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은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인가? (2)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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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1-27 | 조회수1,053 | 추천수2 | 신고 | |
- 신앙만 있으면 족한가 -
만일 누가 신앙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크나큰 오류 이고 영혼의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누가 만일 신앙만으로 죄인이 의화되는 것이라 하여 의화 은총을 얻기 위하여는 아무 협력도 요구되지 않고 또 자기 의지로 준비하고 예비하는 것은 어떤 방면으로든지 필요하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고 또 그렇다고 말 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트리덴티노 공의회 Sess. VI. Can. 9).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성서 구절을 인용한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신앙 만능주의는 루터와 칼빈 등 프로테스탄트 개조(開祖)들이 제창한 바인데, 오늘날에는 그 제자들 가운데도 이를 부인하 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위에 든 성서 구절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측의 해석에 반박하려 한다.
1. 신앙은 "인간 구원의 시초요 모든 의화의 뿌리이며 기초"(트리덴티노 공 의회 Sess. VI. Can. 8)이므로, 바오로 사도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대립시 켜 그리스도교를 대립시켜 그리스도에게 구원이 있음을 역설하기 위하여, 구 원을 위해서는 신앙이 기초가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여기 에 모든 교리를 포함시켜 말한 것이지 결코 신앙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한다 는 뜻은 아니다.
2.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구약의 율법을 가리킨다. 바오로 사도는 구약 율 법 준수로는 의화 및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지 결코 신 약 율법 준행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3. 사람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은 그 자신의 능력 때문만이 아니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되는 것이다. 이 은총은 그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에 있게 되기 전에 행한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아니고, 오로지 선물임을 가르 친 것이다. 결코 믿기만 하면 되고 착한 일은 쓸모없는 것이라는 가르침은 아니다.
1)구원을 얻는 경로를 시간적 순서로 본다면, 맨 먼저 예수께서 누구인지를 알고 믿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 따라서 그분의 요구 를 채워 드림으로써 의화의 은혜를 받는다. 그러므로 신앙을 ’구원의 시초’ ’의화의 시초’라고 하는 것이다.
성서 기자(聖書記者)가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할 때는, 신앙은 의화의 기초인만큼 이 기초와 연결된 모든 도리를 포함하여 ’신앙’이라는 말 로 표현한 것이지, 신앙만으로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구도자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를 설명 하고 나서, "이 두 가지를 믿지 않고서는 인간의 진실한 행복을 얻을 수 없 습니다. 영원한 행복을 얻으려면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를 믿어야 합니다"라 고 하며 상대방을 설복시키려고 노력한다. 이 두 가지를 다 믿을 때는 으레 거기에 연결된 모든 교리를 모두 믿게 된다. 이 말을 가지고 누가 "어떤 사 람은 하느님의 존재와 영혼의 존재만 믿으면 되지 다른 것은 더 이상 필요하 지 않다고 가르친다"라고 그릇 선전한다면,우리는 그저 일소에 붙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명문 학교에 입학하기가 옛날에 비해 매우(요즘은 다소 쉬워졌 을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아주 예전보다는) 어려워졌지만, 약 50년 전만 하 여도 교사들은 학용품을 들고 집집마다 찾아 다니며 "자녀를 학교에 보내십 시오. 입학시킨다면 이 학용품을 드리고 가겠습니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셔 야 똑똑한 사람이 됩니다. 입학시키지 않으면 자녀들은 사회의 낙오자가 됩 니다. 입학시키시면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간곡히 권하 였다.
어떤 사람이 이 말을 듣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배울 때 주의깊게 배우고 예습과 복습을 게을리하지 말며 선생님의 지도에 잘 따르고, 학교를 마치고 나면 상급 학교에 진학하여 또 부지런히 공부하여…"라는 말들은 다 빼놓고 교사가 ’입학시키시면’ 이라고 했다 해서 자기 자식을 입학만 시키면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면, 독자는 그 를 어떻게 보겠는가.
한 저서의 내용을 올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저작 동기와 저작 당시의 시 대 사조, 풍속 등에 관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예수께서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구약의 율법을 단연코 폐지하고 새 길 을 여실 때,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데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율법학자 들의 거센 반대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던 것은 과도기인지라 으례 있을 수 있 는 사태이다.이에 대항하여 사도들은,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지 율법을 지키는 데 있지 않다고 역설할 때, 그들은 단도 직입적으로 근본 문 제로 들어가 "구약의 율법이냐, 예수 그리스도냐"의 양자 택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이 그들 주장의 가장 중요점에 주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일 수 있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도 절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급박한 당시로서는 그밖의 문제들은 뒤 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주장은 당시의 정황과 서간을 집필 하게 된 동기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오류이다.
