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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개신교에서 부정하는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대하여 카테고리 | 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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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쪽지 캡슐 작성일1999-01-31 조회수2,620 추천수4 신고

 

 

 -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 -

 

 

 성서와 성전과 이성에 바탕을 둔 신심

 

 

 "왜 가톨릭 신자는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가?" 이는 비신자 동포들이 자

주 묻는 말이다. 죽은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관습은 연옥(煉獄)의 교리에

바탕을 둔 것인데, 이 교리는 16세기 종교 혁명가들이 배척하였으므로 오늘

날의 개신교 신자들은 사실상 모르는 바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가톨릭이 죽은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 관습, 또는 이른바 ’불쌍한

영혼을 위한 신심’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성교회에서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하여, 이미 죽은 모든 영혼들을 위해서 사제들이

미사를 세 번 계속해서 드리기를 허락하고, 또 11월 한 달을 불쌍한 영혼들을

위한 위령 성월로 정하여 신자들이 이 신심에 열성을 드러내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 이 신심 행위가 성서와 이성에 바탕을 둔 것인지를 비신자 여러분과 더불

어 연구해보기로 한다.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

 

 성서는 우선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서로 기도하고 성인들과 천사들의 전달

을 구하기를 권장할뿐더러 이미 죽은 우리 형제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도하

기를 장려한다. 마카베오 하권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유다가 고르기아스

를 쳐부순 후, 부하를 거느리고 전쟁에서 죽은 유다인을 묻으려 왔다. 그는

은전(銀錢) 2천 드라크마를 모아 죽은 이의 죄를 위한 제사에 써 달라고 예

루살렘에 보냈다. 이는 그가 그들의 죄악이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 아니고, 하

느님을 섬기면서 영면(永眠)한 이는 크나큰 성총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

다."고 성서의 저자는 여기에 포함된 교리를 명백히 밝혔다.(2마카 12, 45).

 

 우리를 떠난 개신교 형제들은 마카베오서를 영감을 받은 성서로 여기지 않지만

-아래 필자의 글 중에서 ’가톨릭에 관한 개신교측의 억지 비방에 대하여’ 에서

이미 밝혔듯이 루터가 개신교를 성립시키면서 성서에서 야고보서와 마카베오서를

밀짚보다 무가치한 글이라 하여 빼내어 버렸음을 기억하라- 어쨋든 이 책이 그리

스도 강생(降生) 전에 세기를 이어 유다인이 믿어 온 바를 입증하는 충실한 역사

적 기록인 것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실상은 이 책도 이사야서나 요한 복음

서나 그 밖의 성서와 마찬가지로 성서에 포함된 모든 책이 영감을 받은 것임을 선

언하는 가톨릭 교회의 틀릴 수 없는 교도권에 바탕을 둔 것이다.

 

 

 구세주께서는 ’내세’에 죄를 사하심(마태 12, 32)을 말씀하셨는데, 이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그레고리오에 따르면 연옥에 관한 말씀이다. 성 바오로는

고린토인들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이제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

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줄 것입니다. 만일 그 기초

위에 세운 집이 그 불을 견디어 내면 그 집을 지은 사람은 상을 받고 만일

그 집이 불에 타 버리면 그는 낭패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불 속

에서 살아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1고린 3, 13-15). 이 말씀으로

성 바오로는, 그러한 영혼은 한동안 연옥의 정화(淨化)하는 불을 견디어 내야

하지만 결국에는 구원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이는 초대 교부들의 일치된 해석이며 세기를 이어 내려온 성전(聖傳)이기도

하다. 이는 순교자의 무덤으로부터 초대 교회 신자들의 시체가 누워 있는 카

타콤바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필자는 로마 성 밖의 평야(平野) 아래

있는 성 칼리스토의 카타콤바를 지나갔을 때, 죽어 가던 그리스도인들의 마

지막 말마디가 아직도 되풀이되고 있는 수많은 비문(碑文)을 본 적이 있다.

