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가톨리시즘은 참되다 ; 지성인은 로마로 - 왜?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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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2-09 | 조회수547 | 추천수1 | 신고 |
지성인은 로마로 - 왜? (3)
체스터턴의 경우
아놀드 런의 개종에 즈음하여 회상되는 것은 그의 동포로서 그보다 유명한 체 스터턴의 개종으로, 이 둘은 공통되는 점이 많다. 둘 다 논리적 추리와 객관적 증거로써 발을 옮겼다. 감정은 혹시 있었다 해도 둘 다 그다지 맥을 못추었다. 둘 다 역사와 유럽 문화에 조예가 깊은 천재적 문학가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한때 교회에 대한 비판을 하였고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중간살이를 거쳤고 성 공회라는 중간 정거장을 거쳐서 종교 진리를 찾아 결국 로마에서 끝맺었다.
이제 체스터턴으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게 충동한 그 신조와 추리를 살펴봄으로 써, 지금도 영국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최고 지성들을 계속적으로 끌어들여 교 회의 넓고 강대한 원천성 아래 거느려 쉬게 하는 가톨릭의 신비로운 매력을 좀 더 깊이 통찰하기로 한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오늘날, 어부 베드로의 무덤 위 에세워진 미켈란젤로의 둥근 지붕이 유일하고 견고한 일치의 상징으로 우뚝 솟 아 있다. 이는 혼란과 분열과 수라장의 세계에서 오직 국가와 문화의 차별을 초 월하여 전 세계에 10억이 넘는 강대한 군대를 하나의 공통 신앙이라는 강인 불 멸(强忍不滅)한 끈으로 일치단결하게 하고 있는 유일의 상징이다.
1922년 천재적 역설(逆說)의 작가 체스터턴이 로마에의 굴복을 선언했을 때, 영국은 원자 폭탄에나 맞은 듯 야단 법석이었다. 영국 교회의 뛰어난 성직자 해덜리(Canon Headderly)는 그다지도 빼어난 천재 작가를 놓친 영국 교회의 ’전반적 밥통’에 대해서 얼마나 비평과 야유가 심했던지를 잘 말해준다.
"우리는 지금껏 체스터턴과 같은 호교가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교회의 모 임에 거의 자취를 나타내지 않았었다. 우리는 이 세기의 최대의 지성에 빛나는 역설(逆說)보다 옥스퍼드의 (말하자면) 무미 건조한 교수의 진력나는 논리를 더 즐긴다. 이 나라의 종교는 아직도 청교도(淸敎徒-도덕 과격파)와 흥을 꺾는 무리들의 무게로 짓눌려 있다. 체스터턴은 우리를 들어 올리려 하겠지만 만만히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과학과 기적에 관한 빅토리아 시대 중엽의 논쟁 때문에 놀라 떨고 있다. 체스터턴은 우리를 구해내고 아울러 정통파에 보존 하여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로워지지 않는 편이 오히려 낫다. 청교도의 허위를 예모(禮 貌) 있고 훌륭하게 들부술 수 있는 사람이면, 이는 영국의 참종교를 위해서 그 가 자각하고 있는 이상의 좋은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청교도들은 주일을 지 킨다고 하면서 실은 이를 파괴했다. 그들은 종교를 의심받게 했다. 그들은 즐겁 고 행복한 천사의 사업을 한답시고 실은 기쁨과 아름다움과 사랑을 없애 버리고 있다. 이 슬픈 사실은 주로 유머가 전혀 없는 탓이다. 곧 어느 모로 보면 체스 터턴 같은 유머리스트라야 기쁨을 되찾아 올 수 있다는 이유가 이것이다."
가장 큰 성실
런던의 ’태블릿’ 지(誌)는 당시 가톨릭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다. "실로 가톨 릭으로서는 그가 양우리에 들어왔다는 사실은(이로써 그가 지금까지 외인으로서 친절하고도 날카로운 비판을 해준 기쁨과 자랑을 다소간 잃게 되기는 했지만) 그의 시와 산문(散文)의 실재성과 현실성에 대한 의구심을 즉시 또 영원히 일소 했다. 언행이 일치되었다. 이것이 중세기에 대한 미학적(美學的) 사랑 이상의 것을 뜻한다는 것, 아름다움과 더불어 의무까지도 부과되었다는 것, 단지 문학적 성실 이상의 인생 최대의 성실을 성취했다는 것을 모든 이가 이제야 확실히 알 리라."
