천초종원(天草種元 야마쿠사 다네모토)등 5만여 명이었다. 1593년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인 전교회장(후 간 에이온)과 함께 소서행장이 머물고 있던 경상도 웅천성에 왔다. 왜군 신자들을 돌봐 주었으나 별로 전교 활동을 못하고 1595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후 덕천막부(德川幕府)의 금교정책은 1611년부터 1720년까지 1백여년 계속되었다. 조선인 신자 7천명도 모두 순교하였다. 소현세자는 아담 살 신부와 사귀게 된다. 세자가 북경에 있는 동안 조선인 2~3명이 세례 받았 치 신부가 지은 책 [천주실의]등을 보고 새로운 실학을 일으켰다. 이 서적이 전승되어 그 후 8대손에 이르러 천주교를 믿는 운동이 이어 나고 후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광주에서 남인 학자 이익과 그 문인들 사이에 일어났다. 특히 천주실의를 애독하면서 [천주는 곧 유가의 상제(上帝)와 같다]고했다. 1760년 경에 이익의 제자 안정복을 비 롯하여 선비들 사이에 천주교 서적을 서학(西學:서양에서 들어온 학문, 天學:천주를 믿 는 학문)이라 하여 크게 읽혀졌다. 거의가 남인파 학자들로 권철신, 임신 형제, 이벽과 정약전.약종.약용[1762~1836년, 다산(茶山), 요한] 삼형제 등이다. 이들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천 주교 교리연구 강학회를 열고 신앙 운동을 일으켰다. 에 따라가 그곳 천주당에 갔다. 이벽의 부탁대로 거기서 40여일 머무는 동안 필담(筆 談)으로 교리를 배우고, 귀국 길에 1784년 2월 그라몽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조선인 선비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 명례동[명동] 김범 우의 집에서 이벽을 중심으로 이승훈, 정약전 삼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조선 교회를 창립하였다. 모였던 신자들이 모두 잡히게 되었다. 김범우는 태형을 받은 후 귀양살이에서 죽었다. 첫 번째 순교자이다. 이후 1887년 5월30일 한.불 수호 조약[1886. 6. 4]이 비준될 때 까지 1백 3년 동안 공적(公的)박해를 받게 된다. 는 박해의 표면적 이유가 된다. 된다. 전국 신자 수는 4천여 명이 되었다. 그 후 1800년에는 전국에 1만여 명의 신자가 생겼다. 에 감동되어, 북경 교구에서 독립된 조선 교구를 설정하고 주교를 임명하였다. 이는 조 선 교회 창립 후 47년 만의 일이었다. 이때 프랑스 성직자들이 입국하여 전교 활동을 하 게 되고 교우 수는 6,640명이었다. 왕 철종[은언군의 부인인 송 마리아의 손자]이 즉위하면서부터 1863년까지 천주교는 보 호를 받고 발전하게 된다. 1만여 명이 순교.[1868년 일본은 구미 각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근대화로서 명치유신 이라는 정치 개혁을 할 때다]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고, 1만 2천여 명의 신자가 늘어났다. 이때부터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유롭게 전교하고, 개신교도 종교 자 유를 가지게 되었다. 아로 세례를 받고 1898년 선종 했다. 많은 순교자들 중에 103위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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