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은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인가? (1)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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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1-27 | 조회수1,194 | 추천수2 | 신고 |
- 신앙과 교리 -
신앙의 의의
’신앙’이란 단어는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에서 별다른 구분없이 통칭 해서 많이 쓰는 말이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라고.
그러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외면적인 일치점은 아마 이 신앙이 라는 술어를 ’사용’한다는 그 점 하나뿐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신앙이란 말의 의의에 들어서서부터는 벌써 양자간에 현격한 차이가 생긴다. 이 로 말미암아 양자의 내용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트파의 대부분은 신앙이라는 말로 자기의 내적 종교적 체험 또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다. 즉, 그리스도의 인류 구속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았다는 주관적 정감적 확신을 이 말로 표현한다. 이른바 그들의 신앙을 가리켜 ’신뢰적 신앙’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의미의 신앙이라야 구원에 필요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들의 신앙관이 이러하므로 주 예수께서 몇 가지 성사(聖事)를 세우셨는가, 교 회의 제도는 어떻게 정하셨는가의 문제는 도외시한다. 구원을 받았다는 소위 ’믿음’만 품으면 의화(義化, Justificatio : 義人이 된다는 뜻으로, 죄사함을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됨을 의미함)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신앙이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진리를, 하느님의 권위를 우러르며 승복함으로써 받아들이는 지능 행위, 즉 인식 행위라고 규정한다. 이를 신뢰적 신앙에 대조하여 ’교리적 신앙’이라 한다. 하느님 께서 당신 자신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영혼과 그 성화(聖化)와 구원에 대 하여 하신 말씀은 비록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울지라도, 우리의 지능을 그 에게 복종시켜 그를 사실로 인정하는 행위가 곧 교리적 신앙이다.
프로테스탄트의 신뢰적 신앙이 기분적, 정열적, 주관적, 무비판적인 것 임에 반하여, 가톨릭의 교리적 신앙은 냉정한 이지적, 객관적, 비판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는 교리의 어느 점을 이렇게 믿든지 저렇 게 믿든지는 마음에 두지 않고, 그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확 신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교리는 꼭 그대로 인정하며, 교리의 진가(眞假) 분별에 대한 관 심이 매우 예민하다. 또 구원에 요구되는 것은 신뢰적 신앙이 아니고 교 리적 신앙임을 분명히 가르친다.
트리덴티노 공의회에서는 "만일 의화시키는 신앙은,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죄를 사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뢰심’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파문을 당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교리적 신앙’이 요구된다는 것을 성서는 여러 번 말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토마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 29). 여기서 ’믿는 사람’이란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하였을 지라도 부활 사실을 믿는 사람, 즉 교리적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 입니다" (로마 10, 9)라는 바오로 사도의 이 말도 교리적 신앙을 두고 하는 말이 틀림없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로 가 까이 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당신을 찾는 사 람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 11, 6).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요한 5, 1).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주님, 우리가 일러준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이사야도 한탄한 일이 있 습니다.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 야 들을 수 있습니다"(로마 10, 14-17).
이상의 말씀 가운데 신앙 대상은 "하느님의 존재, 하느님의 상선벌악, 그리스도는 구세주이시다" 등이다. 이 신앙이 교리적 신앙임은 분명하다.
성서는 이 교리적 신앙을 영생과 영벌로써 우리에게 요구한다.
"나는 이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 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 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 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로마 1, 16-17).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 3).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 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올 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로마 4, 5).
"그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기 때문에 구원 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2데살 2, 10).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단죄를 받 을 것이다."(마르 16, 15-16).
여기서 말하는 복음이란 그리스도의 강생, 수난과 못박혀 죽으심, 부활 구속 등 계시 전부를 의미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따라서 그 복음에 대한 믿음은 곧 교리적 신앙이요 신뢰적 신앙이 아님 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라는 말을 들어, 신앙이란 곧 신뢰가 아니냐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한국 천주교회에서 번역한 성서의 이 부분에는 "신앙이란 희망 하는 그 일에 대한 굳은 신념이며,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굳은 믿음이니라" 라고 되어 있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신(信)은 망(望)하는 것들의 실상(實狀)이요, 견(見) 치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니라."라고 번역하였다. 즉, Substantia(실재,實在) 를 실상(實狀)이라고 번역하였다. 그 본뜻은, 신앙이란 희망 대상(하늘 나라) 의 기초, 즉 그(대상)들을 지지하는 것이란 뜻인데 이것은 그 실재를 굳게 믿 기 때문이다. 어느 번역이든지 신앙은 희망의 전제요 기초라고 하였다. 또 이 기초인 신앙은 교리적 신앙임은 물론이다. "견치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 은, 우리가 하늘 나라의 내용을 비록 보지는 못하지만 신앙으로 그를 인정하 게 되거나 또는 알게 된다는 말이다.