체스터턴이 영국 교회를 떠난 것은 화가 치밀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감정이 상 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가 가톨릭 교회에 들어온 것은 이것이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로써 신적 기원과 권위를 가진 그르칠 수 없는 신앙을 전 인류에게 가 르치는 까닭이다. 역사적 그리스도교인 성교회는 체스터턴이 즉시 인식하고 감 탄한 역설(逆說)적 성질을 갖고 있다.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모험적이다. 교회는 2천년의 원숙한 슬기와 아울러 젊은이의 불타는 정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요즈음 신 기하다고 법석대는 것도 알고 보면 벌써 15세기 전에 성교회로부터 갈라져 나간 열교(裂敎)들이다. 가톨릭 교회는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장터에 밀려드는 새 로운 학설을 무턱대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내일 모레 과부가 되고 싶지 않기 때 문이다.
버금의 충성
오늘날 국가주의가 여러 나라의 안장 위에 걸터 앉아 세계를 개조(改造)한답시 고 제딴에는 무섭게 눈을 부라리고 호령하는 꼴이 가관이다. 교회는 입가에 미 소를 머금고 구경하고 있다. 이미 국가주의라는 꼭두각시 또는 그런 따위의 것 들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숱하게 보아온 까닭이다. 국가주의라는 신식 종교의 가장 고상한 순교자인 카벨(Edith Cavell)이 조국에 봉사하겠다는 열성에 불타 독일군의 맹화(猛火)에 대항해서 일어섰을 때, 교회는 "애국심만으로는 모 자란다"고 소리쳤다. 이 외침은 마치 인공 위성을 발사하는 폭음이나 되듯 영국 민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교회로 말하면 이는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라"는 계명 으로 이미 옛스러운 것이다.
애국의 충성은 보편적 도덕률 곧 온갖 율법과 예언을 내포하는 사랑의 이중 계 명에 비기면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한다. 국가는 정 치뿐 아니라 종교 사정에 관해서까지 좌지우지할 전체적 권위가 있다고 핏대를 올리고 소리지르는 국가주의에 대해서는 교회는 구약 욥기의 간결한 말로써 코 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다."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어디에 있었느냐?" 교회의 옛스러움과 유럽 신흥 국가들의 새로움을 비교할 때 교회는 그들에게 이 렇게 물어봐도 무방하리라. "교회의 바탕이 생겨났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체스터턴은 말한다. "교회야말로 사람이 그처럼 쪼개진 각각의 국가를 세울 마 음도 먹지 않았을 때부터 이미 사람들의 충성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 신앙은 우 리 조상들의 신앙일 뿐더러 조국의 이름이 정해지기 전 조상들의 신앙이다. 이를 잊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가톨리시즘은 참되다
체스터턴과 같은 지성인이면 교회가 지닌 수많은 매력을 깨닫는다. 또 각 교파 의 신조를 위협하는 얼토당토않는 사소한 일과 낡아빠진 신기한 사상 등을 조용 히 관찰하고 있는 교회의 노숙한 슬기도 이해한다. 그런 만큼 그런 이가 가장 매력 있는 신조가 무엇인지를 지적해 내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여러 사실 중 에서 그의 마음을 가장 힘차게 압도하고 교회의 모든 신조의 공통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은 가톨리시즘은 참되다는 간단한 사실이다.
체스터턴은 이렇게 설명한다.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된 이유를 설명하기가 왜 힘 든가 하면, 개종한 이유가 만 가지나 되고, 또 결국은 이것들이 단 하나의 이유 곧 가톨리시즘은 참되다는 이유에 귀착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은 …하는 유 일의 조직체다’라는 말로 끝맺는 몇 개의 글로써 여백을 메울 수 있다. 예컨대 (1) 가톨릭은 실제로 죄를 숨기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조직체다. (2) 여기서는 장상(長上)이 교만하다는 뜻으로 장상이 될 수 없는 유일한 조직체다. (3) 가톨 릭 교회는 인간을시대의 아들이 되는 타락한 노예에서 해방하는 유일한 조직체다. (4) 이것은 이러쿵 저러쿵 참견하지 않도록 참된 메신저답게 진리를 전하는 유일 한 조직체다. (5) 이는사실 온갖 종류의 존경받을 사람까지 포섭하는 유일한 조 직체다. (6) 이는 법률로써가 아니라 의지로써 세상을 안으로부터 변혁하는 유일 의 조직체다 등등."
