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그리스도가 인본주의자에게 보내는 메시지 - 가상칠언 (1) | 카테고리 | 천주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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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성훈 | 작성일1999-02-09 | 조회수873 | 추천수1 | 신고 |
예수 그리스도의 가상칠언(架上七言) - 첫 번째 말씀
- 인본주의자에게 -
이 세상에는 종교를 갖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있고, 또 종교에 대해서 극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 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의 양상은 다음과 같은 일곱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인본주의자들이고 두 번째는 죄인들 세 번째는 이기주의자들 네 번째는 지식인들 다섯 번째는 현대인들 여섯 번째는 감각론자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의 말씀은 사색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일곱가지 말씀을 하셨는데 이것을 가상칠언(架上七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때, 세상 사람들도 그 십자가를 향하여 일곱가지 말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상칠언에 특별 한 뜻이 있듯이 십자가를 향해서 던진 일곱 가지의 말에도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가상칠언의 말씀은 어떤 문제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이 세상의 많은 문제를 가지 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향해서 던진 세상 사람들의 말 역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도전한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인간 중심주의적인 인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자연 인간의 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적인 사조(思潮)입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 없는 종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인간은 선천적으로 착하다고 믿으며 모든 문제는 과학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 이성(理性)의 능력과 자 신의 노력으로 세계의 평화와 개인 양심의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 니다. 그들은 믿음이나 은총, 또는 초자연적 질서에 관한 모든 것은 실현될 수 없으 며, 실제로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하느님의 실재(實在)를 부정하고, 종교 없는 도덕, 십자 가 없는 그리스도를 원합니다. 그들은 희생 없는 그리스도교를 원하며, 영원한 구 원을 주는 하느님의 나라를 부정합니다. 오늘의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사람들을 곳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지나가던 사람들’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종교나 신앙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오래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부분적으로 몇 마디 알고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만으로 전부 안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기 때문 입니다. 이들이 던진 첫 번째 말을 성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독하여 말하기를 "성전을 헐어버리고 사흘 안에 세우겠다던 사람아,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네 자신이나 구하려무나,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하였다. (마태 27, 39-40).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내려오라! 지옥 에 대한 믿음에서 내려오라! 하느님이 정하신 것을 인간은 아무도 풀 수 없다는 그 믿음에서 내려오라!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세상 끝날까지 지옥의 문에서 지 켜준다는 그 믿음에서 내려오라! 그르칠 수 없다는 그 말씀에 대한 믿음에서 내려 오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는 믿겠노라."
이 말들은 한마디로 초월적인 진리를 버리고 과학적인 인간의 능력으로 돌아오라 는 뜻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하늘나라를 버리고 이 세상으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희미한 하느님의 말씀을 버리고 실증적이고 체험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뜻입니다. 믿는 힘보다는 지식의 힘이 더 위대하니 믿음을 버리고 지식의 세계로 내 려오라는 뜻입니다. 이같은 말이 십자가를 향해서 외쳐졌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 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네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하고 문제를 걸었지만 하느님이 누구신 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아버지!"하고 그들에게 하느님을 소개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시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보아라." 라고 합니다. 그들은 십 자가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이 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인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리스도는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하심으로써 인간을 죄악으 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임을 일러주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지혜가 가장 귀중하고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생각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혜로운 응답이었습니다.
인본주의자들은, 종교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보다도 형제애를 더 말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자가 없는 사랑을 원합니다. 우리 주님 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이 그들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어진 질서를 먼저 찾은 다음 용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죄인으로 하여금 계속 죄를 짓도록 하 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를 씻어주는 것입니까?
’십자가 없는 사랑’ , 이것이 인본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근본 사상입니다. 우리가 여 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들 인본주의자들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시켜 하느님의 진실한 사랑을 알아듣게 하 려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은 하느님을 인간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 자신들도 인간 성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초월성을 부정함으로써 자연적인 인간의 모습 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모습 이상의 존재가 되고 싶 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을 형제로 만들려고 무척 애를 써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 을 형제로 만드는 하느님 아버지가 없이는 모든 사람이 형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사실 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기준을 두고 우리 모두가 형제라고 할 수 있겠 습니까? 돼지는 살아가는 데 만족합니다. 그런데 인간 중심주의자들은 결코 인간적인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치 바다의 괴물처럼 인간끼리 서로 잡아 없애려고 합 니다.
그들은 인본주의자가 되기 위하여는 인간적인 것이 요구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 간이 어디서 왔는지 그 근원을 모르고서야 어찌 인간의 참모습을 찾을 수 있겠습니 까? 인간의 근원은 모든 선과 거룩함의 원천이신 절대자로부터 나왔다는 원칙을 잊어버리고서야 어떻게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근원이신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은 뿌리 없는 장미처럼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왕국을 건설하려고 하지만, 그들을 다스릴 왕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왕권을 수여할 사람은 없습니다.
인본주의자들이여, 당신들의 비극은 더러운 것을 깨끗하다고 믿고, 잔인한 것을 친절하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은 십자가가 필요없다고 생각했기에, "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했습니다. 당신들은 모든 사람들이 선하다고 믿고 지옥에도 광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골고타에서 "용서해주십시오." 라고 말했을 때 당신들은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찾았습니다. 십자가 없는 세상, 그 자체가 십자가 라는 사실을 당신들은 알고 있습니까?
당신들은 사랑하는 자녀의 고통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어머니를 본 적이 있습니까? 지극한 사랑이 죄악에 직면했을 때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그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 왜 잘못된 것입니까?