이 신앙이 바로 교리적 신앙이라는 것은 히브리서 11장 3절의
"우리는 믿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압니
다"라는 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구원, 즉 의화에 요구되는 신앙은 언제든지 교리적 신앙이지 신뢰가 아니다. 이 신뢰란 교리적 신앙을 전제로 하는 행위이다. 또 반대론자 들(프로테스탄트 궤변론자들)이 여기에 대하여 흔히 인용하는 성서 구 절은 기적에 관계되는 것이지 의화에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구원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적 의미의 신앙을 갖기란 불가능 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행위가 신앙이므로, 하느님께서 회개자에게 사죄와 의화의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수많은 사람에게 일일이 이 은혜를 선언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가 하느님의 이 말씀만으로 구원의 확인을 얻을 수 는 없다. 바오로 사도도 "나는 양심에 조금도 거리끼는 일이 없습니다. 그 렇다고 해서 나에게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1고린 4, 4) 라고 하였 다. 이 말은, 의화의 주관적 확신에 신뢰한다 하더라도 이것 때문에 실제 로 의화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우리의 의화는 오직 하느님께서만 확실히 알고 계신다. 우리가 그것을 확실히 알게 될 시기는 오직 주께서 오셔서 어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밝혀 내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그 때(1고린4, 5 참조)뿐이다.
그때 전에는 "착한 일을 하며 사는 슬기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랑해 주실지 미워해 주실지는 알 길이 없다"
(전도 9, 1).
"’나는 마음에 거리낄 것 없다. 나는 죄가 없이 깨끗하다’ 고 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잠언 20, 9).
구원받는 데 필요한 것은 교리적 신앙이라는 것은, 초대 교회 이래 전 통적 신경, 세례 지원자의 교육, 교부들과 순교자들의 증언, 파문의 실 례등 초대 교회 역사 전체가 이를 또한 증명한다.
신앙의 동인(動因)은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를 믿지 않을 수 없는 근본 이유, 즉 동인 (Motivum formale fidei)은 무엇인가? 한국「천주교 요리 문답」에는 "신덕은 무엇이뇨. 신덕은 천주 계시하사 성교회 맡기신 모든 진리를 천주의 진실하심을 인하여 확실히 믿는 덕이니라" (n. 164) 라고 하였 다. 즉, 계시 진리를 만족히 이해하며 긍정하여서가 아니고, 오직 진실 하신 하느님의 권위 때문에 신앙한다.
이것은 바티칸 공의회가 정의한 "계시에 대하여 우리의 본성과 지능의 힘으로 그 비오(秘奧)를 각파(覺破)하여서가 아니고, 오직 속지 못하시 고 속이지 못하시는, 계시하시는 하느님 자신의 권위에 승복하여 그를 진실의 것으로 믿는다"라는 말과 일치되는 것이다. 즉, 전지(全知)하시 고 진실하시어 우리를 속일 수 없는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것이기 때문에 믿는다.
예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당신의 전지와 진실의 권위를 보이시 면서 믿기를 명한 것이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 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 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3, 1).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기에 나도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그대로 이 세상에서 말할 뿐이다" (요한 8, 26).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신앙이란 지능의 이해이거나 정서적 감흥 상태가 아니라 오직 계시하신 하느님 예수의 권위에 승복 하는 행위임을 밝히고 또 이를 권면하였다.
"형제 여러분,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 을 분명히 말해 둡니다. 이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에게 계시하여 주신 것 입니다."(갈라 1, 11-12).
"우리가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에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1데살 2, 13).
그러므로 주님의 계시를 믿는 사람은 곧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여 승복 하는 사람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그분의 권위를 부인하거나 의심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사람의 증언을 인정한다면 하느님의 증언은 더욱더 인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아들에 관해서 증언 해 주신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사람은 이 증언을 자기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듭니다. 그런 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에 관해서 증언하신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1요한 5, 9-10).