증언대에 오른 성서
체스터턴은 성서를 증언대에 올려놓고 온갖 시비를 결정 지으려는 개신교의 약 점을 이미 일찍부터 알고 있는 터였다. 곧 성서는 오로지 살아있는 목소리로만, 해석자의 입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음을 깨달은 까닭이다. 이러한 해석자들이 성서 의 말씀이라며 번지르르하게 서로 모순이 되는 말을 지껄이는 것이 곧 교파 싸움 이다. 그런데 이 난관을 해결한답시고 성서만을 하느님의 유일한 말씀으로 받들고 어떠한 해석자도 소용없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귀다툼은 한층 더 치열해진다.
체스터턴은 이렇게 썼다.
"가톨릭은 성서를 안 믿는다고 입방아를 찧는 개신교 자신들이 성서를 안 믿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흥분했다. 나는 그 따위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들 중에는 이 를 진보의 과정이라고까지 말하는 자도 있다. 이대로 가면, 아버지가 귀한 책을 챙겼다고 자식이 아버지를 발길질하고서는 그 책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는 것이 진보의 과정이 될 것이다. 미련한 점으로 말하면 진보라는 말은 개신교의 악화(惡化)를 뜻함이 뻔하다. 그러나 내 친구였던 자유 사상가들은 거의 다 로마의 권위보다 개신교의 성서 숭배가 더 신랄한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어지간히 자유롭게 생각한 모양 이다. 어쨋든 내 가족과 친구들은 다니엘서보다 다윈의 진화론을 펼쳐 보기를 더 즐겼다. 그리고 그들은 거의 다 히브리어 성서를 마치 고대의 이교의 우상처럼 여겼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상 조각을 신이라 하여 흠숭하다가는 허수아비라고 부숴버리 고, 그러다가는 이를 맞갖게 흠숭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을 나무라고 있으니 참 어리둥절할 노릇이다."
체스터턴은 가톨릭 교회의 진리는 인력(引力)과 반발력을 가진 자석과 같다고 지적한다. 사람이 낚싯밥에 걸려드는 것이 아닌가 하고 부질없이 떨고 있을 때 에는 반발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그 낚싯밥은 진리일뿐이다.
"가톨릭 교회를 거슬러 버티기를 중지하면 곧 그 순간부터 그리로 끌려감을 느 낀다. 시끄럽다고 소리치기를 중지하면 그 순간부터 이를 즐겨 귀담아 듣게 된 다. 마음을 공평하게 먹어야겠다고 하면 그 순간부터 이를 즐기게 된다. 그리고 이 애착이 어느 정도를 지나면 마치 연애를 하는 것처럼 가슴이 벅차고 두근거 리면서도 한없는 기쁨을 맛보게 된다."
통계에서 보여주고 있는 ’터놓은 지성에 작용하는 진리의 인력’은 미국 가톨릭 의 줄기찬 증가를 보여 준다. 1926년에는 개종자가 3만 5천 7백 51명이었고, 1934년에는 6만 3천 8백 45명이요, 1948년에는 11만 7천 1백 30명이다. 22년 동 안에 1백 46만 2천 1백 52명이라는 놀라운 개종자가 생겼다.
그러한 가톨릭으로의 개종자 수의 격증은 현재도 예외가 아니어서 미국 내에서 가장 빠르고 또한 그 성장 속도가 현저한 미국 내 최대의 종교 단체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미국의 가장 빛나는 지성인들 중에서 다수가 스스로 가톨릭으로 들어섰다. 이 를 더듬어 보면, 조예 깊은 철학자 브라운슨(Orestes A. Brownson)을 비롯하여 성공회의 가장 고명한 신학자 킨스맨(Frederick J. Kinsman) 주교, 컬럼비아 대 학의 빼어난 역사학 교수 헤이즈(Carlton J. Hayes) 등이 있다. 이런 빛나는 지 성들의 은하수가 다른 개종자들과 함께 가톨릭에 들어오는 이유는 체스터턴이 지적한 그 하나의 이유, 곧 가톨리시즘은 참되다는 사실에 귀착된다.