어찌하여 당신들의 죄의 보상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고서 "십자 가에서 내려와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그 분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신다면 당신들은 누구를 믿겠습니까?
인본주의자 여러분! 우리는 전쟁을 왜 합니까? 전쟁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핏속 에 죄악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죄악을 의인들의 피로써 용서 받기 위하여 전쟁을 치르지 않습니까? 인간이 범한 모든 죄악들을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왜 모릅니까? 어찌하여 당신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와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누가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것, 그보다 더 큰 사랑 은 아무도 지니지 못합니다." (요한 15, 13)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분이 십자가에서 내 려오신다면 벗을 위한 참된 사랑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전쟁을 해야만 정의를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 전쟁을 회피하는 것은 거룩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비굴한 항복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의 죄를 씻을 십자가를 회피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십자가는 인간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인간 구원의 필요한 조건이었습니다.
당신의 눈을 만든 그분이 어찌 볼 수 없겠습니까? 당신의 귀를 만든 그분이 어찌 들을 수 없겠습니까? 용감히 싸우다가 죽을 당신의 군인들을 만든 그분이 그릇된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어찌 죽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당신들은 "내려 와보아라. 그러면 믿겠노라."고 합니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당신들이 벗을 위하여 죽을 수 없었듯이 하느님도 그런 일을 할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까? 정말 당신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인본주의자 여러분! 당신들은 사랑이 지쳐서 폭력 앞에서 쓰러지는 모습을 본 적 이 있습니까? 사랑의 가르침인 산상설교를 받아들인다면 어찌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며 외치시 는 사랑의 가르침에는 저주를 합니까? 갈바리오의 가르침과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대한 산상설교의 가르침이 그 죄로 인해 십자 가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동떨어진 사랑은 악에 의하여 파괴되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연결된 사랑은 죽어야 합니다.
하느님도 인간과 같이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어찌 인간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괴테는 "내가 만일 하느님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죄악은 나의 가슴을 부숴놓고야 말았을 것이다." 라 고 말했습니다. 이 사실이 곧 그리스도께 해당됩니다. 세상의 죄악이 그리스도의 가 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당신들도 누군가를 사랑했기 때문에 조소의 대상이 되거나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 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보고 어찌하여 "내려와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외칩니까? 만일 하느님의 사 랑이 십자가 없는 것이었다면 그 사랑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전설에 나오는 그런 보물상자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진짜 보물상자가 곧 십자가입니다.
"태초에 살해당한 어린 양이 있었습니다." (묵시 13, 8) 태초에 형제간의 싸움으로 동생의 울부짖음이 하늘에까지 뻗쳤습니다. 질투심 많은 형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그 피의 외침이 있었던 그날부터 오늘날까지 억울한 피의 외침이 하늘에까지 미쳤습 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이 소리를 들으시고 세상에 오셔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리하여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이 곧 하느님 의 외아들이신 성자의 강생(降生)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것은 땅에 묻을 수도 없고 끌어내릴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창조의 근본이요 우리 인류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들은 "십자가에서 내려와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라는 말을 합니까?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우리에게 주는 것 은 십자가입니다. 당신들은 고통이 없는 십자가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매력 이 있을는지는 몰라도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합니다. 부처님의 상(像)은 당신의 마음을 흔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십자가를 책상 위에 놓고 며칠 묵상해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게 될 것 입니다.
인본주의자 여러분! 파괴와 혼란이 세상을 뒤덮었던 프랑스 혁명 시대를 생각해 봅 시다. 혁명의 열기가 가라앉아 고요하게 되자 교회가 보였습니다. 감실 위에는 예수 님께서 수난을 당하시는 십자가가 걸려 있었습니다. 격분한 군중도 침묵 속에 잠겨 들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습니다.
"모자를 벗읍시다."
모두들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무도 이 분위기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 다. 그런데 한 인본주의자가 십자고상을 내려 이웃집에다 걸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내린 것입니다. 종교는 이제 고통이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내리기를 원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습니다. 그 들이 원하는 것은 십자가이지 고통의 십자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고상은 여러분에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당신은 스핑크스 앞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고상 앞에서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 십자가의 고통 속에는 당신들이 범한 죄의 보속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들이 명령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셨다고 가정해봅시다. 그것은 강요에 의한 것이지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어느 날엔가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려 오시 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들고 오실 것입니다. 그 십자가는 인간에게 구원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구원의 시기가 지났 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결코 오랫동안 인본주의자로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동물이 되든지 천사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동 물에게서 왔다면 당신은 동물적인 요소를 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느 님께로부터 왔다면 당신은 인간성을 벗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야말로 진정한 ’인본주의’ 가 되는 길이며 인간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인본주의자 여러분! 너무 늦기 전에 "십자가에서 내려와보아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는 소리를 중단하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오. 그들 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용서’는 간 단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없이 우리를 용서하신다 면 그런 용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못박힌 손을 펴고 우리에게 용서를 청해 오시는데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치른 죄의 대가입니다. 십자가가 없다면 죄악도 있을 수 없고 하느님의 존재도 우리에게 별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신분이 높을수록 그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도 더욱 귀하게 드러나는 법입니 다. 그렇다면 당신을 위하여 무참하게 고통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왜 외면합니 까?
참고로 위의 글은 미국이 낳은 저명한 설교가 풀턴 쉰 대주교님의 저서
’Seven Words to the Cross’ 中에서 발췌했음을 알려드립니다.
갈현동에서
catholic knight 안젤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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