 

"그대보다 먼저 간 우리를 그대의 기도 속에 기억해 주오." 뒤에 남은 이들

의 대답은 "그대,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빛을 누리소서." 였다. 반스 몬

시뇰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인의 무덤에는 이러한 비문

(碑文)이 많이 있다." (A.S. Barnes, The Early Church in the Light of the

Monuments, p.149-157).

 

 

 사도 시대로부터 시작된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의 관습은 동방과 서방의 교부

들이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테르툴리아노(A.D. 160-240)는 기일(忌日)미사

에 대해서 두 번이나 말했다."우리는 매년 하루를 기려 죽은 이를 위하여 제

물을 봉헌하기를 마치 그들의 생일처럼 한다." (De Cor. Mil., 3). 또 "신자

인 과부가 남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가 중간 안식소에 들어 첫 부활

에 참례하기를 애원하며 그가 죽은 기일(忌日)에 기도를 바친다."

(De Monag.10).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오는 테오도시우스 황제를 추도하는 조사(弔辭)

에서 이렇게 설교했다. "주여, 당신의 성인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완전한 안식

을 당신 종인 테오도시우스에게도 주시옵소서. 저는 그를 사랑하였기에, 그를

따라 생명의 나라로 가겠나이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의 기도로써 그를 인도

하여 그의 공로가 부르는 곳, 거룩한 산에 인도하기까지 그를 떠나지 않겠나

이다." (De Obitu. Theod.).

 

 이 논제에 관한 교부들의 글 중에서도 가장 감동 깊은 것은 성 아우구스티

노의 붓에서 나온 것이다. 5세기 초엽에 살던 이 주교 학자는 자기의 어머니

-모니카- 가 죽을 때 자기에게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 몸은 아

무데나 묻어도 좋으니 이 때문에 번거로이 걱정하지 말라. 다만 한 가지 네

게 유언하노니, 네가 어디 있든지 제대에서 나를 기억해다오."(고백록 제9권).

 

 

 그 아들은 어머니의 유언을 명심하여 열렬한 기도를 바쳤다. "그러므로 제

마음의 주님이시여, 저 이제 제 모친의 죄를 위하여 당신께 간청하나이다.

나무에 매달리신 당신 상처의 약으로 인하여 제 기도를 들으소서. 제 모친이

그 남편과 함께 평안함에 쉬게 하소서. 그리고 주여, 제가 목소리와  마음과

펜으로써 봉사한 당신 종인 제 형제들에게 영감(靈感)을 주사,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이 당신 제대에서 당신 종인 모니카를 기억하게 하소서." (고백록).

 

이 사실로 보아도 초대 교회에서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관습이 널리 실

천되고 있었을 뿐더러, 연옥이라 불리는 상태도 믿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

다.

 

 

 죽은 친척이나 벗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와 제사를 바치는 관습은 옛 유다인

사이에 깊이 뿌리박힌 것으로, 그 동안 그들이 여러 번 흩어져 방황하였음에

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계속되어 오고 있다. 필자는 몇 해 전에 예루살렘의

유명한 ’통곡의 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우리 나라 -미국- 에서 히브리인들이 쓰는 공식 기도서

에는 장례식을 위해 아래와 같은 공식 기도문이 있다.

 

 

 "이미 죽은 형제여, 그대는 천국의 문이 열려, 평화의 나라, 안전한 집을 보

며 즐거이 그대를 마중 나오는 천사를 만나십시오. 지존하신 사제께서 그대를

받아들여 그대는 목적지에 닿아 평화 속에 쉬며 또 다시 소생할 것입니다. 이

로써 천국의 안식처에 죽은 우리 형제의 영혼이 쉬게 될 것입니다. 그는 하늘

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우리를 떠났으니, 원컨대 주님의 성령은

그를 낙원에 인도하소서. 원컨대 임금 중에 가장 높으신 임금께서는 무한하신

자비를 말미암아 그분 날개의 그늘 아래 그를 감춰 주소서. 그리하여 끝날에

저를 일으키사 그분의 기쁨의 흐름을 마시게 하소서."