신앙과 함께 요구되는 부수 조건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여러 교부들과 학자들의 바오로 서간 주석을 보면, 오늘날 가톨릭 교 회의 주석과 일치하는 것을 누구든지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 대한 신앙의 프로테스탄트적인 해석은 초대 교회 때에는 그림자도 없던 것이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주의로만 나가면 결국은 루터가 그의 친구 멜란히
톤에게 말한 대로 "용감히 죄를 지어라. 그리고 믿기는 더욱 굳게 믿어라."라
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저 무서운 로마의 대박해 중에도 불길처럼 전파되었고, 로마 민족의 부패를 극복하였으며, 미개한 민족을 순화시킨 사실은 누구나 다 인 정하는 사실(史實)이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믿기만 하면 된다는 주의로 걸어 나왔다면 그런 놀라운 결실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2) 바오로 사도의 서간 여러 곳에서 보이는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곧 구 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임을 말한다는 것이, 그 앞 뒤 문맥으로 보아 분명하 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속 사업의 완성으로 폐지된 구약의 율법은 우리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기 위한 데에는 무용한 것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신약 권내에까지 들어와서 이것을 들어 선행 무용론을 내세우려는 것은 이만저만 부당한 견강부회(牽强附會)가 아닐 수 없다. 원래 옛 법이 폐 지되면 새 법을 세워야 질서가 유지되는 법이 아닌가. 교회를 세우신 예수께 서 교회에 새 계명을 주시지 않았을 리가 없으며, 주 예수의 신실한 사도인 바오로가 그 계명 준수 행위를 헛일로 여겼을 리가 없다. 신약 성서는 우리 에게 신앙과 함께 실천적 행위를 요구한다는 것을 다음에 겸해서 논술하겠다.
3) 에페소서 2장 7-9절의 뜻은 다음과 같다. 즉, 구원은 신앙으로 얻으며 신 앙은 인간 고유의 능력 활동 결과가 아니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이다. 은총은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아니고 오로지 거저 받은,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의 은총인 것이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유명한 은총론이다. "그 사람들은 자기 공로로 뽑힌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뽑힌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무슨 공로가 있어서 뽑힌 것이라면 그의 은총은 은총이 아닐 것입니 다."(로마 11, 6). 이것도 같은 의미의 말이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착한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오직 자비로운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것은 성서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복음의 진리이 다.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로마 11, 35).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굳건히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 자신에게서 내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자격을 주셔서 우 리로 하여금 당신의 새로운 계약을 하셨을 따름입니다."(2고린 3, 4-6).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1고린 12, 3)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닙니까?" (1고린 4, 7).
그러나 한번 은총을 받아 신앙을 가진 이상은 그 신앙에서 나오는 선행을 무용하다거나 거부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고 요구하신 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 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5, 5).
그러므로 이 열매로 인간의 행위를 과대 평가하거나 예수의 구속공로를 가 볍게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 열매는 인간 선행의 원동력이신 주 예수의 공 로(功勞)와 영광(榮光)의 현양(顯揚)일 뿐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 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에페 2, 10).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다시 태어난 사람은 다시 태어난 그 목적에 따 라 선행에 정진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선행의 열매를 맺지 않는 신앙(?)이란 죽은 신앙이요 무익한 신앙이다.
즉, "나의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행동으 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 사람을 구 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 졌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 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믿음이 있지만 나에게는 행동이 있소. 나는 내 행동으로 내 믿음을 보여 줄 테니 당신은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시오. 당신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마귀들도 그렇게 믿고 무서워 떱니다. 이 어리석 은 사람이여,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싶습 니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행동으로 말미 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닙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그의 믿음은 행동과 일치했고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은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졌으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리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사람이 믿음만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아두십시오. 이와같이 창 녀 라합도 유다인들이 보낸 사람들을 친절히 맞아들였다가 다른 길로 떠나 보낸 행동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 2, 14-26).
신앙과 선행의 관계를 이보다 더 적절히, 더 힘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 므로 신앙 만능론을 제창한 루터는 이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같은 편지’라면 서 혐오하여 루터 자신이 번역한 루터역 성서에서 뽑아 없애 버렸다.