펠프스(William Lyon Phelps)는 이렇게 썼다. "일전에, 앞으로 50년이 지나면 과학은 종교를 파멸하고 따라서 종교는 기억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되 리라는 뉴스 한 편을 읽었다. 그런데 한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종자들, 이른 바 현대 사조(思潮)에 관심을 두고 있는 모든 이가 경악의 눈으로 주목할 만큼 양으로나 질로나 지극히 놀랍게 성장하고 있다. 나는 ’지성인이 어떻게 로마 가 톨릭이 될 수 있는가?’를 이상히 여기는 분에게 뉴욕 대학의 역사학 교수 호프만 (Ross J. S. Hoffman)의 ’부흥(Restoration)’을 추천한다. 이 책은 그가 어떻게 해서 무(無)에서 만유(萬有)에로 옮겨 갔는지를 말하여준다."
저명한 개신교 역사가 스토다드(John L. Stoddard)는 자기의 개종을 이렇게 요 약했다.
"가톨릭 교회는 내게 혼란 대신 질서를, 의심 대신 확신을, 어둠 대신 빛을, 그림자 대신 실체(實體)를 주었다." 모든 개종자의 경험을 반영하는 말이다.
온갖 진리가 모인 곳
이제까지 모든 열교(裂敎)와 온갖 망상(妄想)을 무찌른 교회의 모습에는 장엄 한 어떤 것이 있다. 이교(異敎), 성서 숭배, 절대적 제국주의, 군국주의, 민주 주의, 대의 정치, 독재 정치, 시대의 유행(流行) 등 긴 행렬이 교회 앞을 지나 갔다. 교회는 그의 옥좌에서 이들이 오가는 것을 굽어보고 있다. 교회는 어떠한 형식의 정치 체제 아래에서도 살 수 있다. 교회의 관심은 인간의 영혼에 있고, 교회의 왕국은 영혼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체스터턴은 말한다.
"사상의 상치(相馳)와 진리의 파괴(破壞)는 끝이 없다. 이는 사람들이 진리의 알맹이를 보존하고 온갖 진리를 옹호하면서, 모든 오류는 뿌리째 뽑아버려야 될 의무를 거절한 때부터 비롯한 불행이다. 그 후부터는 몇몇이 패를 지어 시간을 허 비해 가면서 진리를 하나씩 주워 모아 이를 주물럭거리다가 결국 오류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해 온 것은 움직임 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모노마니아 (Monomania), 곧 한 가지 일에만 골몰하는 편광자(偏狂者)였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하나의 움직임이 아니다. 집합소이다. 이 세상의 모든 진리가 모여 있는 곳이다."
체스터턴은 이렇게 관찰했다.
"가톨릭 교회는 문이 백 개나 있는 집이어서 동시에 두 사람이 똑같은 방향에서 들어오는 일이 없다." 이 천재가 걸은 길은 객관적 증거와 논리적 추리의 길이었 다. 교회의 신비로운 매력은 단순히 "교회는 진리"라는 사실에 있다. 이것이 그 가 오랫동안 탐구한 대상이었다.
그는 마치 탕자가 아버지를 오랫동안 떠나 있으면서도 꿈에도 잊지 못한 아버지 께 돌아와 품에 안기듯 그렇게 교회를 껴안았다. 그리고 자모(慈母)이신 교회의 부드러운 품 안에서 참다운 안식과 평화를 발견했다. 교회는 이처럼 한결같이 자 석이 철을 끌어당기듯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써 전세계의 뛰어난 지성인들을 품안 에 끌어들이고 있다.
이리하여 지금 이 순간도 로마에의 여행은 끊일 사이가 없다.
위의 글 역시 존 A. 오브라이언 대주교님의 명저(名著) ’The Faith of Millions (억만인의 신앙)’에서 발췌했음을 말해둡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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