(Jewish Prayer Book).

 

 

 콘웨이(B. L. Conway, C.S.P)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종교 혁명가들이 연옥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에 관한 성서와 증거를 몽땅 집

어치웠음은 실로 이상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실려 있는 교리는  

서로 뗄 수 없게 얽혀 있기에 중심이 되는 어떤 교리를 부정하면, 논리적으로

다른 여러 교리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루터는 믿음으로써만 의화(義化)된다는 그릇된 학설을 고집하여 대죄와 소죄

와의 구별, 잠벌의 사실, 선행(善行)의 필요성, 은사(恩赦)의 효력, 죽은 이를

위한 기도의  유용성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그냥 감춰

지기만 한다면(루터는 죄인은 죄를 용서받아 의화(義化)되지 않고 오직 그리스

도의 공로를 외투처럼 겉으로 뒤집어씀으로서 내적으로는 죄로 인해 썩은 그대

로인 채 하느님께 의인(義人)으로 인정된다고 했다.)  

 

 또 복음에 실려 있는 ’새 사람’이 여전히 죄인인 자에게 당신의 정의를 씌우

는 그리스도를 뜻한다면, 죽은 이의 죄를 용서받도록 그를 위해서 기도함은 쓸

데없는 짓일 것이다. 루터의 연옥 부정은 이로써 경건한 그리스도인을 많이 잃

게 하는 잔인한 교설(敎說)이며, 또 이는 현대에 발생한 새로운 개신교의 주장

인 영벌(永罰)을 부정하거나 또는 영혼이 죽을 때에 하느님이 ’갑자기 마술을

써서’ 그 영혼을 깨끗이 해 준다는 터무니없는 괴설(怪說)에 대해서도 그 책임

이 있다." (The Question Box).

 

 

 연옥이라는 낱말은 성서에 없지만 이 낱말이 표상하는 실재(Substantia, 實

在)는 신약에도 구약에도 동방, 서방 교부들의 저서에도 모두 언급되어 있다.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면 유효하다는 것은 초대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믿었

으므로 연옥에 대한 신앙도 보편적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즉 연옥이 없

다면 죽은 이를 위한 기도란 뜻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연옥 - 이성의 요구

 

 성서(聖書)나 성전(聖傳)의 증거를 떠나서 이성만으로 따져 봐도, 천국과 지

옥과의 중간 상태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조금이라도 더러운 것은  천

국에 들어갈 수 없기에’ 소죄를 지닌  채, 또는 잠벌을 아직 다 채우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난 영혼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런데 그가 영원한 지옥

에 떨어진다면 이는 정의에 어긋날 것이다. 영원한 벌은 그가 저지른 잘못과

는 비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죄만 지닌 채 죽는 이가 무수할 것

이다. 그들은 즉시 천당에 들어갈 자격은 없지만, 그렇다고 지옥에 떨어질 수

도 없다. 그러므로 그가 범한 죄에 맞는 벌을 받는 상태가 없을 수 없다.  이

는 이성의 명령이다. 이성이 요구하는 이 상태가 바로 연옥이요, 여기서 죽은

이는 그의 소죄가 씻겨지고 말할 수 없는 행복 속에서 창조주의 엄위하신 현

존에 들어가기 맞갖은 자가 된다.

 

 

 죽은 벗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함은 성서(聖書)에 맞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본성에서 본능적으로 우러나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성인의  통공의 교리는

우리가 필요한 때 서로 도울 수 있음을 가르침으로써 인류의 사회적, 정신적

연대(連帶性)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또 죽음의 공포를 없애주는 데 큰 효

력이 있다. 16세기 종교 혁명가들은 이 교리를 부정함으로써 성서(聖書)와 16

세기 동안 이어 온 교회 전통에 폭행을 가했을뿐더러 우리 본성과 우리 마음

의 갈망에 손상을 입혔다. 실로 그들은 하늘과 땅 - 육체 속에 있는 영혼과

육체라는 그릇을 벗어난 영혼 - 을 잇는 부드럽고도 거룩한 끈을 끊어버렸다.