이 거짓말은 두 가지 원인으로 될 수 있다. 첫째, 자기가 확실히 알면 서도 일부러 숨기고 남을 속여서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그의 ’비진실 성’ 때문이다. 둘째는, 비록 남을 속일 의사는 없을지라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을 경솔하게 말함으로써 되는 것으로, 이것은 그의 ’무지’ 때 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를 믿지 않는 것은 그분의 증거를 부 인하는 것이요, 그분의 증거를 부인하는 것은 그분의 권위를 부인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행위이다. 즉, 하느님의 ’전지하 심’과 ’진실하심’ 두 가지를, 혹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의심하거나 부인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를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말한 대로 단죄를 받아 멸망하게 되고, 믿는 자는 죄사함과 의화, 구원의 은혜를 받아 영 원히 살리라는 말씀이 성서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의 권위를 부인하는 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순 이다.
여기서 매우 주의하여야 할 점이 하나 있다. 하느님의 권위를 부인하 게 되는 경우는 하느님의 계시 전부 또는 몇몇 중요한 부분만을 믿지 않을 때만이 아니라, 그중 가장 작아 보이는 것 한 가지만 믿지 않아도 그 즉시 하느님의 권위는 부인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는 중죄를 면할 수 없고, 이런 상태로는 영원한 생명을 바랄 수 없다. 가령 주님의 계시 진리 열 가지 중 아홉 가지는 완전히 믿으면서 나머지 한 가지를 믿지 않는다면, 그 한 가지를 믿지 않는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진리를 계시하신 하느님을 무지한 분, 진실하지 않으신 분, 거짓말쟁이 로 간주하여 그분의 권위를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아홉 가지를 믿는다 해도 소위 그 믿음도 가톨릭에서 의미하는 믿음이 아니고, 다만 이지(理 智)의 승인이거나 기성(氣性)의 수긍일 뿐이지 하느님의 권위에 승복하 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권위에 대한 일부 부인은 곧 그 전부를 부인하 는 것이 된다.
한국 「천주교 요리 문답」에는 "자기 탓으로 천주 교회 밖에 있는 자 는 구령하지 못하나니라"라고 했고, 그 중에는 "천주교회의 신덕 도리 하나라도 일부러 믿지 않는 열교인(裂敎人)"(n. 88, 89)도 구원의 은혜 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신덕 도리’란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로서 믿을 교리인데, 이를 도그마(Dogma)라고 한다. 세례를 받은 자로서 이 도그마 중 한 가지만 믿지 않아도 그를 열교인이라고 규정한다. 가톨릭 신자 중 누가 이 믿을 교리 중 하나라도 믿지 않거나 이설(異說)을 제창 하여 그것을 고집한다면, 교회는 하느님의 권위를 부인한 이 자를 단연 파문해 버린다.
바오로 사도도 "이단자는 한두 번 경고해 보고 그래도 말은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으시오. 그대도 알다시피 이런 사람은 옳은 길을 이미 벗어 나서 죄를 짓고 있으며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는 것입니다."(디도 3, 10) 라고 하였다. 거듭 말하지만 하느님 권위를 한 점이라도 부인하는 것은 곧 그 전부를 부인하는 것이다.
독자는 프로테스탄트적 신앙과 가톨릭적 신앙의 커다란 차이를 여기서 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적 신앙은 주관적인 것이요 자유 주의적인 것이다.
즉,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음을 믿고 자기도 이 구속 공로를 믿 기만 하면 사죄와 의화의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교리는 몇몇 중요한 교리, 즉 하느님의 존재, 그리스도의 천주성, 인류 구속 등만 믿고, 성세 성사, 고해 성사, 성체 성사, 교회 통치 제도 등에 관하여는 믿든지 안 믿든지 관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교파 안에서도 교리상의 이견이 분분하여도 내버려 둔다. 그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 예수를 따라가는 태도가 아니고, 주 예수께서 우리 를 따라오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주께서 가르치신 대로 믿는 것이 아니 고,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인정하여 주시기를 요구하는 태도인 것이다.
즉 "당신이 세우신 교회 제도야 어떻든, 또 베드로 사도와 그 후계자들
에게 교회의 권위를 맡기셨든지 안 맡기셨든지 거기에 대하여는 관심없
습니다. 그런 제도는 워낙 우리 이성이 승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당신을 믿기만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회개하면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으니 회개만 보시
고 죄를 사하여 주시든지 고해 성사로 사하여 주시든지 그것은 당신의
재량에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고해 성사가 당신이 세우신 것이든 아니
든 상관없이 나의 기성(氣性)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저 혼자서 죄만 통
회하겠으니 내 죄만은 꼭 사하여 주셔야만 됩니다. 성체 성사에 당신이
실재하실 수도 있고 실재하지 않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쨋든 우리
는 그 ’실재’를 믿기는 참으로 어렵고, 단지 돌아가신 것을 기념하는 행
사 정도로만 인정하겠습니다. 언제든지 당신을 신뢰하는 그 정감(情感)
만은 변함이 없으니 당신은 우리를 꼭 구원하셔야만 됩니다…"라는 태
도이다.