야고보서뿐 아니라 같은 의미의 구절이 여러 군데 있다. 즉, 예수를 믿는 사 람은 부단히 금욕 극기하여 죄를 회개하고 선행에 힘쓰며,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덕을 닦으며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훈계를 의미하는 구절이 얼마든지 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로마 8, 13).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욕정을 거스릅니 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 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갈라 5, 17-24).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을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2고린 4, 10).
"여러분은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죽이십시오. 음행과 더러운 행위와 욕정과 못된 욕심과 우상 숭배나 다름없는 탐욕 따위의 욕망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진노를 살 것입니다."(골로 3, 5-6).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발자취를 따 르라고 본보기를 남겨주셨습니다."(1베드 2, 21).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루가 13, 3).
"그러니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 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사도 3, 19-20).
"그러고도 마음이 완고해서 회개할 생각도 하지 않으니 이런 자는 하느님의 공정한 심판이 내릴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벌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 니다."(로마 2, 5).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 그 것을 굳게 지켜라."(묵시 3, 3).
보라! 구원을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금욕의 고신극기(苦辛克己)도 요구되 는 것이지 신앙만으로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앙은 반드시 사랑과 더불어 활동하여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할례를 받았다든지 받 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갈라 5, 6).
그렇지 않고 신앙 하나만 있다면 그것은 무가치한 것일 뿐이다. "산을 옮길 만한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 다"(1고린 13, 2). 신앙보다도 사랑이 더 크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 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 13).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 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 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 30).
"내가 그런 일을 금하는 목적은 깨끗한 마음과 맑은 양심과 순수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불러일키자는 것입니다."(1디모 1, 5).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 13, 10).
그러므로 아무리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이처럼 위대한 사랑없이는 구원 을 받을 수 없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1요한 3, 14).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는 당신을 믿으라고 요구하셨으나 이미 당신을 믿는 제자들에게는 청빈과 온유, 정결 등의 덕행을 닦아(마태 5,1-9 참조)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완전한 자가 되기를 요구하셨다.(마태 5, 48 참조).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며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오. 거룩해지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브 12, 14).
그러므로 신앙만 있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 주님을 뵈올 줄 아는 것은 크나큰 오류이다.
묵시록 가운데는 일곱 개의 지역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믿고 안 믿고는 문 제삼지 않고, 착한 일을 하도록 힘쓰라는 것과, 직책에 충실하라는 말이 많이 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네 수고와 인내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 랄 것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네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 것은 네가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빗나 갔는지를 생각하여 뉘우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묵시 2, 2-5).
"너는 내 이름을 굳건히 믿고 있다.또 나의 진실한 증인 안디바스가 사탄이 살고 있는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너는 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너에게 몇 가지 나무랄 것이 있다. …그러므로 뉘우쳐 라"(묵시 2, 13-16).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네가 하는 일이 내 하느님께서 보 시기에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 네 잘못을 뉘우쳐라." (묵시 3, 2-3).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 리 네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든지 하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러나 너는 차지 도 않고 미지근하기만 하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 15-16).
예수께 대한 자신의 신앙만으로 만족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태오 복음 25장을 숙독하고 묵상하기를 바란다. 종들과 함께 엄격히 계산하는 주 인의 태도를 보라. 다섯 달란트를 받아 가지고 그 돈을 활용하여 다섯 달란 트를 더 번 종과, 두 달란트를 받아 가지고 역시 두 달란트를 더 번 종과, 한 달란트를 받아 가지고 그것을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내놓은 종의 비유를 보라.
받은 그대로 내민 종에게는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이 쓸모없 는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아라.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 다."(마태 25, 26-30)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우리가 신앙을 받았다 해서 신앙만 내놓을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갈라 6, 9)라는 말씀을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겠는가.
그 다음 심판에 대한 구절을 읽어보자. 신앙의 깊고 얕음을 보시고 영생과 영벌을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베풀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하시지 않 는가(마태 25, 34-36). 선을 베푼 사람들에게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 은 사람들" 이라고 하시며 하늘 나라로 부르시고, 악한 행실을 보인 사람 들에게는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마태 25, 41)라고 하시지 않 는가.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 줄 것이다"(마태 16, 27).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로마 2, 6).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 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
다"(묵시 22, 12).
이만하면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만이다는 신앙 만능론이 얼마나 헛된 말인
지 분명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3부는 다음에 계속됩니다... (to be continued...)
갈현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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