 

 

 내가 이 세상에 사는 형제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면, 그가 유명(幽明)을

달리하여 영원한 세상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기도를 계속하지 못한다는 이유

가 어디 있는가? 죽음이라는 것은 단지 몸만 없어지고 영혼은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는 아직도 살고 있어, 생각하고 기억하며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 기도 중에 그를 계속 기억하고 부질없이 눈물만

흘리지 말고 그를 위하여  자비하신 하느님께 간청함으로써  - 이것이 더욱

유효한 방법이니까 - 그에게 대한 사랑을 증명하지  말아야 된다는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무덤을 파헤쳐 놓고 사랑하는 몸을 그곳에 묻는 것을 보

면서 눈물 어린 눈을 하늘로 쳐들고 "하느님, 제가 사랑하는 이의 영혼에 평

안함을 주소서." 하고 부르짖지 않을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겠는가?

 

 

 개신교 신자들은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유효함에 대해서는 벙어리이지만,

자기 마음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여 모든 인류가 알아듣는 사랑과 동정이라는

말로 이에 대답하고 있다. 죽어 간 벗의 말 없는 입술에서 그는 역경 중에

허덕이던 욥이 애원한 바로 그 간청을 또 다시 듣는다.

 

 "벗들이여, 불쌍하고 가련하지 아니한가? 하느님의 손이 나를 치셨는데 어찌

하여 자네들마저 하느님처럼 나를 구박하는가?"

 

이러한 애원이 안 들릴 수 없음은 사람의 마음이 편견 때문에 사랑과 동정심을

잃은 적이 없다는 증거다. 영원한 세계로 가 버린 영혼들, 그리고 우리가 기도

중에 기억해 주기를 연옥으로부터 간청하는 영혼들에 대해서 우리는 확실히 이

렇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곳,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도다. 하

지만 하느님께 감사하라! 그들은 결코 우리의 사랑과 기도가 닿지 않는 곳에는

가 있지 않도다."  

 

 명저(名著) ’The Faith of Our Fathers(교부들의 신앙)’의 저자 기본스 추기

경은 50년 이상 전교한 체험에서 아래와 같은 실화를 말한 적이 있다.

 

 "병들어 누워 있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온갖 정성을 기울여 간호

 하던 신심 깊은 개신교 신자인 딸이 있었다. 그녀는 날이면 날마다 걱정으로

 보내고 밤이면 눈도 붙이지 못한 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바삭 마른

 입술을 축여 주고 열이 오른이마를 식혀 주며, 베개 밑에 떨어진 머리를 올려

 주면서 환자가 좋아지면 그녀의 얼굴도 좋아졌고 환자가 나빠지면 그녀도 덩달

 아 어두워졌다. 이는 모두 그녀의 효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

 아버지는 죽고, 그녀는 시신의 뒤를 따라 묘지까지 갔다. 그녀는 가톨릭 신자

 가 아니었는데, 관 옆에 서 있었을 때 여태까지 그녀의 목을 잔인하게 조르

 고 있던 종교적 편견의 사슬이  끊기고야 말았다. 그녀는 믿고 있던 교파를

 쳐 이기고 울부짖었다.

 

 ’주님,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야말로 자연의 소리요 참된 종교의

목소리였다."

 

 (교부들의 신앙 中에서).

 

 

 테니슨도 그리스도교 전통과 인간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연적 그리움을 표현

하여, 죽어 가는 영웅 아더 왕으로 하여금 그의 벗 베디베르에게 이렇게 말

하게 한다.

 

 

 

 

 나는 내 인생을 다 살았노라.

 

 원컨대, 주께서는 그 안에 내가 한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소서.

 

 그러나 그대,

 

 그대가 내 얼굴을 다시는 못 볼지라도, 내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오.

