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Re67: 성인공경에 대해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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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승근배 | 작성일1999-01-31 | 조회수913 | 추천수4 | 신고 |
"하느님을 믿으면 됐지 왜 다른 성인들을 믿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성인은 현세의 삶에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찼던 분들입니다. 그러한 그분들의 삶은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로의 순례의 길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는 많은 성인, 성녀들을 그리스도 신자들의 모범으로 세웁니다. 이렇게 성인으로 세워진 분들은 우리가 현세의 삶에서 당하는 고통과 고난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를 체험했던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것은 이미 성인들께서 앞서 겪으신 것들이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서 용감히 헤쳐 나갔던 것들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성인들게 기도드리는 순간 그분들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들을 누구보다도 효과적으로 도와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단, 여기서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성인들께서는 질문과 같은 오해를 받는 신적인 위치에 있는 분들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기도하는 공동 기도자요 전구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성인들을 그 기도를 이루어주는 분들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기도하면서 하느님께 전구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교직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가 그 생활에서 오는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을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교감으로 구하는 것도 좋겠지만, 신앙인으로서 교직자의 삶을 살아가신 돈 보스꼬 성인에게 기도한다면 그 성인은 신자의 어려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것이며 그와 함께 하면서 하느님께 그를 위해 기도해 줄 것입니다. 성인이 드리는 기도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그만큼 우리는 성인의 덕을 입는 것입니다. 혼자 끙끙대는 기도가 아니라 성인과 함께 기도함으로써 도움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주어진 하나의 기쁨입니다. 이 모습은 가톨릭 정신안에 숨쉬는 연대의 정신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성인들뿐 아니라 죽은 이들,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이는 연옥에서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위해 우리가 기도 드린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받아들이시어 그 영혼을 하느님의 나라로 구원하실 것이고 이렇게 구원을 입은 연옥영혼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를 도와준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신자들은 잘 짜여진 그물처럼 연대하고 있는 하나의 신비체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인의 통공'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 뿐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때로는 이웃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하죠. 이러한 행위는 이웃이 드리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하느님께 전달되어 자신을 돕는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현세의 삶을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기도가 그런 효력을 내는 것이라면 성인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드릴 때 얼마나 큰 효력이 있겠습니까? 이웃의 기도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성인의 기도도 마땅히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신앙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통한 하느님과의 일치가 있어야 합니다. 이 가운데에 어느 누구도 끼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질투가 많은 분이시니까요. 하지만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인한 은총을 구하기에는 우리는 너무 무력한 존재입니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성인과의 통공'이라는 신비를 주심으로써 구원에로의 여정에 서 있는 우리에게 동반자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탁월한 분들을 뽑아서 말입니다. 현세에서 고생한 성인들이라해서 하느님 나라에서 아무 일도 없이 무위도식하며 행복하게 사는 분들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분들도 천상에서 하시는 일이 있을 것이며, 그 하나가 우리를 도와주는 일일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아무리 좋은 교리와 제도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악이 될 소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통공의 교리에 대해 소수의 분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을 종종 봅니다. 그분들의 말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중세 때에는 지나친 성인공경으로 인해 하느님께 대한 신심이 약화되면서 민간신앙으로 변질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분들은 아마도 이런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의제기는 단순한 비난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형제적인 충고로 들어주어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우리를 비하시키는 의도일지라도 그런 충고가 있음으로써 우리가 이렇게 통공이라는 교리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리가 주어졌고, 저나 이 글을 보는 분들도 공부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이웃형제인 개신교 신자분들은 우리가 안이함에 빠지지 않도록, 그릇된 길로 가지 않도록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개신교 분들을 비하시키려고 모난 점을 들추어서는 안되겠죠. 하느님께 사랑받기 위한 형제적 경쟁심으로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드려야 합니다. 이런 모습 역시, 연대의 모습입니다. 하나의 신비죠. 갈라진 아픔 속에 숨겨져 있는 연대. 언젠가 함께 할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worker-
마지막으로 성녀 소화데레사의 말씀을 적겠습니다. 이 글은 성녀께서 투병생활 중에 쓰신 글입니다.
"저는 천국에서 활동을 하지 않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와 영혼들을 위해서 여전히 일하는 것이 제 갈망입니다. 저는 그것을 하느님께 청하고 하느님은 제 소원을 들어주시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죽은 뒤에 하고 싶은 모든 선행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은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시키고, 사제들과 선교사들 그리고 온 교회를 돕는 일 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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