이것이 과연 주 예수를 믿는 것이가. 예수더러 자기를 믿으라는 말인가. 독자가 만일 스승에게 자기 의견을 따라와 달라고 강요하는 제자들을 가 졌다면 과연 그들을 어떻게 보겠는가.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은 아예 이렇게 처음부터 틀이 잡혀 있어서 교리, 즉 진리를 철저히 연구하려 들기가 어렵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으로 믿 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므로 누가 진리를 더욱 깊이 연구하려 해도 그것은 거의 헛수고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신학 서적을 읽어보면 저자 에 따라 의견이 다르고, 교직자들에게 문의하면 교직자에 따라 그 답이 다르다.
결국은 권태를 느끼는 동시에 예수를 믿으면 그만이라는 결론에 귀착 하고 만다. 프로테스탄트 교역자들은 교리 문제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문제를 삼으면 의견 대립만 날카로워지므로 차라리 예수를 믿으면 그만 이다에 눌러 앉아 있으려 할 뿐 더 나아가기를 두려워한다.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영적 빈혈 증상의 주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에 비하여 가톨릭 신앙은 객관적인 것이다. 하느님께서 한 번 계시 하신 이상, 그것이 우리 이성에 영합되지 않을지라도 우리 이성을 굴복 시켜(2고린 10, 5 참조) 그에 승복하고 신앙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죄가 된다. 고집하면 기탄없이 파문이다. 교리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 기는 가톨릭을 따를 교회가 없다. 이것은 초대 교회 이래 일관된 태도 이다.
교리적 신앙을 도외시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 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그만이다’주의는 그리스도교가 성립된 지 1500 년 후에 생긴 병든잎이다. 독자들은 앞의 필자의 글에서 가톨릭이 초대 교회 이래 교리 신앙에 얼마나 깊은 유의(留意)를 해 왔는지를, 이설(異 說)에 대한 교부들의 필설전(筆舌戰), 공의회 소집, 파문 등의 사실을 보아 단편적이나마 엿볼 수 있었을 것이다.
16세기 이전의 네스토리안파, 에우티케스파도 신앙 교리의 어느 한두 부분에 대한 이설을 고집하여 결국 파문을 당했다. 어느 면으로는 그들 도 교리적 신앙에 대한 마음씀이 지극하였다고고 할 수 있다. 오늘날과 같은 프로테스탄트적 교리 무관심 증세는 16세기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글의 연재가 끝나면 현대의 종교 무차별론자 - 즉 종교란 다 좋고 모두 진리이다라는 현대에 만연된 일종의 정신병과도 같은 현 상의 근본 원인인 프로테스탄트의 교리 무관심증 내지는 그들의 종교문 제의 사적(私的) 자유 해석주의를 한 번 철저히 해부해보도록 하겠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고 또한 의미있는 주제로서 이것을 알지 못하고는 현대인의 종교 무차별주의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고서 그러한 괴설 에 현혹되어 참진리의 진실된 가톨릭 신앙을 잃어버릴 지도 모를 위기 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는 수천만 신자를 잃는 것보다도 교리적 신앙의 일 점 일 획을 더 중대하게 여겨 왔다. 교리적 신앙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이 엄 격한 태도는 주님의 진리를 예의(銳意) 수호하던 사도들의 태도의 연장 이다.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거나 꾸며 낸 이야기나… 그런 일을 하지 못하
게 하시오" (1디모 1, 3-4).
"속된 잡담을 피하고 거짓된 지식에서 나오는 반대 이론을 물리치시오" (1디모 6, 20).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굳게 믿고 있는 그 진리를 지켜 나가시오" (2디모 3, 14).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전하고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책망하고 훈계하고 격려하시오" (2디모 4, 2).
"우리는 말할 것도 없고 하늘에서 온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미 전 한 복음과 다른 것을 여러분에게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갈라 1, 8).
"믿음과 양심을 가지고 싸워야 합니다. …나는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어 그들이 다시는 하느님을 모독하지 않도록 훈련을 받게 하였습니다" (1디모 1, 19-20).
2부는 다음 글에서 계속....(to be continued...)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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