 

 기도로써는 이 세상의 꿈도 꾸지 못할 일이 이루어지노니,

 

 나를 위해, 그대 목소리

 

 밤낮으로 샘솟아 주오.

 

 (Morte d’Arthur, in The Best of Tennyson, p. 606).

 

 

 

 

 힘찬 교리

 

 개신교에서 진리를 찾아 가톨릭으로 개종한 역사가 스토다드는 종교 진리의

확실한 빛을 찾아 어둠의 안개 속에서 허덕일 때, 때마침 어느 가톨릭 친구

로부터 편지를 받고 연옥에 관한 교회의 아름답고도 이치에 맞는 교리를  암

시받았다. 그에게 있어 가장 빛나고 도움이 된 이 편지는 사실(事實)을 아래

와 같이 놀라울 만큼 명확히 말하고 있다.

 

 

"옛날의 어느 종교 체계를 보더라도 이것(연옥)과  비숫한 것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불멸의 교리는 16세기 종교 혁명가들이 배척하도록 남겨진 듯

하다. 그들이 가톨릭의 거룩한 미사와 그 밖의 성사를 부정했을 때 연옥 교리

도 도매로 넘겨 버렸다. 만일 죽은 이의 영혼이 즉시 영원히 고정된 상태로

들어가 우리 전구(轉求)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면, 우리의 연(煉)미사도 기도

도 이와 비슷한 신심 행위도 모두 헛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우리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는다면, 즉 삼중의 교회 -승리 교회, 정화 교회, 순례

교회- 가 서로 통공함을 믿는다면, 지상에 있는 우리가 이미 죽어 저승에 간

영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그들로부터 영향을 입을 수도 있다.

 

 실상 천국에 즉시 들어갈 만큼 순결한 성총의 상태에서 세상을 버리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죽은 이의 중간 집이라 할 수 있는 연옥이라는 고마운 피

난처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는 더욱 없기를 바라고 싶다. 나는 개신교 신자

들이 어찌해서 이 점에 관해서 오늘과 같이 고집할 수가 있는지 알 수도 없

거니와, 그렇다고 그들이 연옥을 부정함으로써 여러 사람들이 지옥까지도 부

정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놀라지도 않는다. 사실 지옥 교리는 이것만 따

로 떼어놓고 보면 참으로 괴상한 것이기에 말이다.

 

 실상 가톨릭의 모든 교리는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가 서면

모두 서고, 하나가 쓰러지면 모두 쓰러진다. 아치에서 돌 하나를 빼내고서도

아치가 서 있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연옥은 생

각해 낼 수 있는 개념(槪念) 가운데 가장 인정미가 있고 가장 아름다운 것이

다.죽은 망나니 아들 때문에 못 박힌 마음이 이 교리 덕분에 희망으로 위로를

받은 어머니가 얼마나 많을 것인가?"

(Stoddard, Rebuilding a Lost Faith, p.155).

 

 

 스토다드는 개종한 다음, 자기의 종교적 편력(遍歷)을 ’잃었던 신앙의  재건’

이라는 책으로 서술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 마음을 강하게 내리친 연옥 교

리가 이치에 꼭 들어맞는 것이라고 밝혔다.

 

"연옥에 관한 가톨릭의 교리를 보면, 사람이 죽은 후 그 영혼이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동안 단련을 받는 곳이 있다. 즉 아직 용서를 받지

못한 소죄나 허물이 남아 있거나 대죄로 인한 영벌은 그리스도의 구속 공로로

용서를 받았지만, 그 대죄로 말미암은 잠벌(暫罰)이 남아있는 까닭이다. 더욱

교회는 우리가 기도나 미사 성제로써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하여 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교회의 공식 교리도 이 이상은 말하지 않는다. 연옥

(煉獄)에 무슨 물질적인 불(火)이 있는지 없는지는 가톨릭의 신앙개조(信仰個

條)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믿고 있는 것은 연옥에 있는 영혼은 영적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다.

곧 그들은 잠시나마 누리지 못하는 완전한 행복에 대한 그리움을 이 세상에

서는 결코 느끼지 못할 만큼 강하게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천상 성부와 구세주를 거스르는 무수한 죄악이 얼마나 추악한가를

통절히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필자는 여러 개신교 신자들이 공식 신조로는 연옥 교리를 믿지 않지만 그러

면서도 기도 때에는 죽은 가족을 자주 기억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또 어

떤 열심한 개신교 부인 한 사람이  대학 졸업한지 며칠 만에 자동차  사고로

죽은 아들을 위해서 날마다 기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부인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글을 읽은 적도 없고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모양

인데,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그리움과 인간 본성에서  솟아나는 억제할 수

없는 본능으로 성인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 중에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전혀 입지 못할 만큼 악하

지도 않고, 그렇다고 즉시 행복을 받아 누릴 만큼 착하지도 않은 이들이 있다."

 (De Civ. Dei., 21; 24).

 

 

 우리를 떠난 형제들도 연옥 교리를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

아, 이치에도 맞고 권위도 있다고 깨닫는 이가 날로 증가하고 있다. 개신교 작

가이자 평론가인 말록(W. H. Mallock)은 그의 저서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 것

인가?(Is Life Worth Living?)에서 이 사실을 썩 잘 관찰했다.

 

 

 "이것은 상선 벌악(賞善罰惡)의 신앙이 우리의 정의 개념(正義槪念)과 합리

(合理) 개념에 일치할 수 있는 유일한 교리임을 즉시 알 수 있다. 이것은 무슨

피상적인 미신이기는커녕 실로 이성과 윤리가 요구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보아

야 한다. 이를 믿는 것은 단지 지성의 승복일 뿐 아니라, 전(全) 도덕 이념의

한 부분을 조화한 것이기도 하다." (Is Life Worth Living?., p.290).

 

 요컨대 연옥 교리는 이성의 요구를 채우고 우리 본성의 본능적 갈망에 맞으

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최초의 개신교를 성립시킨 장본인인 루

터조차도 그 자신이 ’교황의 뺨을 한 대 갈길’ 심산으로 가톨릭의 교리를 부

인하도록 유혹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가톨릭의 교리를 증명하는 성서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이나 성전(聖傳)의 목소리는 너무도 압도적이라고 고

백했다. 이것 역시 필자의 의견이라고 치부해 버릴 독자도 있을 것이므로, 그

의 편지를 통해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기로 하자.

 

 루터는 1524년에 쓴 슈트라스부르크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

서 말씀의 쉽고도 똑똑하고 무리가 없는 뜻이 지극히 힘차고 명백하기 때문

에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음을 인정했다.

 

 "나는 잡혀 있다. 도망갈 수가 없다. 텍스트는 너무나 힘차다." (De Wette.

II, 577).

 

 

 마지막으로 필자가 가톨릭 신자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현대의

그릇된 경향인 - 이것은 일종의 집단 정신병이라고까지 이야기할 수도 있다

- 종교무차별론자들의 헛소리에 농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든

종교란 진리(眞理)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선(善)하므로 어느 종교를 믿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들의 그러한 주장은 처음에는 제 정신

을 가진 사람에게는 너무나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러한 주장이 계속되는 무신

론자들의 현대에서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에게까지 나쁜 영향을 알게 모르게

끼쳐왔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우리가 언제나 기도하고 또한 흠숭하는 대상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고 입

으로만 외치면서 하느님의 능력을 비웃는 예가 우리 주변에는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하느님의 그러한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심을 앞의 필

자의 글 -’가톨릭과 과학과의 관계 (1), (2)’- 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했

던 과학자들 -수학 ,물리, 화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자들- 의 입을 빌려

이미 이야기한 바 있다. 특히 천재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던 파스칼과 뉴튼

하느님을 그러한 이유에서 과학과 수학의 신(神)이라고 이야기했었다.

 

 수학과 과학의 오묘하고도 정교한 그 법칙을 만들어내신 그분이 자신에 대

한 종교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함부로 모두 진리라는 어처구니 없는 괴상한

것으로 만들어내셨는지 그것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다음의 이야기

를 통해 독자들은 나름대로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렇다면 이제 필자가

독자에게 한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교사가 초등학교 학생 10명을 모아놓고 1 더하기 1은 얼마냐고 물었다 해보

자. 그렇게 질문했더니 그 중 3명만 답이 2라고  대답하고 나머지는 틀린 답

을 이야기했다고 치자. 이때  교사가 모든 학생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3명만

맞고 다 틀렸다’ 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모두 다 맞았다.’라고 말했다 하자.

그러면 이 교사의 애정과 너그러움을 부인할 사람은 없겠지만 과연 이 교사가

제 정신인지를 의심치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10명의 대답이 옳다고 말

하는 바람에 지성(知性)의 자살(自殺)을 면치 못하는 것이다.

 

이제 독자들은 위의 예(例)를  어떻게 종교에 적용될 수 있는가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나 그것은 독자가 무의식 중에 종교무차별론에 젖어있음

을 드러낼 뿐 종교 문제라고 해서 위에 이야기한 비유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은 논리의 근본적 원리임은 논리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

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으로 여기서 구구절절히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일 것이기에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정하신 가톨릭의 변함없는 교리와 비교하여 다른

개신교 교파들은 그 교리가 완전히 일치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이

제 여러분은 앞의 예를 머리 속에 상기하면서 누가 진리인가 하는 문제를 심

사숙고해보기 바란다. 아니, 심사숙고하고 할 것도 사실은  없다. 이 문제의

답은 이미 나와 있다는 것을 현명한 여러분은 이미 알아들었을 것이기에 그렇

다.

 

 노파심에서 다시 한번 말하면, 여기서 주의할 것은 앞의 이야기에서처럼 1

더하기 1이 2라고 대답한 학생의 답이 정답 즉, 진리(眞理)라는 것을 나타낼

뿐 그 학생의 인격(人格)과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마찬가지로 틀리게 대답한,

즉 오류(誤謬)를 진리(眞理)라고 생각한 학생들이 인격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앞의 예에서 답을 2라고 말한 3명만이 맞는 답을 했

다고 말한 교사를 책망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처럼 다른 종교의 교리가 가

톨릭과 다르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다름이 틀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서 그것이 질책받아야 한다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라는 것을 이제는 독자들도

알게 되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 수많은 그리스도교 교파 중에서 오직 가톨릭의 교리만이 진리

(眞理)임은 틀림없지만 그 신자 개개인 거기에 덧붙여 사제, 주교, 추기경 심

지어 교황조차도 인간적인 면에서까지 모두 선하고 결함이 없는 선택받은 자라

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것을 가톨릭 교회가 보존하고 있는 순수한 진리인 교리와 혼동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어느 신자 개개인의 인간적 잘못이나 사제 또는 주교나 교황의 인간

적인 잘못이나 결함, 비리 등을 가지고 가톨릭의 영원불변의 진리와 하느님의 뜻

하신 바를 억측하게 되고 오해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 가톨릭의 교리와 다른 개신교 교파간의 교리가 다르다고 가톨릭 신자 여러

분이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진리만을 말씀하셨고 진리만을 가

르치라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교회안에서 우리의 평화로운 심정을 저명한 개신교 역사가였으나 오직

진리를 찾아 가톨릭으로 개종했던 스토다드(John L. Stoddard)의 짤막한 이야기

로 필자의 글을 마치겠다.

 

 

 

 

 

 "가톨릭 교회는 내게 혼란 대신 질서를, 의심 대신 확신을, 어둠 대신

 

빛을, 그림자 대신 실체(實體)를 주었다."

 

 

 

 

 

 

 

 

 

 

 

 

위의 글은 ’The Faith of Our Fathers (교부들의 신앙)’과 ’The Faith of Millions

(억만인의 신앙)’에서 일부 발췌 인용했음을 말해둡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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